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하나 일어날 때마다 모두 거기 놔라!
일체 만물이 다 끼리끼리 모이듯 우린 이렇게 마음공부 하는 분끼리 한자리를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억겁을 거쳐 진화되면서 인간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육체 속에 모든 생명과 의식, 모습들이 아주 다양하게 있습니다. 우리 자체가 미생물에서부터 수없는 과정을 거쳐 왔다는 것을 인정을 못하겠거든 바로 우리 육신 속에 있는 그 모습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잉태됐을 때에 열 달 동안 그 모습들을 가지고 형태를 바꿔 가면서 조성된다는 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잉태될 때에 처음부터 사람 모습으로 잉태가 되는 게 아닙니다. 개구리 알처럼 흐늘흐늘하게 시작이 돼서, 올챙이처럼 돼 가지고 수없이 그 모습을 바꿔 가면서, 열 달을 채워서 인간 모습으로 탄생이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 모자라는 거, 잘못되는 거, 또는 잘못된 모습들, 하(下)의 생명들의 하나하나의 모습들을 볼 때에 둘로 보지 마시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도 수없는 나날을 지나오면서 그런 모습을 거쳐서 진화됐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모자라는 사람을 보더라도 옛날의 내 모습, 내 모자람으로 보고, 어떠한 모습을 봤을 때도 바로 과거의 내 모습으로 봐라 이 소립니다.
왜 내가 이런 소리를 되풀이하느냐 하면, 그렇게 거쳐 온 그 중생들이 나 아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부 나입니다. 수십억의 의식들이 전부 내 의식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을 지은 그 의식들이 전부 내 의식입니다. 그것이 내 마음으로부터 쫓아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하나가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작용을 하는 게 아닙니다. 살아오면서 업식을 지닌 인연에 따라서 모두 작용이 되고 움죽거리게 됩니다. 그러니만큼 자기가 자발적으로 생각을 해서 움죽거리는 게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나’가 있습니다. 사량적인 육안으로 보고 듣고 행하고 하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행하고 마음으로 말하는 ‘진짜 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 몸속에 들어 있는 만중생들이 모두 제가끔들 한 가지씩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는 뿔의 기능, 말은 발차기 기능을 소유하듯이 밖에 있는 일체 만물들, 인간 이하의 모든 동물들도 역시 한 가지씩은 기능을 다 가졌다고 봅니다. 촉각으로 움죽거리는 것도 있고, 또는 감각으로 움죽거리는 것도 있고, 또는 청각으로 움죽거리는 것도 있고, 후각으로 움죽거리는 것도 있고 그렇게 천차만별로 움죽거리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의식들도 모두 한 가지 기능들은 다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안팎에서 그러한 기능을 가지고 움죽거리고 있는 그것을 보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이냐 이겁니다.
그것들이 때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닥칠 때마다 우리가 타파할 수 있고 또 만법으로써 움죽거릴 수 있는 그 심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한 가지씩 기능을 가지고 사는 그 마음들을 우리는 다 포착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만 가지 법을 하나의 마음으로써 다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거든지 다 내 마음으로 그쪽의 마음과 둘이 아니게끔 하면 그쪽에서 그대로 응하고 돌아갑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 이하의 모든 것들도 다 그렇습니다.
그런 반면에 내 몸속에 있는 의식들도 다 내 마음에 따라 움직입니다. 자기네들 마음대로 움죽거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이죠. 도둑질을 하러가자 하면 도둑질을 하러가게 하고…. 예를 들어서 내가 전력 얘기를 항상 하는데, 나쁜 짓을 해라, 좋은 짓을 해라 하고 전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죠? 전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쓰는 데 따라서 나쁜 일도 하고 좋은 일도 합니다. 그와 같이 인간의 모든 의식도 내 마음에 따라서 응해 줍니다. 그래서 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악업으로도 쓸 수 있지만 선업으로도 쓰고, 악업과 선업이 한데 합쳐서, 한마음이 돼서 바로 응신(應身)으로서 대응할 수도 있는 겁니다, 응신! 즉 말하자면 그렇게 응신으로 화(化)해야 응신으로서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깨달아서 자유스럽게 살자는 뜻이지 무슨 말만 배우러 다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내 몸으로나 가정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또는 세계적으로나, 나아가서는 우주적으로나 모든 걸 대응하고 작용하고 중용을 할 줄 알고, 어떤 거든지 걸림 없이 자재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대권을 갖기 위해서 우린 이렇게 공부하는 겁니다. 사람이 살다가 죽는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지속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소리도 가끔 합니다, 제일 빠른 게 그거니까. 만약에, 어저께 남을 속이고 따귀를 때렸다면 오늘 반드시 그 따귀가 결국은 돌아옵니다.
