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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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네가 관음을 알어?/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마조선사 모시던 원주, 회계문제로 옥살이
스승 도움으로 20년간 금전 거래내역 기억

중국 보타낙가산의 최초 관음성지는 ‘불긍거(不肯去)관음원’이다. 지금은 이 지역전체가 사찰로 가득한 절골을 이루고 있다. 〈불조통기(佛祖統紀)〉에 의하면 일본승려 혜악이 오대산에서 관음상을 가지고 귀국하려 하였으나 암초 및 풍랑을 만나 출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조통기〉보다도 140년 이전인 1124년 저술인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전체스토리는 비슷하나 주인공은 신라상인으로 되어있다. 다만 앞바다에서 뱃길을 막았다는 암초이름인 신라초(新羅礁)는 두 책 모두 같다. 불긍거는 ‘가기싫다’는 말이다. 고려 진각혜심의〈선문염송〉1106칙 ‘장경무찰(長慶無刹)’이라는 공안 속에 “관음이 고려에는 가지않으려고 한다(不肯去高麗)”는 말이 나온다.
어쨌거나 관음이 일본이건 해동 땅이건 모두 가기 싫다고 했다는 중국적 발상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
장경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다.
“고려의 승려가 관음상(像)을 조성하여 명주(明州)에서 배에 실으려고 했습니다. 여럿이 들어 올리려고 하는데도 꿈쩍을 않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개원사(開元寺)에 모시고서 헌공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관음이) 몸을 나타내지 않는 국토가 없거늘 어째서 고려에는 가시지 않으려고 하는지요?”
그렇거나 말거나 한국 낙산사 홍련암이 중국의 불긍거관음원과 분위기가 너무 닮아 놀랐다.
관음성지는 바닷가가 주 무대지만 바다에 버금가는 호수도 무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호남이라는 말은 동정호 남쪽지방으로 당시 선종의 주 활동무대였다. 당연히 관음과 동정호가 함께 묶이게 된다.
운문선사가 새로 방부를 들인 납자에게 물었다.
“관음이 왜 동정호(洞庭湖) 속으로 들어갔는가?”
“잘 모르겠는데요?”
“(멍청한 놈, 꺼져버려!) 큰방으로 가서 정진이나 해!”
그리고는 자문자답한다. 선어록에서는 이를 대어(代語)라고 한다.
“(아이구, 속 터져) 내가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선사스님께서 관음을 물으신다면 저는 미륵으로 대꾸하겠습니다.”
마조선사가 84명의 선지식을 배출한 까닭에 세상사람들은 그를 관음보살의 응화라고 불렀다. 그 곳에서 20년동안 원주를 한 승려가 있었는데 절 살림을 하면서 문서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관리가 감사를 하는 바람에 결국 옥에 갇히게 되었다. 당시 절들은 거의 반쯤은 관공서 규칙에 준해 운영된 까닭이다. 감옥에서 원주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마조 스님은 성인인지 범부인지 모르겠다. 20년동안 시봉했는데 오늘날 이렇게 고통스런 과보를 받게 되다니.”
마조선사는 그런 원망을 알게 됐고, 이어 시자에게 향을 사르게 한 다음 단정하게 선정에 들었다. 그러자 원주는 옥중에서 홀연히 마음이 열려 20년동안 사용한 돈과 물건을 한꺼번에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입으로 말하는 것을 서기에게 받아 적게하니 계산이 틀림없었다. 역시 선정력과 함께 관음화신의 가피력은 가이 없다.
이제 마무리 짓자. ‘관음의 불긍거고려’에 대하여 장경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비록 몸(법신)을 나타내는 것은 두루하지만, 모습만 보는 이는 치우침이 있느니라.”
뒷날 법안선사는 이에 대해 따로 자기의 견해를 피력했다. 이런걸 별어(別語)라고 한다.
“너희들이 관음을 알어(識得觀音未)?”
200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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