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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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발견하는 것이 제일 으뜸가는 공부
나는 나를 끌고 다니는 나를 믿어야 된다!

청정한 부처님 나라로 바꾸려면


우리가 이 마음의 도리를 배워서 공부하는 목적은 내가 자유로워지고 또한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인간의 본성을 회복해서 누구나 평등한 사회인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저희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는 물질에 의해서 선악이 바뀌기도 하고 오직 물질을 소유하는 것만이 전부인 양 삶의 목적이 바뀌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이렇듯 물질에 의해서 모든 것이 평가되는 전도망상의 세상을 어떻게 청정한 부처님의 나라로 바꿀 수 있을는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러분도 짐작하시리라고 믿어요. 우리가 불국토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꼭 만든다 안 만든다를 떠나서 본래 불국토는 되어 있다는 거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佛)이라는 것은 생명의 근본이요, 교(敎)라는 것은 우리 삶이라고 항상 얘기합니다. 여러 종교의 이름들을 모아 놓고 이 종교가 맞느냐 저 종교가 맞느냐, 이런 게 아니라 전체적인 진리의 흐름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진리를 볼 때에 그 생명들, 즉 말하자면 미생물의 생명도 생명이요, 모두 생명 없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이 땅에 생명들이 모두 살고 있으니 바로 불국토가 아니겠습니까.
누가 불국토를 만들고 안 만들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본래 만들어져 있는 것을, 진리가 항상 흐르는 것을 우리가 알고 가야 된다는 얘기죠. 불교는 이러니저러니 하고 너무 많은 말씀들을 해 놓으셨고, 또 지금도 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공부하기가 어렵다고도 볼 수 있죠. 처음부터, 밑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차근차근히 공부를 시켜야만 하겠지만 이 참선이라는 대도의 걸음걸이는, 걸음걸이가 있느니 없느니도 없는 것입니다. 있다 없다도 없이 그냥, 그냥 무심으로 행을 그대로 하는 거죠. 공한 까닭에 그렇습니다. 공한 까닭에 찰나찰나 나투면서 화(化)해서 돌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저렇게 하는 것이 옳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올바른 길을 찾아서 가려면 결국은 무심으로 무행을 해야만 되는 거죠. 그렇게 하고 가고 있고요, 또. 그런데 전자부터 살아온 거를 볼 때에 모두 사람들이 생각에 의해서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저렇게 살았으니까 저렇게 살아야만 한다. 이게 틀리다 이게 옳다.’ 하고 많은 분들이 다 그럭하고 가거든요. 그리고 또 학식을 배운다 배우지 않는다, 여기에 따라 무조건 바보로도 보고 똑똑한 사람으로도 보고 그러죠. 그런데 이 법은, 이게 법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이 공법에는 알고 모르고도 없고 길이 끊어지고 이어진 것도 아니고, 또는 오늘만, 이 한 생만 산다 이런 것도 없고 요다음에 또 산다 이것도 없어요.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자유권을 얻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데 자유스럽게 자기가 그대로 할 수 있는 그런 분들이라야만이 된다. 그런데 자유스럽게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즉 말하자면 서른일곱 개의 그 속에 팔정도도 들어 있고 12인연법도 들어 있고, 또는 사성제도 들어 있고 전부 거기에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우리가 해야만 된다고 합니다. 물론 해야 되겠죠. 그러나 우리가 그냥 너는 계율을 지켜야만 한다 그런다고 해서 계율을 지키려고 애를 써 보세요. 계율을 하나도 지키지 못합니다. 계율을 꼭 지켜야 된다 이러는 거보다도 슬기롭게, 계율을 지킨다는 것도 없이 슬기롭게 지혜롭게 해 나간다면, 둘로 보지 않고 잘해 나간다면 그건 계율을 지키고 안 지키고도 없이 그대로 무조건 그냥 계율을 지키는 겁니다, 그냥. 그러니 계율을 안 지킨다 지킨다도 없죠.