그와 같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만 과거가 아니라 바로 한 시간 전도 과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조사들이 깨우친 것은 바로 과거생·현재생·미래생을 다 한꺼번에, 그것이 과거생만 있어도 아니 되고, 현재생만 있어도 아니 되고, 미래생만 있어도 아니 되는 거죠. 즉 말하자면 내 영원한 생명이 없어도 아니 되고, 마음내는 게 없어도 목석일 테니까 아무것도 아니고, 육신이 없어도 보이지 않으니까 무효입니다. 그와 같이 과거생과 현재생, 미래생 바로 삼세가 한데 합쳐서 돌아가면서, 삼생(三生)의 의지를 가지고서 지금 살림살이를 하고 가는 겁니다.
여러분은 한 분 한 분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게 소라고 한다면, 소를 안 탄 분이 하나도 없죠. 소를 안 탄 분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마음으로 전달을 하고, 또는 말로 전달을 하고, 행으로 전달을 하고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피리란 말이에요, 피리! 우리가 한생각을 깨우쳤다 하면 ‘여여하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을 ‘그대로 소를 타고 여여하게 피리를 불면서 돌아간다’ 이렇게 말을 한다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생각을 냈다 하면 법신입니다. 몸이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이고요. 이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러분이 그대로 중생이고 그대로 부처고, 그 한생각 돌리면 그대로 법신이고, 그대로 화신이고 보현신입니다. 마음의 도리, 이 마음의 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 엊그저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임신을 해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분들은 잘들 들으시라고요. 또 노인네는 죽어서 요다음에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올 테니까 들어야 하고, 아버지들은 아버지로만 그냥 있지 않기 때문에 또 들어야 하고 그렇습니다. 또 젊은 청년들은 앞으로 창창하게 부부생활을 하면서 살아나가야 할 테니까 들어야 하고. 그러기에 얘기했습니다. 이 공부라는 것은 오직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 하나를 믿고 거기에 모든 것을 구상해서 맡겨 놓는다면 그대로 체질도 바꿀 수 있다고요. 그러는 까닭에 아기를 잉태할 때 어떠한 형상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원한다면 모든 절차를 밟아서 거기에 놓고 좀 밝게 태어나게 하면 어떻겠느냐 하는 거죠. 부부가 어디다 세워 놔도 괜찮을 정도라면 그대로 두고요. 부부지간에 ‘나는 간판이 좀 안됐어!’ 이랬을 때는 2세를 좀 인물을 좋게 해서 태어나게 하면 어떠냐구요. 이게 마음의 발전입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마음의 발전을 이루는 거지, 생활이 없이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없는 영혼이 발전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나와서 이렇게 부딪치는 생활 속에서 마음이 발전해야 바로 진화가 되고, 진화의 능력으로써 바로 창조력을 이끌어서 창조를 하게 됨으로써 모든 생활 자체가 그냥 과학적이게 되는 거죠. 과학도 물질과학이 아니라 심성과학으로써 하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습과 마음씨를 생각을 해서, 잉태를 해서 한 아이를 갖다가 착 내놨을 때, 어디다 세워 놔도 모순이 되지 않을 때에 이것이 과학입니다. 그러고도 일반 과학으로서는 할 수 없는 심성과학입니다. 어떻습니까? 거짓말 같습니까? 여러분이 보지 않고, 먹어 보지 않고, 잘라 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남의 말만 듣고 이렇게 해서는 실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해 봐야 알죠.
