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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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부 32강 무지의 양상에 따라 생명을 분류하는 혜능/한국학중앙연구원
멸도(滅度), 얻은 바 없다

혜능이 중생들을 분류하는 방식은 독창적이다. 인도식 전통은 무시한다. 예컨대 그는 태생이며 난생을 동물들의 수태방식으로 읽지 않고 인간들의 무지의 양상으로 읽는다. 기실 생명을 뜻하는 불교식 용어 ‘중생’은 깨치지 못한 생명이란 뜻이고, 그 한가운데 인간이 있다는 것을 혜능은 알고 있었다.
혜능은 불교 본래의 정신인 래디칼한 도구주의(radical pragmatism)에 철저했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보살이라도 그렇지, 해바라기나 달팽이를 실질적으로 구원할 길은 없지 않은가. 혜능은 뛰어난 교사답게 법을 깨치는데 있어 수없이 다양한 근기가 있고 아울러 각각의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거기 철저했다.

무지의 양상에 따른 생명 분류
그는 ‘중생’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1) 난생: 미성(迷性)이라, 어둠 속을 헤매면서 ‘여러 업장(業障)을 짓는’ 유형을 가리킨다.
2) 태생: 습성(濕性)이라, 묵은 습성에 따라 살면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부류를 가리킨다.
3) 습생: 수사성(隨邪性)이라, 잘못된 길을 쫓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마음의 안정이 없는 유형이다.
4) 화생: 견취성(見趣性)이라, 자아의식이 강해,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줄 모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5) 유색: ‘조작적 마음으로 함부로 시비(是非)를 판단하여, 안으로 무상(無相)의 이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기까지는 불교 밖의 세속인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6) 무색: ‘안으로 곧은 마음을 지키나, 타인을 공경 공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들은 단지, 돌아보지 않고 화살처럼 뻗는 직심(直心)이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으되, 복덕(福德)을 닦지 않는 이기적 유형이다. (여기서부터는 자신만을 구원하려다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소승의 유형들을 적고 있는 것 같다)
7) 유상: ‘중도(中道)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지각하고 사유하여, 법상(法相)을 애착(愛著)하여, 입으로 붓다의 삶을 말하나, 마음은 그를 본받아 행치 않는’ 유형이다.
8) 무상: ‘오직 좌선을 통해 망상만 제거하려 할 뿐, 자비희사(慈悲喜捨)와 지혜의 방편을 배우려 하지 않는, 목석이나 식은 재 같은 이들’이다. (전형적인 소승의 부류들이다.)
9) 비유상비무상: ‘고정된 진리에 대한 집착은 없지만, 그러나 진리를 향한 구도의 열정이 아직 남아 있는 유형’을 가리킨다. (가장 성숙한 유형이나 아직 근본적 장애 하나인 유위의 마음을 버리지 못한 부류)
혜능은 중생들을 수태의 유형과는 상관없이, 이렇게 ‘도의 수준과 그에 따르는 장애물의 유형’으로 번역해 놓았다.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이렇게 다양한 유형의 장애와 번뇌가 있지만, 그 마음의 때(垢)는 한 가지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모두 중생이기 때문이다. 여래는 대비(大悲)로 이들을 보화(普化)하여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한다. 삼계(三界) 구지(九地)의 모든 중생들은 모두 자신의 열반묘심(涅槃妙心)을 지니고 있으니, 결국 각자 자신 속의 무여열반으로 깨달아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보살은 누구도 건네준 바 없다.
이 겹겹의 장애를 어떡할 것인가. 없애고 태워야지, 다른 수가 없다. 불교는 이 장애를 건너뛰어 ‘진정 자기로 살도록’ 하는 풍부한 노하우를 담고 있다. 혜능은 멸도(滅度), 즉 위대한 자유(大解脫)란 “번뇌(煩惱)와 습기(習氣), 그리고 일체(一切)의 제업장(諸業障)이 멸진(滅盡)하여 다시 나머지가 없는 경지”라고 썼다.
