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됨이 없이 행하는 우리 생활이 그대로 만행
오늘 날씨가 따뜻한 거 보니까 개구리 입이 떨어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허허허…. 여러분도 날씨가 따뜻하니까 좋죠? 내 입술에 병이 나서 말을 잘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치과에 가서 이를 뺐더니 이렇게 부어오르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여러분께서 여직껏 길을 걸어오셨으니까 오늘은 질문과 토론으로 우리 해 보십시다. 질문을 하실 때에 차근차근히 한 건씩 얘기하세요. 범벅을 해서 말씀하시지 말고요.
▲질문자1(남): 저희들을 위해서 이렇게 항상 법문을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은 윤회 사상에 대하여 스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인생의 생사 변이가 윤회이며, 우주의 물리적 변화가 윤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말씀하시고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 변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도윤회의 깊은 도리를 우매한 중생이 믿지 못하므로, 옛 조사님들은 경전이 아니고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이 아니면 이 말씀을 하실 수 없다고 한탄한 것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고 봅니다.
성암 선사는 「권발보리심(勸發菩提心)」에서 “나는 중생과 더불어 수없이 많은 겁 동안 해탈 못하고 생사에 머물며 인간과 천상, 사바세계와 피안의 세계에 갖가지 모습으로 출몰하고 부침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스님께 육도윤회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다소 중복되는 내용이 있더라도 저희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자세하게 법문하여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불교의 근본 교리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합니다. 그럼 제법(諸法)이 무아(無我)라면 어찌 윤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까?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평상시에 여러분이 살고 있는 것이 만행(萬行)입니다. 그대로 만행입니다. 만행이 따로 있어서 만행이 아니라, 그대로 만행입니다. 끝없이 이어가는 그 행이, 고정됨이 없이 행하는 그 생활이 즉 만행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와서 만행을 하기 때문에 결국은 육도만행(六道萬行)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만행이 있기 때문에 육도윤회가 있다는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육도윤회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육도윤회에 매이지 말라, 끄달리지 말라고 가르침을 주신 거죠. ‘끊어라’ 그러신 게 아니라 ‘매이지 말라.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고정됨이 없어서 발 하나하나 디뎌 놓는 것도 바로 윤회거늘, 어찌 한 발짝 떼어 놓고 또 한 발짝 떼어 놓는다고 해서 거기에 치우쳐서 끄달리고 매이느냐.’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다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윤회에 매이지 말라.’ 하신 겁니다.
내가 지금도 얘기를 하다 올라왔습니다마는, 예를 들어서 아까 차를 한 잔 주는데 뜨거웠어요. 여기 올라오긴 해야겠고 이거를 빨리 식으라고 젓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뜨거운 것도 아니고 찬 것도 아니다.” 즉 “네가, 차걸랑은 데워 먹고 뜨겁걸랑은 식혀 먹어라. 이게 진법(眞法)이다.” 이런 거와 같이 우리가 항상 육도만행을 하면서 육도윤회를 합니다.
그런데 윤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생사에 의해서만이 윤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찰나찰나 돌아가는 것이 윤회입니다. 화(化)해서 나투면서 찰나찰나 변화되면서 돌아가는 이 만행이 즉, 윤회입니다. 윤회인 까닭에 그 윤회에 매이지 말라고 한 겁니다. 재차 얘기하지만 ‘매이지 말라. 끄달리지 말라. 그대로 볼 수 있고 그대로 들을 수 있다면 그대로 여여하니라. 그대로 점프해서 넘어가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육도윤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 생활하면서 고정됨이 없이 공(空)했다고 하는 자체가 바로 그것이니 매이지 말고 끄달리지 마라.’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 다 공했느니라. 너를 세울 것도 없고 나를 세울 것도 없고, 나를 꼬집어서 내세워서 나라고 할 게 없느니라. 안과 밖이 다 그러니라. 안에도 내 집안의 모든 생명체의 의식들인 내가, 그러니까 사람 속엔 사람이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런데 어떠한 것을 꼬집어서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나는 공하고 없다. 내세울 게 없다. 없다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어떤 걸 세울 게 없다. 세울 게 없는데 무엇에 매이고 무엇에 끄달릴 게 있느냐? 그러니까 윤회라는 이름조차도 없느니라. 살면서 모두 그 이름을 지어 놓지 않는다면 질서를 문란케 하고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 놓고 부르느니라.’ 했습니다.