오늘도 스님네들이 잣을 소나무 이파리에다 잘 꿰어서 가져왔는데, 이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전자에 산에서 살 때, 잣을 따서 깔 때는 손에 그 찐득찐득한 걸 다 묻히면서, 요만큼만 까도 그것이 얼마나 귀하고, 그 어렵게 한 거라 참 귀해서 그것도 큰스님네들이나 드셨지, 그 밑의 사람들은 맛도 못 봤단 말입니다. 그러고도 그 한 알갱이를 입에 넣으려면 양심에 가책이 돼서 못 넣었다 이 소립니다. 그거 하나를 볼 때만 해도 그런데…, 요새 살림살이하는 분들은 얼마나 흔하게 씁니까? 잣뿐이 아닙니다. 버섯이나 나물이나 이런 것도 말입니다, 하나하나 따서 조금씩 해서 양념으로 쓰던 그때, 입에나 넣었습니까, 어디? 이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자기가 그 모든 것을 해 보지 않고 자기가 겪어 보지 않고는 아까운 줄 모른다 이 소립니다.
돈도 몸소 어렵게 번 돈은 아주 마디게, 쓸 때만 딱딱 쓸 수 있는 거지만, 그냥 흔전만전히 들어오는 돈이라면 흔전만전히 또 나가게 됩니다. 돈은 어떻게 벌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돈 쓰기가 더 어렵다고 보죠. 저는 어려서부터 그 경험으로 인해서 인생살이를, 삼세를 꿰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체험을 했지만, 아직도 인간이 다 됐느냐 한다면, 허! ‘다 되지 못했다’ 할 수도 없고, ‘다 됐다’ 할 수도 없는 경우입니다. 자기 마음이 바뀌면서, 계발이 되면서 자꾸 달라지는 원인을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전자에 모자랐던 것을 채울 수도 있고, 전자엔 잘했는데 타락이 돼서 그 능력이 그냥 줄어들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정됨이 하나도 없는 거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자유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선업을 쌓는 것도 자유고 악업을 쌓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런데 왜 될 수 있으면 선업을 쌓고 악업을 쌓지 말라고 하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악업을 쌓으면 대대로 악업이 내 앞에 올 것이고, 선업을 쌓으면 대대로 선업이 올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그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한번 잘 둘러보십시오. 사람이든 짐승이든, 또는 어떤 생명이든 어떤 물질이든 다 끼리끼리 놓여 있습니다. 끼리끼리 삽니다. 그러니까 악업을 지은 사람은 악연을 가진 사람들하고 모이게 돼 있지요. 그건 자동적입니다. 누가 가라 오라 해서 그렇게 모이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동적’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항상 얘기하죠. 나물은 나물대로 놓여져 있고, 사과는 사과대로 놓여져 있고, 그것도 크냐 작으냐에 따라서 또 나누어 놓기도 하고, 깡통은 깡통대로 놓여져 있고 무쇠는 무쇠대로 놓여져 있고…. 이거를 가만히, 병풍 둘러치듯 한 이 세상만사를 한번 둘러보면, 인간의 차원도 어떠한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자유스럽게 살라고 내놨는데도 불구하고 자유스럽게 하되 왜 선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악으로 끌고 가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내 몸속에 들어 있는 의식들이 자발적으로 마음을 내서 잘 이끌어 주는 게 아니라는 거, 내가 마음을 내야 알아듣고 즉, 마음으로부터 두뇌를 통해서 사대(四大)로 통신이 돼서 움죽거려 준다는 거, 그걸 꼭 아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하나 업식이 바꿔집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속의 이 모든 의식들이 바로 화해서 바꿔집니다. 화한다는 건 바꿔짐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살의 마음으로 바꿔진다는 얘깁니다. 하나하나 일어날 때마다 모두 거기 놔라 하는 것은 내 착한 마음으로 바꿔지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게 과거에 업을 지은 대로 자꾸 나오니까, 나오는 대로 거기다가 맡겨 놓고 ‘과거의 모든 거를 네가 한 거니까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너만이 이끌어 가지고 갈 수가 있어. 네 몸뚱이, 네가 건강하게 이끌어 갈 수 있어.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가 있어.’라고 하는 겁니다. 모두 ‘할 수 있어’지 ‘해 주십사’가 아닙니다. 그럭한다면 또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해 주십시오.’ 