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사 곳곳에 ‘만만치 않은’ 신라 수행자 등장
온갖 혹평 속에서도 안목 두드러지게 눈부셔
경주토박이들의 자존심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절집에서도 경주출신 승려들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이들이 여럿이다. 경상도라는 지명이 경주와 상주에서 나왔으니 TK문화코드가 그전만큼은 못하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특히 불교문화는 PK와 더불어 부동의 주류이다.
선어록에서 ‘경주’는 ‘신라’로 대체된다. 그런 신라 역시 중화에서 본다면 변방이 된다. ‘전과신라(箭過新羅:화살이 신라를 지나가버렸다)’라는 말은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비유로 자주 쓰였다. 비슷한 표현으로 ‘새매가 신라를 지나쳤다’거나 ‘눈먼 노새의 일행을 따라 신라를 지났거늘’이라는 말에서 보듯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
하지만 동쪽에 떨어져있는 신라는 중국과 더불어 ‘이쪽과 저쪽’이라는 양변을 동시에 가리킬 때도 등장한다. ‘당나라에서 북을 치면 신라에서 활을 쏘고’(蔣山 川)라고 하였고, 원오극근 선사는 ‘당나라에서 북을 치니 신라에서 춤을 추고’라고 한 바 있다. ‘불은 신라에서 났는데 발은 여기(중국)에서 데었다(海印 信)’ 내지 ‘호남에서 발우를 폈는데 신라에서 씹으니(慈明 圓)’도 같은 맥략이라고 하겠다.
사실 중원에서도 신라촌놈이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때로는 버거움까지 묻어나온다. 당 태종이 화살을 신라에 맞추어두고는 “유연(幽燕:요녕성에 있던 부족이름)은 오히려 쉽지만 가장 수고로운 것은 신라다”라고 하였다.
만주를 무대로 설치던 민족은 별것 아닌데 아랫쪽의 동이족 때문에 정치적 군사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향산 량(香山 良)이 육조대사를 평하면서 “죽은 뒤에 땅굴 속에 묻혔다가 신라 사람에게 머리가 깨지지 않았을 것이려니”라고 하여 신라승려에 의한 ‘육조정상동래설(六祖頂相東來說)’을 언급한 내용도 보인다.
육조선사가 열반하신 이후 등신불로 모셨는데 그 머리를 신라의 승려가 가지려 왔다는 기록이 양국에서 다 전하고 있다. 물론 중국측 기록은 ‘시도했으나 들켜서 실패했다’라고 하여 미수에 그쳤음을 강조하고, 신라쪽 기록은 ‘거사에 성공해 쌍계사로 모시고 왔다’라고 하여 육조단경 덕이본의 부록으로 단단히 붙여놓고 있다.
그러다보니 신라 승려는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선문염송〉1082칙에서는 ‘점파(占波)사람을 끌어다가 신라 사람과 박치기를 시키라’고 했고, 고상한 설두중현 선사마저도 “신라승려를 알고자 하는가? 다만 돌기둥에 부딪친 눈먼 첨지일 따름이다”라고 혹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수행자들의 안목은 선종을 빛낼만큼 두드러지게 눈부셨다.
대혜종고 선사는 “신라에는 밤중에도 해가 밝다”고 하였고 해인 청(海印 淸)은 “신라에는 한낮에 삼경(三更)종을 친다”고 했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밤에 북을 친다” 고도 하여 어두운 가운데 밝음이, 밝음 가운데 어둠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묘사하고 있다.
덕산선사가 시중(示衆)하여 말했다.
“오늘저녁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질문하는 놈은 삼십방을 때리리라.”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떤 납자가 나와서 절을 하니 선사가 바로 때렸다. 그러자 그 납자는 물었다.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왜 때립니까?”
“그대는 어디 출신인가?”
“신라입니다.”
“그렇다면 뱃전을 밟기 전에 삽십방을 때렸어야 하는 건데.”
이 말을 들은 대위 철(大 喆)이 이렇게 찬탄했다나 어쨌다나. “신라의 그 납자가 아니었다면 천고의 맑은 바람 어떻게 떨쳤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