이렇게 들어가야 사람이 이 우주관이 탁 터지고 전부…, 이 지금 지구 주머니 하나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몸뚱이라는 주머니 안에서도 못 빠져나가서 애를 쓰지 않습니까. 몸뚱이라는 이 주머니 안에서도 못 빠져 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지구를 벗어나겠습니까. 말로만 도리천 도리천 하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그대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 여기 여러분 중에도 많이 계시다고 봅니다. 그렇게 말 한마디도 할 수 없고, 그렇게 움죽거릴 수도 없고, 그렇게 형편없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디든지 겁낼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죠. 백 번을 말을 하고 백 번을 움죽거렸다 하더라도 나는 움죽거리는 바가 없이, 그냥 함이 없이 하고 가는구나 하는 거를 알았으면 그렇게 움죽거렸어도 움죽거린 바가 없고 말한 바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항상 말하지만, 우리처럼 이렇게 공부하는 데도 드뭅니다. 이렇게 공부하는 자리가 드물다고요. 여기에서 정말 만사 가운데서 폭포수가 터지듯이, 화산이 터지듯이 그렇게 온 우주에 터져서 여러분이 모두 여러분이 아닌 여러분이 된다면, 정말 앞으로는 여기서 이렇게 공부하는 분들이 다들 조금도 어김없이 육도(六道)의 중생들을 다 건지시리라고 믿습니다. 모든 미생물이나 지옥고나 아귀, 축생이나 또는 아수라나 인간이나 하늘 인간이나 모두 합해서 다 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모습이 잘나고 못나고 이걸 떠나서, 이 모습은 한 생을 살다 보면 버리고 다시 옷을 입어야 하겠지만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차원이 높아져서 상세계의 차원이 된다면 높고 낮음도 없이 자유스럽게, 부처님 세계에서 자유스럽듯이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벗어나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


왜 마음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관념과 관습에 얽매여서 제자리만 뱅뱅 돌면서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지요. 저의 틀을 벗어버리고 시원스럽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벗어나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를 일러 주신다면 꼭 벗어나 보겠습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도 힌두교 사람들더러 이런 말씀을 하셨죠. ‘몸으로다가 수행을 하고 몸으로다 고행을 해서 성불을 하는 게 아니니라. 도를 얻는 게 아니고 깨달음을 얻는 게 아니니라. 마음으로서의 정신에 의해서 두뇌로 통신을 해서 사대로 통신을 해서 이렇게 해서 수행을 한다면 그게 바로 도심을 기르는 지름길이니라. 그런데 몸으로다가 한다면, 몸 떨어지고 입 떨어지고 말 떨어지면 뭐가 남는 게 있어서 도심을 얻겠느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몸뚱이는 한계가 있는 거지만 마음은 영원한 겁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나오기만 하면 벌써 크고 작은 거 알고, 좋고 나쁜 거 알고, 도둑질하는 게 나쁜 건 줄도 알고 안 하는 게 좋은 건 줄도 알고, 이렇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거기서 좀더 믿음을 갖는 것이 바로 자기 자성, 본래 자성, 자기 근본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근본도 여기에 있고 이 세상의 근본도 여기에 있고, 모든 근본이 여기에, 자가발전소처럼 다 그 근본이 있을 때, 거기 하나만 통하면 모든 것이 다 통하지 않겠습니까? 나 한 군데를 모르고는 여러 군데를 다 모릅니다.
인간에게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뭐가 있는 줄 아십니까? 과거에 살던 대로 입력된 컴퓨터가 하나 있습니다. 그걸 ‘숙명통’이라고 합니다. 또는 과거에 살던 그 숙명통에 대치하는 통신기가 있으니 무전통신기 같은 그걸 바로 ‘천이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남의 속을 다 아는 것을 뭐라고 했는가. 바로 탐지기라고 했습니다. 그거를 ‘타심통’이라고 했습니다. 또 ‘천안통’이라고 한 것은 천체 망원경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족통’이다 하면 우리가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온다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간다면 거기 이유가 붙습니까? 똥 누러 가는 데도 이유가 붙고 배고파서 밥 먹는 데도 이유가 붙고, 그렇진 않겠죠? 저녁에 주무시는 데도 이유가 붙습니까? 졸리니까 그냥 잘 뿐이지. 그렇게 우리 지금 살아 나가는 데에 이유가 붙지 않습니다. 이유가 하나도 붙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고, 사랑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고, 내가 가고 싶으니까 가는 거고, 오고 감이 없이 말입니다. 함이 없이 그대로 하는 겁니다. 이유가 붙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거나 사는 데 좀 순조롭지 못하면 거기 이유가 꼭 붙습니다. 그건 바로 여러분이 창살 없는 창살을 만들어 놓고 여러분이 바로 창살을 넘나들지 못하는 까닭이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들이 주인공은 다 똑같습니다. 생명의 근본, 이거는 다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불을 켜면 거기도 불이 들어오게 돼 있는 걸 가지고 가설이 돼 있다고 하는 거 아닙니까. 마음 하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자기 위치가 주어집니다.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세세생생이 주어지고, 세세생생에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헤매고 돌게 될는지 어떤지 하는 그것은 모두 자기의 소관입니다. 