여기 이르는 수많은 길이 있다. 팔만의 길이 있고, 그들은 서로 너무나 다르다. 혜능은 그의 돈교(頓敎)로 유명하다. 돈교는 습기와 업장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자기 속의 본래의 힘과 광명을 믿고 따르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이다. 보살은 중생들이 자기 속의 불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독려하고 이끄는 사람들이다. 그 믿음이 마침내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다. 대승기신(大乘起信)이라는 이름이 그래서 나왔다.
그런 점에서 보살은 아무 것도 해 준 바가 없다. 그는 다만 중생들이 자신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거울을 준비한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도움을 주었으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역설을 혜능은 이렇게 적어주고 있다.
“헤매던 사람이 자성(自性)을 깨달으면, 마침내 알게 된다. 붓다가 자상(自相)을 내보이지 않았고, 자지(自智)를 가진 적도 없다는 것을…. 그러니 언제 중생을 건네준 적이 있었겠는가. 다만 범부가 스스로 제 본심(本心)을 못 보고, 붓다의 뜻을 모르고, 제상(諸相)에 집착하고, 무위의 이치(無爲之理)에 도달하지 못해 아인(我人)의 구분을 없애지 못했으니, 이를 일러 중생(衆生)이라 한다. 이 병(病)을 떠난다면, 사실상 중생이 멸도를 얻은 바는 없다 할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망심(妄心)이 거주하지 않는 것을 보리(菩提)라 하노니,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은 본시 평등(平等)하다!’ 어디 다시 멸도(滅度)할 것이 있겠는가.”
<금강경> 제 3장의 구결에 적힌 혜능의 이 말은 불교, 특히 돈교(頓敎)의 목표와 방법을 간결하게 선포하고 있는 대강령이다. 이 표준구를 놓치고 있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문득, 어느 날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이를 것이다.
부연하자면,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면서도 “건네준 바 없다”는 것은 보살이 혹 가질 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금강경>의 원 문맥이 그렇고, 상식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말하듯이 “건네준 바 없다”는 것은, “중생들이 실제 멸도 된 바 없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는 것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생사의 두 가지 의미
혜능은 “깨달음(菩提)은 다만, 망심(妄心)의 거처를 허용하지 않는 것(妄心無處卽菩提)”인데, 그때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은 본시 평등(平等)하다”고 썼다. 불교를 말할 때마다 언필칭 회자되는 말이고, 조지훈의 시 ‘승무’에도 인용되어 유명해진 이 말을 부연해 보자.
생사(生死)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인연(因緣)들이 화합하여 연기(緣起)하는 객관적 세계의 흐름’이다. 무상(無常)한 법계(法界)는 부단한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 속에 있다. 이 객관적 법(法)으로서의 생사 반대쪽에 주관적 의미의 생사(生死)가 있다. 즉, 그 법계의 변화를 “그냥 두지 못하고,” 그 사태를 나의 관심과 충동에 따라 시비하는 마음 말이다. 우리 모두는 가는 것을 슬퍼하고, 오는 것을 기뻐한다. 혹은 어떤 것들은 가는 것에 환호하고, 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이렇게 여래여거(如來如去)의 법(法)에 대해 무심하지 못하고, 거기 탐착(貪着), 혹은 염오(厭惡)를 일으키는데, 그렇게 주관적 마음이 움직임으로써 비로소 생사( 生死)가 있게 되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가고 옴’이나, ‘살고 죽음’을 말할 수 없다. 혜능이 오랜 은둔을 마치고 나오면서, “흔들리는 것은 깃발이 아니고, 바람 또한 아니고, 바로 너희들의 마음”이라고 한 법문을 깊이 새겨야 한다.
요약하자면, 간택의 판도라를 엶으로써 우리는 중생이 되었다. 그것을 다시 닫았다면, 그는 부처이다. 혜능은 이 뜻을 이렇게 부연 한다: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은 본래 다름이 없다. 사상이 있으면 중생, 사상이 없으면 부처이다.”
200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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