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 ‘자비 샤워’ 틀어주는 사람들
대승은 보살을 새로운 인간상으로 내세웠다. 그와 더불어 성문과 연각의 이승(二乘)은 소승의 길로 낮춰 평가되었다. <반야경> 가운데 하나는 이 둘의 차이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성문의 길과 연각(벽지불)의 수레에 속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수련하는가.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오직 나의 자아만을 나는 길들일 것이다. 오직 나의 자아만을 나는 평화롭게 할 것이다. 오직 나의 자아만을 나는 니르바나로 이끌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유익한 기반(善根)을 닦는다. 보살은 그러나, 그렇게 수련해서는 안된다. 보살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지니고 유익한 기반을 닦아 나가야한다. 나는 나의 자아를 진여(眞如)에 머물게 할 것이다. 아울러, 다른 모든 생명을 또한 진여에 머물게 하여, 헤일 수 없이 많은 존재를 니르바나로 이끌 것이다.” (콘즈, ‘불교, 그 핵심과 발전’)
“성불하십시오” 라는 인사말
소승은 해탈로 이르는 ‘지혜’를 최고의 덕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살은 그것과 더불어, 아니 그것보다 더욱 더 ‘자비’가 더 큰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홀로 깨달아 해탈하겠다는 것은 지독히 이기적인 것이고, 그것은 불교가 지향한 목표인 무아에 어쩌면 가장 크게 반하는 태도일 수도 있다. 결국, 진정한 무아(無我)는 타자를 향해 나의 모든 것을 비우고 바치는 것이라야 한다! 이것이 역설이다.
최고의 깨달음,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역설적 마음가짐을 가질 때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붓다는 수보리에게, “보살은 일체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영웅적 발원을 발보리심(發菩提心), 혹은 발심(發心)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종교적 회심에 해당한다.
세상에! 이를 자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진정 이 보살의 서원을 자기 것으로 품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루 중 얼마나 그렇게 살고 있는가. 나는 자신이 없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의 무게를 버거워한다. 이 세상 목숨 하나 붙이고 사는 것이 팍팍하기 이를데 없다. 오죽하면 고해(苦海)라 하겠는가. 이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기도 어려운데, 내 인생은 접고, 다른 생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니….
나는 불교가 이 이름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불교는 지금 너무 인플레되어 있다. 사람을 만나면, “성불하라”고 말하고, 아무에게나 “보살님”이라고 부른다. 이름이 실상에 대한 착각과 오해를 증폭시킨다는 것은 불교의 근본 인식이다. 재사(在寺)든, 재가(在家)든 부처님을 등에 업고, 먹물의 권위에 싸여, 위선의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이, 나는 싫고 역겹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데, 내가 바로 그런 류의 사람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다.
의타기의 법계총상
역시 아직 내 마음의 때와 장애가 충분히 벗겨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을 너무 의식해도 강박이 된다. 나는 보살의 길에 아득히 까마득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또 한편 내 불성의 힘과 빛을 전적으로 믿는다. 이 두 길은 서로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내가 이즈음 분명히 깨닫는 것이 있는데, 길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거나, 아주 많다.
하나만을 고집하면 마구니 혹은 이단의 길로 떨어진다. 불교가 그래서 가장 적게 이단이고 위험도 가장 적다. 팔만 사천의 길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고 엇갈리지만, 그러나 그게 도구인 한, 굳이 논리적이거나 체계적일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못을 박는 망치와 밥을 담는 그릇이 서로 연관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두번째 길에서 나는 불성을 믿고 마음을 편안히 여유롭게 가지려고 노력한다.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할 때, 혹시 내가 나의 습관과 편견에 젖어, 혹은 내 이해에 너무 절박해서 사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는데 실패하고 있는지를 물어본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게 하는 섭섭함이나, 작은 부당한 대우 정도는 스쳐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명백한 악의로 나를 해친다든지, 공공의 이익을 훼손하는 사람은 응분의 벌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평화이다. 평화는 모든 것을 용서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신세를 생각한다. 나는 물과 불, 공기와 자연에게, 그리고 농부와 상인, 가족과 이웃의 신세를 지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그런 만큼 얼마나 빚을 갚고, 나머지를 베풀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만일, 여기서 저울이 보답보다 신세 쪽으로 기운다면 그건 죄를 짓는 일이다.
그동안 너무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 내 주머니의 것을 꺼내줄 줄은 몰랐다. 그렇다. 나는 나가 아니다. 누구도 홀로 있지 않고, 서로 중중의 인연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밖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들에 의존해서야 비로소 존재한다. 세계는 이런 의타기(依他起)의 중중 무진한 법계(法界)의 총상(總相)이다.
보살의 발심과 여정
보살은 이런 류의 발심을, 소박한 생활 공간에서의 수준이 아니라, 아주 크게, 지구적 우주적 지평 위에 세운 사람이다.
콘즈는 스즈키 다이세쯔의 <인도 대승 불교 논집(On Indian Mahayana Buddhism)>을 위해 쓴 긴 서론에서 반야부 경전에서 읽은 보살의 삶을 몇 가지 단계로 요약해 주었다.
1) 보살의 삶은 보리심, 즉 붓다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갈망함으로써 시작한다.
2) 그 이후, 몇 겁의 세월을 그 목표를 위한 수련, 즉 여섯 바라밀을 닦아 나간다. 6바라밀이란, 베품(布施), 계율(持戒), 인내(忍辱), 열정(精進), 집중(禪定), 지혜(般若)이다.
3)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보살은 ‘지혜’와 ‘자비’라는 두 강력한 동기에 의해 추동된다. 지혜는 모든 존재의 공(空)함을 깨닫는 것이고, 자비는 모든 중생에게 서비스를 하겠다는 마음이다.
4) 지혜의 극치에서 모든 존재의 공함을 깨닫고 나면, 이제 순수하게 자비만이 보살을 밀고 나가는 힘이 된다. 보살은 몇 겁을 일체 중생에게 그들의 필요에 따라 이익을 샤워시켜 준다. 물론 그는 알고 있다. 일체가 공(空)함으로, 중생도 환상이고, 그들의 곤경도 환상이며, 또한 그의 도움도 환상이라는 것을.
5) 보살의 정신적 진전은 열 개의 단계로 나눈다. 화엄은 이를 십지(十地)로 정리했다. 처음 여섯 단계는 자신의 완성에, 다음 일곱째부터는 천상적 보살의 무공용행(無功用行), 즉 ‘인위적 노력 필요없는 실천의 삶’이 된다. 마지막 열 번째 단계에서 그는 여래가 된다.
6) 붓다를 성취할 때, 보살은 붓다의 삼신(三身), 즉 ‘세 개의 몸’을 실현하게 된다. 법신(法身)과 보신(報身), 그리고 화신(化身)을….
보살은 이런 점에서 마하살, 즉 ‘위대한 영웅들’이다. 두 개념을 붙여 보살마하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사의경(不思議經Acintyasutra)>을 보면 그의 열망은 영웅적 스케일을 갖고 있다.
“그는 일체의 중생을 교화시키기를 갈망하며, 일체의 붓다를 섬기고 기리기를 갈망하며, 부처님 세계(佛界)의 모든 영역을 정화시키기를 갈망하며, 마음 속에 붓다의 모든 가르침 담기를 갈망하며, 모든 불계의 세세한 지식 갖기를 갈망하며, 붓다를 둘러싼 모든 집회를 파악하기를 갈망하며, 모든 생명의 생각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의 때를 벗겨주고, 그들의 가능성을 헤아리기를 갈망한다.” (콘즈, ‘금강경 영역(Diamond Su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