그러니 나 자체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남을 알며 어떻게 다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마음 하나가 그렇게 귀중한데 그것을 모르고 다른 데서 이유를 찾고 방법을 찾으니 스스로 그렇게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것은 정말 아닌데, 이것은 이렇게 되어져야만 하는데….’ 하는 것들이 보이고 들립니다. 누가 봐도 이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그것이 바꿔지지 않고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고 생각해야 하는지요. 불합리한 것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이 세상 자체가 본시 불완전한 것이기에 모른체 해야만 하는 것인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말을 들어서만 꼭 아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안 듣고도 아셔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팔만대장경에 어떻게 이 세상 이치를 다 적으리까. 여러분이 살고 계시는 이 세상을 볼 때에, 말없이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뭐냐? ‘너희는 마음에 따라서, 마음이 넓으면 넓은 대로 좁으면 좁은 대로 차원에 따라서, 악행을 하든 선행을 하든 너희 마음대로 가지고 살다가 다 놓고, 네 몸뚱이까지도 놓고 가거라.’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몽땅 다 놓고 가되, 너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인과가 되고 유전이 되느니라. 그러니까 극히 조심하고 인생에서 선덕을 잘 쌓고, 나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제일 으뜸가는 공부니라 하신 겁니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개미 하나, 풀 한 포기도 전부 여러분의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허공은 허공대로 ‘자유스럽게, 티 하나 걸리지 않고 흘러 돌아라.’ 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걸 보고 나같이 살라’ 하는 겁니다. 물은 물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생명들이 살아나가는 집으로서 만생을 이끌고 나가는 물은 더럽다 깨끗하다는 말 없이, 어떠한 차원도 없이 흘러갑니다. 그것도 바로 스승입니다. 우리들이 배워야 할 스승!
그뿐이 아니라 동쪽으로 바람이 불면 동쪽으로, 서쪽으로 바람이 불면 서쪽으로, 나무들도 바람 부는 대로 바람에 날려서 아무리 뿌리가 뽑힌다 하더라도 말없이 그대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원통하다고 원망을 하거나 바람이 왜 부느냐, 왜 뿌리가 뽑히게 하느냐, 왜 못살게 하느냐, 왜 눈이 오느냐, 왜 우박이 오느냐, 그래서 왜 나한테 타격을 주느냐, 이런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가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무슨 이유냐.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는 겁니다. ‘우리처럼 말없이 살라’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그것뿐입니까.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어 씨를 만들어 놓고는 겨울에는 그냥 앙당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뽑히고 뿌리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이 인간도 역시 뿌리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모든 게 스승 아닌 게 어디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개미들이나 짐승들을 보십시오. 날아다니는 새들도 알을 까 놓고 자기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그거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자식들을 낳고 지키고 이끌어 주고 똑바로 가게 하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까? 누가 어떻게 해칠까 봐 걱정이고 말입니다. 어떻게 살림살이가 다르겠습니까. 모습도 다르고 차원도 다르지마는 그 살림살이의 근본은 다 똑같은 겁니다. 개미들도 그렇고 말입니다. 얕잡아 볼 게 하나도 없죠. 그래서 내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만물만생이 다 이렇게 나와 같이 공생(共生) 공용(共用) 공체(共體) 공식화(共食化) 하고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다 자식이다 이런 데 연연하고 애착을 갖고 붙들고 늘어지는데,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항상 말하지마는 억겁 광년을 거쳐서 이렇게 오는 동안에 도둑질은 안 했겠습니까. 생명을 잡아먹지는 않았겠습니까. 나쁜 짓은 안 했겠습니까. 모자라지는 않았겠습니까. 병신은 안 됐겠습니까. 이렇게 가지각색으로 거치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자라는 사람을 보면 과거의 모자랄 때 내 모습으로 보고, 잘못한 사람이 있을 때는 바로 과거의 잘못한 내 모습으로 보라는 거죠. 그러면 속에서 악이 나오지 않습니다. 분기가 없어지고 유하게 부드럽게 말이 나갑니다. 그래서 둘 아니게 보라는 거죠.
부모 자식이다 할지라도 한 철 부모 자식이지 그 한 철이 지나면 그대로 뿔뿔이 몸도 다 놓고 갑니다, 제가끔. 원점으로 돌아가죠. 거기서 또 생(生)해서, 재생이 돼서 다시 나올 때에는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과(果)를 가지고서 이 세상에 또 출현을 하게 돼 있죠. 그러면 또 딴 부모의 자식이 되죠. 이건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렇다 이겁니다. 그렇다면 넓게 생각을 할 때 내 부모 아닌 게 어디 있고 내 자식 아닌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한 찰나에 인생이 가고, 한 찰나에 인생이 생하고 이렇게 돌아가는데 어떻게 요 한 철만 생각하십니까.
