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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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병속의 새 /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모든 걸 다 취하려 하다간 모두 잃기 마련
일체 선입견 벗어나야 제대로 볼 수 있는 법

김성동의 소설〈만다라>는 베스트셀러일뿐 아니라 영화까지 만들어져 대박을 터뜨렸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에게 그 때(1970년대)까지 생소한 개념이던 화두를 ‘병속의 새’라는 표현을 빌려 대중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공안 하나로 소설 한 편을 만들었으니 가장 긴 착어(着語:해설)라고 하겠다. 그것도 모자라 시청각교재(영화)까지 남의 손을 빌려 만들도록 했으니 공안집으로서 안이비설신의를 모두 만족시킨 불후의 해설서가 된 셈이다.

이 공안은 남전선사와 육긍대부의 선문답에서 기원한다. 육긍대부는 남전산이 소재한 지양(池陽)땅의 행정책임자인 태수 신분으로 자주 남전선사를 찾아뵈었다. 어느 날 ‘병속의 새’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안목이 열리게 된다. 원문은 새가 아니라 거위이다.
“옛날에 이 병속에다가 거위를 한 마리 길렀는데, 점점 자라 나오지 못하게 됐다. 병을 깨뜨릴 수도 없고 거위를 죽일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꺼낼 수 있겠는가?”
유리병 속에 든 거위를 어떻게 해야 거위와 병 모두 상처를 입히지 않고 꺼낼 수가 있을까? 진퇴양난이라고 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며,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 경우라 하겠다. 살아가면서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정치현장에서 모든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들이 저마다 각자의 목소리를 돋우면서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집단적인 의사표시를 통해 행정관청을 압박해올 때마다 태수는 이 화두를 떠올렸을 것 같다. 저절로 참구가 되었을 것이다. 관리는 관리에게 맞는 공안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 육긍대부였기에 어느 날 남전선사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저희 집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어떤 때는 앉고 어떤 때는 눕습니다. 불상을 새기고자 하는데 되겠습니까?”
와불과 입불 모두 조성이 가능한 큰 바위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하시죠.”
불상을 새겨도 좋다는 말 같은데 긴가 민가 하는 표정이 아무래도 ‘접대성 발언’으로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반대로 물었다.
“불상을 새기면 안 되겠지요?”
“안 되겠습니다.”
“???”
아니 불상을 새겨도 좋고 새기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식이라면 일도양단해야 하거늘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다. 또 딜레마다.
염일방일(拈一放一)이라고 했든가? 하지만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놓아야 하는게 세상이치다.
예전에 원숭이를 잡을 때 이렇게 했다고 한다. 목이 잘록한 유리 병 속에 울긋불긋한 사탕을 넣고서 그들이 다니는 숲 길목에 두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새끼 원숭이가 쪼르르 달려와 병속에 손을 넣고서 사탕을 쥐게 된다. 손을 폈을 때와는 달리 주먹을 쥔 손은 병의 좁은 목을 빠져나올 수 없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드디어 멀리서 덫을 놓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목숨이냐? 사탕이냐? 목숨을 구하려면 사탕을 놓아야 하고 사탕을 얻으려면 목숨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어린 원숭이로서는 그 판단이 쉽지 않다. 사탕을 버리기가 아깝기 때문이다. 모든 걸 다 취하려고 하다가는 모든 걸 잃기 마련이다. 출세간적 화두해결은 그보다도 더하다. 거위도 병도 사탕도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고서 일체의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모든 걸 제대로 볼 수 있는 정안(正眼)이 열리는 법이다. 그래야 진짜 살길이 생긴다.
200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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