그 질문을 하셔야 또 그것이 상세하게 돌아가겠으니까, 질문들 잘하셨어요. 별달리 따로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생활하는 것이 만행이며, 우리가 생각하고 사는 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그러니 생각하고 사는 것이 윤회라면, 이것 보세요. 아까도 물 얘기 했지만, 뜨거운 거를 억지로 식히려고, 금방 먹기 위해서 막 식히려고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어요. 놔두면 저절로 그냥 식기도 하고, 정히 급하면 찬물에다 띄워서 식혀서 먹어라. 재간대로 해라, 재간대로 하는 반면에 데워서 먹고 식혀서 먹어라. 매사의 일이 다 그러합니다. 그러니 아등바등 애쓰지 말고 내 재간껏 식혀 먹고 데워 먹고, 또 그렇게 급하지 않으면 넉넉히 그냥 놔두면 식어! 때가 되면 그냥 먹게 돼. 급한 거는 빨리 식혀서 먹고, 급하지 않으면 그냥 놔둬도 먹게 된다 이겁니다. 우리가 마음이 조급하고 관습에 의해서 복잡하게 생각하니까 삶에 대해서 어지럽고 괴롭고 그렇지, 하늘이 무너진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괴로울 일이 없는 겁니다.
이 세상이 두 쪽이 나고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불교가 없어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복잡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느긋하게 생각하신다면 바다를 삼킬 수 있고, 삼키기만 해서도 아니 되니까 토하기도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바다를 삼킬 수 있고 바다를 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능히 부처이며 능히 법의 보살이며 능히 어느 보살이 아니 되는 게 없고 어느 중생이 아니 되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게 아니고,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 틈에서 부처가 나는 것이지 우리들을 떠나서 생활을 떠나서 부처님이 있고 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이 삼천 년 전에만 계신 게 아니고, 지금 이렇게 불도에 귀의해서 알려고 애를 쓰는 분들이 계심으로써 부처님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십니다.
제법이 무아라고 했는데 윤회가 될 수 있겠느냐고 했죠? 무아라는 뜻은 아십니까? 말씀해 보세요. 무아가 뭔데요?
▲질문자1(남): 이 세상의 모든 법과 자기 자신조차도 없다는 그런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님: 우리가 제법이라 하면 일체를 말하고, 이 무아라고 한다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없는 그 가운데에 나, 자아(自我)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없어도 아니 되고 저게 없어도 아니 되고 그냥 꽉 차 있습니다. 있기 때문에 무아라고 한 것이지 이러한 무아가 없다면 윤회가 어디 있으며, 윤회가 없다면 이러한 무아가 어딨습니까? 눈이 없는데 귀가 어딨고 귀가 없는데 눈이 어딨겠습니까? 생명이 없으면 육신이 보이지 않아서 무효고, 육체가 없어도 보이지 않으니깐 무효고, 또는 생각을 해내지 못해도 목석이니깐 무효야. 다 갖추어서 생김생김이 잘생기고 잘 행할 수 있는 똑바른 사람이라야 그걸 제법의 무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뜻이 그렇단 얘깁니다. 그래서 세상 뜻이 모두가 공해서 찰나찰나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가는 경지이기 때문에 제법무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없어서 무아가 아니라, 우리 몸뚱이 속에 너무 많아서 어떤 거를 내세워서 나라고 할 수 없고, 내가 먹었다고 할 수 없고, 내가 살림살이를 지금 하고 간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아입니다. 우리가 따지고 본다면 모두가 작은 것 큰 것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모든 법칙에 의해서는 하나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법이 무아인데 어찌 윤회가 있겠습니까?’ 이런다면 우린 움죽거리지도 말고 목석이 돼야죠. 물도 파도도 없고 흘러가는 것도 없어야 되겠죠? 그런데 넉넉히 흘러가고 움죽거리고 자동적으로 아주 질서정연하기 때문에 무아인 것입니다. 허허허….
그리고 참, 아까 어느 스님이 뭐라고 그러셨댔죠? 피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뭐라고 그랬더라?
