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공, 가르침의 최종 목적지 말자취 끊어질때 실상 드러나
선(禪)이라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이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초점을 맞추어 바로 찾아가고 교(敎)란 팔만대장경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차근차근 그 자리를 찾아간다. 부처님의 마음이 바탕이 되어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다면 그 바탕을 찾아갈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선과 교를 완전히 분리하여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수행을 하는 데 있어 임시 방편이 되고, 추구하는 목적이 달성되면 이 방편은 쓸모가 없어진다.
아플 때 약을 써서 병이 나으면 치료약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방편은 부처님의 실상(實相)을 드러내기 위하여 중생의 병에 맞추어서 임시로 쓰는 약과도 같다. 실상이 드러나면 이 약은 필요 없고, 이 약이 필요 없기에 모든 방편이 사라지는 자리를 우리는 ‘필경공(畢竟空)’이라고 한다. 필경공에서 실상의 이치가 드러나고, 실상의 이치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필경공이 된다. 이런 내용을 <선가귀감> 9장에서는 말한다.
然 諸佛說經 先分別諸法 後說畢竟空
祖師示句 迹絶於意地 理顯於心源
그러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들은 먼저 모든 법을 분별하고 있지만 맨 뒤에 가서는 필경공을 말한다. 조사 스님들이 베푸신 짤막한 가르침은 중생들의 마음자리에서는 그 자취가 끊어지지만 그 마음의 근원에서는 실상의 이치가 드러난다.
이 내용에 대한 풀이는 규봉(780-841) 스님의 <도서>에 아주 잘 설명하고 있으므로 그 부분을 따와서 소개해 보겠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셔서 가르침을 펼치는 것과 조사 스님들이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제도하는 것은 그 일의 바탕이 제각기 다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세상 사람들의 영원한 의지처가 되어야 함으로써 ‘실상의 이치’를 자세히 드러내야 했고,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은 중생들을 곧바로 제도해야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실상에 깊이 통하게 해야 했다. 그들의 마음을 깊이 통하게 하는 일은 반드시 말을 잊어야 가능한 일인 만큼, 말끝에 그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중생들의 마음에서 조사 스님들의 말 자취가 사라지면 마음의 근원에서 ‘실상의 이치’가 나타나니 신(信)·해(解)·수(修)·증(證)을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성취되고, 부처님의 경전이나 율장(律藏)과 논(論) 소(疏)들을 따로 익히지 않아도 저절로 그 뜻이 다 통한다.”
서산 스님은 <도서>에서 인용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세상 사람들의 영원한 의지처가 되어야 함으로써 ‘실상(實相)의 이치’를 자세히 드러내야 했고,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은 중생들을 곧바로 제도해야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실상에 깊이 통하게 해야 했다”라고 하는 부분만 따와서 본문에 대한 설명을 대신하였다.
부처님은 근기가 다양한 중생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편으로 온갖 법을 말하지만, 맨 마지막에 가서는 반드시 모든 법을 부정한다. 대승경전에서 부처님이 온갖 법문을 설하시다가 맨 마지막에 가서는 ‘한 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라고 하는 것들이 이런 예들이다. 모든 법은 많은 인연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실상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법이 부정되는 자리, 모든 방편이 부정되어 비어 버리는 자리를 ‘필경공(畢竟空)’이라고 한다. 이 필경공이야말로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이 나타내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로서 실상을 드러내는 이치이다.
실상의 이치는 말자취가 끊어진 마음의 근원에서 드러난다. 조사 스님들이 던지는 짤막한 가르침은 중생들의 온갖 시비 분별을 끊어주는 도구이자 화두이지만, 이 말의 자취가 중생들의 마음자리에서 사라질 때 실상의 이치가 그 마음의 근원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말의 자취가 중생들의 마음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경지인 필경공, 이것은 마침내 도를 증득한다는 뜻의 ‘필경증(畢竟證)’과도 같은 말인데, <돈오입도요문>에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도를 닦는 이는 무엇으로 증득을 삼습니까?” “궁극적인 증득으로써 증득을 삼는다.”
“어떤 것이 궁극적인 증득입니까?” “증득할 것도 없고 증득할 게 없다는 그것조차 없는 것을 ‘궁극적인 증득’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증득할 것이 없는 것’이며, 어떤 것이 ‘증득할 게 없다는 그것조차 없는 것’입니까?”
“밖으로는 색과 소리들에 집착하지 않고 안으로 헛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경계를 얻은 이를 ‘깨달음을 증득했다’고 한다. 깨달음을 증득할 때에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을 ‘증득할 것도 없는 것’이라고 하고, 이 ‘증득할 것도 없는 것’을 얻을 때에 또한 ‘증득할 것도 없는 것이라는 그 생각조차 내지 않는 것’을 ‘증득할 게 없다는 그것조차 없는 것’이라고 한다.”
서산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胡亂指注 臂不外曲
제멋대로 꿰맞추어서 말을 하더라도
너의 팔이 밖으로 굽지는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