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84)2부 30강 : 사생(四生), 생명의 네 가지 형태에 대하여/한국학중앙연구원
33천(天) 세계는 의식의 단계

오늘은 불교가 생명을 분류하는 독특한 방식을 읽기로 한다. 3장은 보살이 “일체중생(一切 衆生)의 류(類), 난생(卵生)과 태생(胎生)과 습생(濕生)과 화생(化生)과, 유색(有色)과 무색(無色)과, 유상(有相)과 무상(無相)과, 비유상(非有相)과 비유상(非無相)을” 저 언덕으로 건네준다고 했다.

사생-불교가 생명을 분류하는 법
이 분류에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생명을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 분류하고, 그 안에 기관과 구조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세부 분류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이건 근대과학의 시선에 의해 구축된 것으로, 여럿 가운데 하나일 뿐, 단 하나의 정확한 분류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기준과 해석이 다르면 다른 방식의 분류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는 어느 시인이 순전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물을 분류할 수도 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고래가 물고기가 아니라, 호랑이나 돼지처럼 포유류라고 해서 어린 나를 놀래 켰다. “아니, 고래가 물고기가 아니라니요. 물에서 살고 있고, 며칠 전에도 그물에 한 마리 걸려 올라와 어판장에서 팔려나가는걸 보았는데요. 그리고 얼마나 맛있는데….” 선생님은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고, 내가 다시 우기자 마침내는 화를 내기까지 했다. 나는 지금도 내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둘 다 옳다, 그리고 둘 다 틀렸다. 그런데 불교는 이 진실을 알고 있다. 진술과 판단의 일변적 진실과 그 한계를…. 그것을 본격 논증한 것이 중관(中觀)의 변증법이다.
각설, 위에서 적은 <금강경>의 생명 분류 방식은 인도 전래의 것을 불교가 차용한 것이다. 콘즈는 <금강경 영역>에서 이 독특한 분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해 주고 있다. 기준은 세 가지이다.
a. 수정(受精) 양상에 따라 구분되는 4가지 유기체: 1) 난생(卵生): 알에서 까는 것들. 2) 태생(胎生): 자궁에서 나는 것들. 3) 습생(濕生): 따뜻한 물기에서 생겨나는 것들. 가령 벌레나 곤충 나방 등. 4) 화생(化生): 신비하게 태어나는 것들. 수태나 배양 없이, 처음부터 사지를 멀쩡히 갖추고 갑자기 나타나는 것들. 신이하게 혹은 유령처럼 태어나는 신들이나 아귀들, 죽음과 삶 사이의 중간계의 인물들, 그리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이들. 이 부류들의 수가 제일 많다.
b. 물질적이냐 비물질적이냐에 따른 분류: 1) 유색(有色): 형체를 가진, 물질적인 것들. 2)를 제외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2) 무색(無色):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비물질적인 것들. 네 가지 형태 없는 성정(禪定), 즉 사선정(四禪定)에 어울리는, 가장 고귀한 신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c. 지각할 수 있느냐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분류: 1) 유상(有想): 지각이 있는 것.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는 모든 유기체. 2) 무상(無想): 지각이 없는 것. 네 번째 선정에 해당하는 천계(天界)에 살고 있는 신들이나 천사(?)들이 여기 속한다. 3)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네 번째 형태 없는 선정에나 어울리는 가장 높은 신들.
분류 a는 상식적이다. 그것들이 b의 첫 항에 포섭된다. 문제는 b의 두 번째부터이다. 인도는 정신의 나라답게, 그리고 불교는 정신의 사유답게 무형의 존재들을 살피고, 그것을 깊이에 따라 분류하는 한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사람은 이 가운데, 태생(胎生)이면서, 유색(有色)이고, 유상(有想)이겠다. 물론, 정신적 수련에 따라 유색(有色)은 무색(無色)으로, 유상(有想)은 무상(無想)이나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보통 사람은 아무래도 잘 믿지 않으려 하겠지만.
불교는 정신의 깊이에 따라 사물이 서로 다르게 보이며, 또 그에 따라 그가 경험하고 살고 있는 세계가 달라진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다. 그래서 33천(天)의 세계는 곧 선정의 단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대한 메시지가 도출된다. 다른 세상을 살려면 자신의 의식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것, 즉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멸도, 불을 꺼라
자신을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의식의 수준을 고양시킬 것인가. 어렵지 않다. 쉽고 간단하다. “불을 꺼나가면 된다!”
어느 날 우루벨라의 해질 무렵, 붓다는 불을 섬기던 가섭 형제들을 데리고 산에 올랐다. 저녁노을로 불타는 하늘을 보고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사람도 저와 같이 불타고 있다. 사람의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 1) 눈이 타고 있고, 눈의 인식대상인 물질이 타고 있다. 귀가 타고 귀의 인식대상인 소리가 타고 있다. 코가 타고 코의 인식 대상인 냄새가 타고 있다. 혀가 타고 혀의 인식대상인 맛이 타고 있다. 몸이 타고 몸의 인식대상인 감촉이 타고 있다. 의식이 타고 의식의 인식 대상인 생각이 타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타고 있는 것인가. 2) 그것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때문에 불타는 것이다. 그로 인해 3)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불타는 것이다. 또한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괴로움(愁悲惱苦)이 불타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이 모든 불타는 것과 그 원인에 대해 싫어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일체에 대해 싫어하는 생각을 가질 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불꽃이 꺼지고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된다.”
<법화경>은 삼계화택(三界火宅)을 말한다. 집이 온통 불길 속에 싸여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속에서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않는다. 인간의 무지로 인해 ‘욕망’이 불타고 있고,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불타고 있으며, 그리하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불타고 있고, 그 결과 ‘슬픔과 괴로움’이 또한 불타고 있다.
내가 변해야한다
이런 갈등과 대립, 고통과 슬픔을 원초적으로 해결하는 길이 없을까. 역사적으로 수많은 실험이 있었다. 전쟁과 정변, 혁명과 개혁들. 지금도 그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개혁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대개 특정한 사람이나 부류에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눈에 띤다. 나는 그 속에서 원망과 시기, 질투와 지배욕을 본다. 아닌가. 그렇게 불건전한 편견과 정념들에 의해 추동되는 어떤 행동도 부작용 없는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실제 문제의 근본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내가 비난해 마지않는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를 손가락질하고 있다. 내 손가락질은 옳고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은 틀릴 것인가. 나는 분열과 갈등으로 추악하고 잔인해진 이 기괴한 사회의 일원으로 그것을 만드는데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을 느낄 때, 무엇인가가 바뀔 것이다.
불교는 바깥보다 우선 안을 다스리라고 권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아무 것도 보태주지 않고, 다만 빚쟁이처럼 덜어간다. 불교에 챙겨갈 것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은 일찌감치 돌아가는 것이 좋다. 줄 것이 없었기에 불교는 나중에 “붓다는 왜 왔는지 모르겠다”거나 “붓다는 40년간을 장광설(長廣舌)을 늘이고서도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불교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다. 오히려 빼앗으려 한다. 우리 내부에 있는 오래된 독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이들을 제거할 때, 비로소 너도 자유로워지고 세상은 평온해진다. 붓다가 말했다. “열반은 탐욕과 증오, 기만의 끝이다.” (상유타 니카야)
2006-02-22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