▲질문자1(남): 네, 성암 선사께서 말씀하신 건데요, “나는 중생과 더불어 수없이 많은 겁 동안 해탈을 못하고 생사에 머물며 인간과 천상, 사바세계와 피안의 세계에 갖가지 모습으로 출몰하고 부침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스님: 그러니까 함이 없이 그 말을 했다고 봅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아생전에, 몸 떨어지기 전에 알아야지 몸 떨어지고 난 뒤에 해탈을 하려면 해탈치 못합니다. 부딪침도 없고 더함도 덜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습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생전에, 윤회에 매이지 말고 모든 착을 떠나서 그대로 그대로 해라 이겁니다. 그대로 모두 하고들 계십니다. 그대로 하고 계신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지금. 너무나 기가 막히죠. 여러분이 모두 고정됨이 없이 공해서 돌아가는 도리로 생활을 하시면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서 뭐 하나를 생각하면 꼭 붙들고 늘어지고, 이렇게 마음이 장난을 하는 겁니다. 그 장난에 끄달리고 그러니까, 모두 하나하나 생각하는 게 입력이 돼서 바로 그게 악업 선업이 되는 거죠.
그러니 이 어항 속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바세계에서 살아나가면서 이 사바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죠? 그렇듯이 우리는 그 어항 속에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피안의 그 언덕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네 모습이 어떠하든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이거는 내가 하는 소리겠죠. 하여튼, 누가 하는 소리든 그냥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마음을 넓게 갖는다면 우주 바깥을 벗어날 수도 있는 겁니다. 공기 바깥을 벗어날 수도 있는데, 왜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느냔 얘깁니다, 예? 마음을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왜 마음을 가지고 마음대로 못 하고 얽매여서 그냥 고인 물에서만 헤매고 도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지혜롭고 물리가 터져서, 점프를 할 수 있는 능한 마음이 생겨야 되겠으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참, 마음이 묘법이다. 마음이 묘하다. 마음이 악으로 떨어지게 할 수도 있고 선으로 떨어지게 할 수도 있다. 점프를 해서 이 지구 바깥으로 벗어날 수도 있고 우주세계를 한 찰나에 돌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마음이 마음을 가둬 놓고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주인공’이라 하는 것은 한마음을 말하고, 전체, 안과 밖이 하나로 돌아가는 거를 ‘한마음’이라고 합니다. 그걸, 즉 다시 말해서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을 내기 이전 마음은 바로 다스리는 마음의 선장입니다. 다스려야 할 선장! 잘못되고 잘된 걸 뻔히 아는 선장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내는 것을 이렇게도 내고 저렇게도 내니까, ‘요럭하면 안 되잖아, 이럭해야 되잖아.’ 하고 다스리는 선장이 있단 얘깁니다. 그렇게 선장이 마음을 다스리면서 마음을 내니까 육신은 덩달아 따라서 움죽거려준다 이겁니다.
그러니 이 말 저 말이 들어가면 산란해서 공부를 못해요. 진짜 공부를 못합니다. 그래서 경(經)을 덮은 겁니다.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경을 덮은 겁니다. 자꾸 이 말 저 말을 해서, 이리로도 갈 수 없고 저리로도 갈 수 없이 만들어 놓으니까요. 그러니까 들이고 내는 데는 오직 내면세계 바로 그 한 구멍밖에는 없다. 빗장 없는 빗장을 쥐고 늘어져라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한생각이면 그냥 윤회에 끄달리지 않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아, 일체가 다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거니까, 윤회라는 것에도 매이지 말자.’ 하고 놓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 포함해서 놓는다면 몇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를 깨닫는 데에 지름길이며, 또 업식을 다 무효화시키는 데 지름길이며, 생활을 이끌어가는 데 지름길이며, 나를 건강하게 하는 데도 지름길이며, 모든 것의 지름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생각을 잘 하십시오. 내가 열 마디 백 마디 해 봤자 여러분이 생각 한번 잘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끌어 주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차원이 같아야 됩니다. 이 배우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과 이끌어 주려고 하는 마음과 동일해야만이 바로 한자리 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억겁을 통해서 바로 인연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컵이 아니었더라면 물을 담지 않을 것인데, 컵이 됐기 때문에 물을 담는 것입니다. 요것이 인연입니다. 매사에 정말, 조금도 틀림없이 인연에 따라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폐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인연을 누가 만드느냐. 즉, 마음이 만드는 겁니다. 마음이 인연을 만드는데, 나쁘게 만들기도 하고 좋게 만들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하죠.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했으면 매양 나쁜 걸로만 아는데, 가만히 지켜보면 매양 나쁜 것만은 아니죠. 자꾸자꾸 마음을 내 준다면 선한 길로 접어들게끔 돼 있거든요. 그래서 이끌어서 건져라, 이런 말이죠. 이 모두가 사람사람이 인연에 따라서, 차분하고 너그럽고 지혜롭고 자비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좋게 전부 한마음이 돼 주고, 악하게 마음을 쓰고 “저것! 요것!” 하면 악한 사람으로서 모이게끔 돼 있거든요.
