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다. 이웃에 살고 있는 단골가게 아저씨였다. 친절하기 그지없어 ‘말만 잘하면 신발도 공짜로 주겠다’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열한 살짜리 어린 소녀를 성추행했다. 그런 다음 살해해서 불에 태웠다.
언론을 통해 사건을 전해 들으면서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싶었다.
어찌 이런 일이 또… 사람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분노에 지쳐 아예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무력감까지 들었다.
10년 쯤 전 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원으로 자원봉사할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절규. 피해자는 과년한 처녀들뿐만이 아니었다. 열 살도 안 된 여자아이들, 그리고 어린 남자아이들까지 성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당한 것만도 서러운데 이를 문제시하고 가해자 처벌을 원하면 사회가 피해자를 냉대했다. 별 것 아닌 일 갖고 떠들어댄다며 핀잔을 주고, 꾸며댄 일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당한 사람 잘못 아니냐고 덮어씌워 이중의 고통을 주기도 했다.
귀가 의심되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일이 바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도 상담 전화통이 쉴 사이가 없을 정도로.
성폭력 상담 자원봉사를 그만둔 뒤 한동안 잊고 살았었다. 그런 일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애써 외면하고 살았다.
그런데 다시 어린 소녀의 죽음을 전해 들으면서 그때의 혼란스러움, 분노, 막막함이 되살아났다.
이번 사건의 가해자는 시신을 은폐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까지 범행에 끌어들였다고 한다. 잡혀갈 때 주범인 그 아버지가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은 잘 모른다, 내가 저지른 짓이다.
아, 그도 사람이었다. 그도 자식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더욱 혼란스럽고 더욱 화가 났다. 사람이면서, 사람이면서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사실, 그도 피해자일 수 있다. 심리적 문제가 깊어 어린 소녀에 대한 성적 욕망을 주체 못하는 병리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를 푸는 도구로만 보는 병에 걸렸을 수도 있다. 상대방인 어린 소녀가 자신을 유혹했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하거나, 상대방을 너무도 위하고 아끼기 때문에 사랑을 베풀었는데 너무 반항을 해서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인지적 왜곡을 일으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심리상담을 하는 사람으로서 인간의 복잡한 심리 과정과 기제를 배우고 나니 가해자를 미워만 할 수도 없다. 그의 생리적, 심리적 인생에서는 또한 그럴 만한 내력과 사유가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의 가해자였던 50대 남성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 젊고 건강한 청년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이번 사건을 가슴 아프게 겪으면서 한편으로 조금이라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일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해결해야 할 과제임을 우리 사회가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전 같으면 남의 일,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했던 일을 이제 우리 일, 바로 내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함께 풀어갈 방도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선악(善惡)의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고락(苦樂)의 과보를 받는다는 불교의 공업(共業) 개념을 절절히 깨닫고 실천했으면 한다.
이게 바로 열한 살짜리 소녀가 처참하게 죽어가면서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