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법 말을 떠나 있고 평등 본뜻 알지 못하면 죽은 문구
말 없음으로써 말이 없는 곳에 이르고자 함이 선(禪)이요, 말로써 말이 없는 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교(敎)라고 하였다. ‘말 없음’이란 수단과 방편인 언어 문자를 떠나 자신이 직접 체험을 하라는 뜻이다. ‘말 없음’이란 ‘깨달음’을 뜻한다.
알음알이를 떠나서 직접 체험으로 자신의 참마음을 아는 것, 곧 깨달음을 얻으라고 하는 것이 선이다. 마음은 선(禪)의 근본 뜻이요 말은 마음을 따라가는 교(敎)의 방편이다. 비유하면 마음은 허공에 떠 있는 달이요 말은 하늘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선가귀감> 6장에서는 말한다.
是故 若人失之於口則 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則 世間鹿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이 때문에 말에 속아 본뜻을 잃는다면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자 빙긋 웃는 가섭의 미소’조차 다 교(敎)의 자취가 되고 만다. 그러나 본뜻을 알면 세간의 거친 말이나 자잘한 말들까지도 모두 언어 문자 밖에서 법을 전하는 선(禪)의 근본 뜻이 된다.
말에 속아 본뜻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근본 마음자리에서 모든 법은 본디 말을 떠나 있고 이름을 붙일 수 없으며 생각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끝내는 평등하여 달라질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뜻을 알지 못하고 입으로만 말을 한다거나 이름을 갖다 붙인다거나 시비 분별하는 생각으로 헤아리고 추측한다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본뜻을 알지 못한다면 선(禪)에서 전법(傳法)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삼는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어 올리자 빙긋 웃는 가섭의 미소’조차 다 교(敎)의 자취가 되어 죽은 문구가 된다.
반대로 중생의 시비 분별을 다 떨쳐서 본뜻만 알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늘 바른 법을 말하고, 땔나무 하는 아이나 소치는 늙은이가 다 깊은 이치를 논하며, 소 울음이나 닭 우는 소리까지도 빠짐없이 부처님의 법을 전한다는 소리임을 알게 된다.
옛날 마조 스님(709~788)의 법을 이은 보적 선사가 푸줏간 앞을 지나갈 때였다. 고기를 사려는 사람이 “맛있는 살점을 잘라 주시오”라고 하니, 푸줏간 주인이 “저어 손님, 이 고기 어느 부분인들 맛있지 않은 살점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 소리에 문득 크게 깨친 바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뜻으로 보면 세간의 거친 말 자잘한 말들까지도 모두 언어 문자 밖에서 법을 전하는 선(禪)의 근본 뜻이 될 수 있다.
이런 내용을 정리하여 <선원제전집도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一切諸法 唯依妄念而有差別 若離妄念則 無一切境界之相 是故諸法 從本已來 離言說相 離名字相 離心緣相 畢竟平等 無有變異 不可破壞 是一心 故名眞如
모든 법은 오로지 헛된 생각으로 차별이 있다. 헛된 생각을 떠나면 온갖 경계로서 나타나는 모습은 없다. 이 때문에 온갖 법은 본디 말을 떠나 있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으며 생각을 벗어나 있으므로 끝내는 평등하여 달라질 것이 없어 파괴할 수 없다. 오직 일심(一心)일 따름이니 그러므로 진여(眞如)라고 한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법에는 이름이 없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법에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 그려내지를 못한다. 말에서 머뭇거리면 본디 마음을 잃고, 본디 마음을 잃으면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자 빙긋 웃는 가섭의 미소’조차 다 말장난에 떨어져 끝내는 죽은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음의 본뜻을 안 사람은 저자거리의 이야기조차 훌륭한 법담이 될 뿐만 아니라,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제비 소리까지도 실상(實相)의 이치에 통달한 소리로 듣는다. 이 때문에 늘 참선만 하고 있던 보적 선사는 장례식장에서 슬피 우는 상주의 통곡소리에 문득 깨치고 나서는 덩실덩실 춤을 추고 기뻐했다고 한다.
임제 스님(?~867)의 법을 이은 보수 스님이 공부하러 다닐 때였다. 하루는 방장 큰스님께서 ‘부모님이 너를 낳기 전 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스님이 길을 가다가 저자거리에서 주먹다짐하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스님은 싸움 끝에 ‘참으로 면목이 없네’라고 하는 그들의 말을 듣고 거기서 크게 깨쳤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선(禪)이 근본이고 교(敎)는 방편이라는 이치를 밝혀 주는 것들이다.”
서산 스님은 다시 게송으로 말한다.
明珠在掌 弄去弄來
밝은 구슬 내 손안에 놓여 있으니
이리 궁글 저리 궁글 가지고 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