예를 들어서 친구들이 모여서 놀러 갔다고 합시다. 모여서 놀러 갈 때는 한 식구입니다. 그리고 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즐겁게 놀다가 저녁이 되면 다 헤어집니다. 다 뿔뿔이 자기 갈 데로 다 헤어지고 그 자리조차도 내놓습니다. 그와 같은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만 그런 게 아니라 우주의 섭류도 다 그렇단 말입니다. 저 혹성이나 핼리혜성이나 또는 어떠한 별성이든 수명이 길고 짧을 뿐이지 섭류는 한 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아래로 쭉 내려다보세요. 짐승들이나 새들이나 토끼들이나 뭐, 이러한 것들은 수명이 인간보다 짧고 그렇지만, 수명이 아주 긴 것도 있고, 수명이 아주 짧은 것도 있고 천차만별로 길고 짧고 길고 짧게 돼 있습니다. 인간은 열 달이 돼야 나오지만 6개월 만에 낳는 것도 있고 석 달 만에 낳는 것도 있고 몇 주일 만에 낳는 것도 있고, 그거는 여러 층으로 아주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이 그렇게 차원에 따라서 자기한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기술자라면 기술자끼리 모이고, 농사꾼은 농사꾼끼리 모이고, 배를 타는 사람은 배를 타는 사람들끼리 모이고, 이렇게 끼리끼리들 모여서 살듯이 말입니다.
그런 모든 현상 속에서 우리를 끌고 다니기도 하고 다 놓아 버리게도 하는 그런 장본인인 주인공을 우리가 어떻게 믿지 않으며, 어떻게 무시하겠습니까. 수억겁 전부터 생기게 해서 이렇게 인간까지 이끌어 왔는데 말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허공을 믿을 수도 없는 거고, 이름을 믿을 수도 없는 거고, 형상을 믿을 수도 없는 거고, 스님들의 고깃덩어리인 몸뚱이를 믿을 수도 없는 겁니다.
“부처님 법이 어떠한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주먹을 불끈 쥐고선 쑥 내밀었단 말입니다. 그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건 내 중심입니다, 중심! 팔뚝! 중심! 오온(五蘊)을 다 쥔 겁니다. 이 쥐었다 하는 것은, 일체 모든 삼천대천세계의 근본이,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 전부 같이 돌아간다는 겁니다. 인간의 마음만 같이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태양이니 별성이니 달이니, 어느 혹성을 막론하고 같이 돌아갑니다.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근본에 직결돼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모두가 내 살림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이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하며 서로 주고 서로 살리기 때문에, 이 세상사가 전부 가설이 돼 있는 근본은 바로 내 마음에 가설이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나 먼저 알아야 된다. 나 먼저 발견해야 된다. 나 먼저 믿어야 된다. 나는 나를 끌고 다니는 나를 믿어야 된다 이러는 겁니다. 그거를 믿지 않고 누구를 믿습니까. 아무것도 몰라도 “넌 누구를 믿느냐?” 하면 “내 주먹을 믿어!”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보십시오! 초를 켰는데 한쪽이 기울어지게 타 들어간다면 촛농이 흐르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거를 가위로다 딱 잘라서 똑바로 해 놓고, 기울어지는 것을 똑바로 세워 놓으면 한쪽이 이그러지지 않으니까 촛농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인간의 마음도 마음으로써 다스리면서 나가는 것이 바로 그런 거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소고삐를 자기가 쥐고, 남의 파 밭으로 들어가면 “파 밭으로 들어가선 안 돼. 이랴!” 하고, 딴 데로 가면 “워 워!” 해서 항상 똑바로 가게끔 고삐를 쥐어라 이 소리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안 하고 그냥 갈 수 없는 바로 자기 공부입니다.
항상 방편으로 말씀드리지만, 내 집에 전화를 먼저 놔야 남한테 전화도 받고 전화를 할 수도 있는 거지 내 집에 전화를 놓지 않고서는 전화를 받을 수도 없고 전화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과 법칙이라든가 또는 유전 법칙이라든가 이 모든 생태의 문제들을 알려면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나를 알면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에 유유하고 아주 자연스럽고, 자동적으로 정신계와 물질계를 작용하면서 베풀어 나갈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냥 말로만 알고 머리로만 굴려서, 이론으로만 쫙 알아 가지고 말을 아무리 잘해도 실천에 옮겨지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터득하면서 체험하면서 나가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앉았다고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섰다고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뭣고?’ 하기 이전에 ‘만법을 들이고 내는 그것이 하나로 돌아가는구나.’ 해서 그것을 능가할 수 있어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로 돌아가니까 ‘그놈이 뭣고.’ 하기 이전에 아, 그놈이 하는 거니까 모든 걸 거기다가 되돌려 놔라 이 소립니다. 의심할 게 뭐 있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들이고 내고, 나쁜 거든 좋은 거든 못났든 잘났든 내가 가는 길인데 의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한 말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바깥으로 생각을 지어나가지 말고, 한 발짝을 떼어 놔도 실천을 할 수 있는 내 심력을 기르는 것만이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나가는 길일 것입니다.