그러니 마음에 따라서 모든 것이 오고 감이 있는 겁니다. 이 세상, 차안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도 마음이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항상 말씀드리죠.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습이 자꾸자꾸 바꿔진다고요. 사람이 사람으로만 있지 않고 짐승이 짐승으로만 있지 않는다고요. 그러니 한 찰나에 살 것을 그렇게 해서 딴 모습으로 나오게 되면 그 습성에 또 매여서 착이 되고 습성이 되고, 그래서 그 모습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눈먼 거북이가 물에 가라앉았다가 천 년에 한 번 떠오를 때에 구멍 뚫린 뗏목 하나를 만나서 그 구멍으로 나오는 게 그렇게 어렵다 이 소리입니다. 우리가 마음공부 하는 자리에 이렇게 서로 인연이 돼서 만난 것도 수억겁을 거쳐서 된 겁니다. 여러분은 99%나 부처님 될 가능성이 있으니 ‘지금 부처님이 될 수 없을까, 있을까?’ 이러지 마시고요, ‘부처님 될 수 있나 없나?’ 이걸 따지지 마시고, 그대로 묵묵히 한 발 한 발 걸어가신다면 그대로 부처죠, 뭐. 또 질문하실 것 있습니까?
▲질문자1(남): 네. 두 번째 질문을 올리겠습니다. 윤회가 분명 이렇게 존재하는데요, 저희들 현재 의식에서는 소소영영하게, 스님께서 지금 하신 말씀처럼 의식을 하는데, 지나간 전생 일은 현재에서는 하나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거는 어떻게 된 도리입니까?
▲스님: 그래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거를 알아야 알 수 있는 거지 그거를 모르고는 절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깨우친 분들은 과거 생을, 즉 말하자면 무아의 세계를, 이 사바세계와 무아의 세계를 그저 한 찰나에 들고 나는 겁니다. 이렇게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그냥 넘나드니까 모를 리가 있나요? 삼천 년 전도 알고 삼만 년 전도 알고 삼십만 년 전도 알 텐데,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왜, 모른다고만 하지 알려고는 안 합니까?’ 이겁니다. 그러니 그저 모른다고 한탄하지 말고, 우리가 심안으로 볼 줄 알고 들을 줄 안다면 아마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넘치게도 하지 말고 너무 안 하지도 말고 그저 차분히 진실로 믿고 내 뿌리에서만이 나올 수 있다 하고는 그냥 자꾸 자꾸 자꾸 지름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질문자1(남): 세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대표 질문이라서 좀 깁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윤회 사상이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라면, 조상과 가족과 친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경을 읽어 그들을 천도하는 것이 과연 효과가 있겠습니까? 또한 그들이 윤회를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가 있는 것인지요?
▲스님: 그래서 이 마음공부로 이끌어 드리는 거죠. 우리가 모른다면, 캄캄하다면 공동묘지에서 시체를 꺼내도 문제가 되고요, 갖다 넣어도 문제가 되고, 하하하…, 가도 와도 전부 걸려요. 또 도와줄 수도 없고요. 나도 도울 수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도와줍니까? 그러니까 ‘나부터 알라. 나부터 안다면 전부 가설이 돼 있어서 통하니까 전부 건질 수가 있다.’고 한 겁니다.
그래서 마음공부 하신 분들에 한해서 때로는 꿈에 조상이 보이고 생시에도 조상이 있고 이런 거를 그냥 아시죠. 너무 극성스럽다, 너무 서로 싸운다 이럴 때도 거기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모든 게 둘이 아닌 주인공인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다 네가 해결할 수 있지 않은가.’ 하고 모든 걸 놓으면 아주 마음이 태평하게 되고 모두 좋아지게 됩니다.
이런 것을 아마 아시는 분은 아실 거예요. 그런 거 하나뿐이 아니라 좋은 데로 가게 하고, 오래 살게 하고 병이 없게 하고, 가난을 벗어나게 하는 것도 전부 첨보돼 있습니다. 그런데 왜 도와줄 수가 없습니까? 전부 자기와 둘이 아닌데 어째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까?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4년 3월 6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