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제 3장은 말한다. “보살은 우주 안의 모든 생명을, 사람을 포함하여 미물과 천상의 존재들에 이르기까지, 다들 무여(無餘)열반에 들도록 인도(滅度)한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인도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무도 인도된 바 없다. 왜냐? 보살은 사상(四相), 즉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 핵심어인 사상(四相)을 살펴본다. 이들은 ‘자아의 네 가지 양상, 혹은 위상’에 해당한다.
하나 미리 짚어두자면 이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다. 인상(人相)은 아상(我相)과 대립되어 보이는 듯하지만, 실은 같은 자아의식의 한 유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이른바 인아상(人我相)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인아상은 ‘남(人)과 나(我)를 갈라보는 의도적 구분’으로 번역되지만 인상(人相)은 ‘남’이 아니라 ‘사람’ 혹은 ‘인격’의 구조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 인(人)자는 이렇게 여러 뜻을 가지고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1) 콘즈의 해석
이 넷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한문만 보아서는 선명치 않다. 한역의 근본은 산스크리트어일 것이니, 거기서 직접 영역한 콘즈의 도움을 받아볼까 싶었다. 콘즈는 이 넷을 이렇게 영역하고 있다.
“And why? He is not to be called a Bodhi-being, in whom the notion of a self or of a being should take place, or the notion of a living soul or of a person.” 번역하면 이렇다.
“왜냐? 그런 사람은 보살로 불리지 않을 것이다. 보살에게는 ‘자기’라는 관념, ‘존재’라는 관념이 일어나지 않는다. 혹은 ‘살아있는 것’이라는 관념, 그리고 ‘인간’이라는 관념도 없다.”
반복하자면 콘즈는 아상(我相)을 ‘자기’라는 관념(the notion of a self), 인상(人相)을 ‘존재’라는 관념(the notion of a being)으로, 그리고 중생상(衆生相)을 ‘살아있는 것’이라는 관념(the notion of a living soul), 수자상(壽者相)을 ‘인간’이라는 관념(the notion of a person)으로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이나 해설은 없다.
그는 이 책 서문에서, “설명하지 않고 남겨 놓은 것은, 내게는 애매하거나, 혹은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부연한 바 있는데, 이 대목에서는 자신이 없었을까.
구마라습의 한역과 콘즈의 영역을 대조하면 공통점도 분명하다. 아(我)가 ‘자기’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고, 인(人)은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중생(衆生)이 ‘살아있는 목숨들’을 가리키는 것이야 상식이고, 또 수자(壽者)는 ‘시간의 지속성’과 연관된 중심적 인격을 가리키고 있다.
요컨대 이런 관념이 보살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을 종합하면 한 마디, 결국 무아(無我)가 된다!
2) 내 억측의 해석
이 넷의 불교적 맥락과 논란을 따지기 시작하면 머리가 지끈거릴 수도 있다. 거두절미하고 이 넷을 다른 방식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가령, 이 넷을 ‘자아’의 외연이 확대해 나가는 것으로 읽으면…. 이를테면 이기주의는 개인적 이기주의뿐만 아니라, 가족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민족적 배타주의, 나아가 인간 중심주의가 있다. 외연은 확장되어도 이기적이라는 점, 그리고 그 동아리 바깥에 대해서는 냉담하고 배타적, 공격적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금강경>뿐만 아니라, 불교는 바로 이 같은 분별(分別), 즉 ‘구분 의식’이 인간의 불행과 비참의 근본 원인이라고 말했다.
“분별(vikalpa)은 이 세계 전체의 고통을 산출하는 무지(無明)의 핵심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그리고 그 경험 세계에 수반되는 모든 악은 잘못된 구분에서 비롯된 생각이 구축한 것이다.” (E. Conze,
사상(四相)은 자아가 동일시하는 정체성의 범위를 말해주고 있지 않을까. 요컨대, 아상은 개인적 수준에서의 자아의식이고, 인상은 이름 그대로 집단적, 종족적 수준에서의 자아의식이며, 중생상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원초적 욕구이며, 수자상은 ‘지속’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조바심을 가리킨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제멋대로의 엉뚱한 해석이라고 핀잔을 줄지 모르겠다.
3) 자아의 토대(住)
아무려나 각자 이런 다양한 수준에서의 자아의식을 ‘토대(住)’로 세상을 본다. 그러니 모든 것이 주관적 이미지(相)가 아닐 수 없다. 예외 없이 누구나 이 토대에 바탕 하여 사태를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만든 자기만의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이를 삼계유식(三界唯識)!이라고 부른다.
내 밖의 대상은 언제나 ‘나에 대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나의 관심과 이익에 호의적이고 유익하면 푸른색 딱지를, 그렇지 않으면 빨간색 딱지를 받는다. 내 밖의 것은, 사물이든 사람이든, 내게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인지된다.
요컨대, 내 밖의 대상은 나에 대해서 호의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아니면 중립적이다. 물론, 모든 대상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대상’은 나의 관심과 주의, 그리고 이해관계를 통해서 ‘이름표를 얻은’, 즉 ‘지각되고 정립된’ 것 만이다. 김춘수의 유명한 시를 예로 들자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그는 내게로 와서 비로소 ‘꽃’이 될 수 있다.
이 활동, 자연을 포획하여 재갈을 물리고, 그것을 나의 목적에 맞게 노예로 부리는 모든 활동의 기저, 그것을 우리는 ‘나’라고 부른다. 우리가 말하는 세상, 혹은 인간관계는 기실, 이런 도구화의 위태롭고 불안정한, 주로 엇갈리고 때로 충돌하는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음을 고쳐야 세상 안팎에 평화가 온다. 이것이 ‘마음’의 비밀이다. 환상의 거짓 마음을 비우고, 진정 나였던 마음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불도(佛道)이다.
문득 ‘나 아닌’ 마음을 비울 때, 도구화의 네트워크였던 세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전혀 다른 천지가 펼쳐진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사상(四相)으로 인한 의식 무의식적 오염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 자각(智慧, 般若)로 하여 갈등과 혼란은 일시에, 촛불 앞에 어둠이 물러가듯, 문득, 기적처럼 사라진다. 거기가 이루어야 할 모든 것이다.
4) 환상을 깨라
누구나 환상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아, 혹은 사상(四相)이 추동시킨 환상, 신기루, 그림자 속에 살고 있다. 아시겠는가.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 것은 기본이다. 모두 예외 없이 왕자병과 공주병 증후군을 앓고 있다. 남자들은 가정이나 직장에서 힘과 권세를 과시하고자 한다.
여인네들은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 은근한 칭찬에, 그만 도취되고 만다. 모두들 칭찬하면 좋아하고, 비난하면 싫어한다. 모두들 자신은 착한데, 세상에는 싸가지 없고 파렴치한 사람이 너무 많으며, 자신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데, 다른 사람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매도한다. 자신은 아름다운 로맨스를 가꾸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불륜에 빠져있다고 탄식한다. 같은 일이라도 내게 적용되는 기준과 남에게 적용되는 기준이 다르다. 내 편의 잘못은 작아 보이고, 저편 그룹의 잘못은 아주 커 보인다.
우리의 판단과 견해, 그리고 정서와 충동은 이런 과정을 통해 근본적으로 오염되어 있다. 그 오염은 우리가 날마다 행하는 말과 한 순간도 쉬지 않는 생각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 때문에 불교는 말을 불신하고 위태롭게 여긴다. 아울러 생각과 아이디어를 개발하기보다, 그 흐름을 제어하고 제압하고, 나아가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기억할 것인데, <금강경>은 말한다. 야생의 소를 길들이듯, 우리는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