입력된 것이 지워지지 않아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고개를 들고 일어납니다. 그러할 때면 그것도 내 속에서 나온 습인 줄 알고 다시 놓아 버립니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격한 감정이 솟구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자신도 모르게 저 잘난 소리를 마구 늘어놓다가 한순간에 나도 모르게 아이쿠!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스님께서는 늘 되입력 하는 도리를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만 이렇게 먼저 입력된 것이 잘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습이 워낙 두터운 까닭인지요?

그건 입력이 안 됐기 때문에 되나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입니다, 자기한테 자기가 자꾸 따지는 버릇을 갖는다면 그게 습입니다. 자기한테만 따지는 게 아니라 상대방한테도 따지죠, 일일이.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몸속에 자기가 다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몸속에 전부 들어 있습니다. 들어 있는데 거기서 솔솔, 그저 이때 한 거는 이때 나오고 저때 한 거는 저때 나오고, 그냥 입력된 대로 순서대로 착착 나옵니다.
이거 거짓말 아닙니다. 착착 나오는데 그 나오는 의식들이 수가 없습니다. 그 의식들이 입력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게 자꾸자꾸 거기서 나오는 대로 나오는 그것만 알지, 그것이 잘되고 잘못되는 거를 모르는 중생들입니다, 이게 업식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대로, 그놈도 거기서 나온 거, 그놈도 거기서 나온 거, 그놈도 거기서 나온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어느 수좌가 동짓날 팥죽을 큰 솥에다 쑤는데 팥죽이 부글부글 끓어서 팥죽 방울이 수없이 나오거든요. 수없이 나오니까 퍼뜩 생각을 한 겁니다. ‘아, 우리 몸뚱이 속에 있는 팥죽 방울이 이렇게 나오는구나. 그러니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되겠구나. 방울대로 따로따로 있는 줄 알고 했는데 아이구, 한 팥죽 솥에서 나오는구나!’ 하고요. 이제 아시겠죠? 한 팥죽 솥에서 방울이 나오는 거지 따로따로이 방울이 나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자기 법이란 얘기죠. 법신! ‘요것도 법신, 요것도 법신!’ 하고는 주걱으로 때렸단 말입니다. ‘이것도 문수! 저것도 문수!’ 하고 그저 때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가 스스로 익는다면 벌써 팥죽은 다 익었으니까, 열기가 더 오르지도 않고 더 내리지도 않고 아주 평상시처럼 따뜻하게만 하고 가거든요. 그러니까 팥죽 방울이 올라오지 않죠. 모두가 하나가 돼 버렸으니까, 그냥 모두가 팥죽이 돼 버렸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듯이 모든 것을, 거기서 어떠한 뿔따구가 나오든지, 또 자기에게 누가 되게끔 생각이 나오든지, 또 집안 식구들한테 짜증이 나든지, 또 자식이 잘못해서 속이 상하든지, 모든 것을 거기다가 그냥 ‘그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그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자식의 일이든지 뭐든지 다 거기다가 맡겨 놓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나오는 걸 거기다가 맡겨 놓을 때, 동시에 ‘흥, 이렇게 나오는 거라면 돌아서 잘 나오게도 할 수 있잖아!’ 하는 생각이 아주 필연적으로 따라다니지 않습니까. ‘안되는 일도 거기서 나오는 거라면 되게 할 수 있는 일도 거기서 나올 수 있잖아!’ 하고 돌려놓는 겁니다.
속에서 이렇게 뿔따구가 날 때 아니, 불이 일어나게끔 나올 때 불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도 바로 거기 아닌가. 이럴 때는 아주 선선하게 이 마음이 곧바로 화해 가지고는 아주 좋게 나옵니다. 즐겁게 나옵니다. 웃음도 깔깔대고 웃다가 ‘아이고, 이거 안됐잖아?’ 하는 생각을 하면 웃음이 뚝 멎죠? 그렇게만 하신다면 모든 게 아주 더함도 덜함도 없는 잘 익은 팥죽이 돼서 맛있게 맛을 볼 것입니다.
200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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