이렇게 비는 거나 뭐가 다릅니까? 생각 하나하나가, 한 생각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죽고 사는 것도 없어집니다. 육신이야 죽고 산다 하지만 마음이야 어찌 온 것이 있고 갈 것이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마음으로부터 이 세상이 움죽거려지고, 마음으로부터 이 지구가 돌아가고, 마음으로부터 일체 만법이 다 형성되고 돌아갑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하나가 깨우쳐서 한마음이라면 일체제불 마음도 거기에 한꺼번에 다 속해 있고, 일체 중생, 일체 우주 만물만생이 다 한꺼번에 그 자리에서 돌아가기 때문에 다 움죽거리게 할 수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다 한꺼번에 움죽거리면서 한마음으로 한자리를 하기 때문에, 촉각으로 하는 기능이 있거나 또는 후각으로 하는 기능이 있거나 하는 모든 거를 한마음으로 모두 굴릴 수 있다, 자재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계의 모든 문제들도, 그 영령들도 그렇게 한마음으로 한다면 모든 게 다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두 마음으로 하면 싸움이 있겠지만 한 마음으로 바로 둘이 아니게 놓는다면, 내가 된다면, 둘이 돼야 액이 오고 혼란이 오고 그럴 텐데, 하나가 돼 버리니까 혼란이 없죠, 마음이 편안하고. 그리고 태어나기 전의 업식으로 인해서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아가는 도중에 그냥 그 유전으로 인해 영계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한 사람이 사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살기 때문에 그런 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살거든요. 잘하든 못하든 한 사람의 마음으로 살아야 정상인데, 한 몸에 두 사람의 마음이 사니까, 세 사람 마음도 살고, 네 사람 마음도 살고 이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분쟁이라는 건 말도 못합니다. 금방 딴소리 하고, 금방 딴소리 하고 이러니 그게 이름해서 미쳤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 우리가 이 공부를 철두철미하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인간으로서는 이 공부를 꼭 하고 넘어가야 된다는 결론이죠. 우리가 정신계의 모든 것을 안다면 100%입니다. 우리는 그 정신계의 50%, 반을 모르기 때문에, 반에서 허덕거리고 사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돌아가는 원이 하나 그려져 있다면 그냥 걸림 없이 원을 돌아야 할 텐데, 반밖에 돌 줄 모르니까 반이 막힌 거죠. 마음이 지혜롭지 못해서 그냥 마음의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허덕거리니까, 그 반에서만 뱅글뱅글 도니까 걸릴 수밖에 없죠. 삼세를 그냥 돌아야 할 텐데….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데서 넘어오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죠. 애고가 와도 어쩔 수가 없고, 병고가 와도 어쩔 수가 없는 거죠.
핑계 없는 무덤이 있나요? 어떤 나쁜 병이라고 병원에서 말한다 해도, 어떤 핑계든지 그런 병이 들어서 오는 원인은 유전성이 될 수도 있고 영계성이 될 수도 있고, 업보성이 될 수도 있고 세균성이 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다가오는 것을 해결치 못한다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자유스럽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50%를 한데 합쳐서 우리가 100% 응용을 한다면 멋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 이 소리죠. 가만히 보면 “참 애로가 많은데 주인공을 찾아도 아니 됩니다. 내가 힘이 없는지….” 이러거든요. 못났든 잘났든, 힘이 있든 없든 수억겁 전에서부터 자기를 끌고 왔고, 지금도 끌고 가고 있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맡길 수가 없는 거죠. 그리고 스님만 연상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가르친 것이 스님이니까 스님은 자동적으로 벌써 주인공에 첨보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도둑놈들이 다섯이 있다고 합시다. 도둑질하는 놈과 망보는 놈들이 다 도둑놈이지 어떻게 도둑놈이 아닙니까? 지키는 놈도 도둑놈 아닙니까? 물건을 받아 가지고 가는 놈도 도둑놈 아닙니까? 도둑질을 하는 놈도 도둑놈이죠? 도둑질을 시키는 놈도 도둑놈이죠? 다 도둑놈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가르치는 나도 똑같은 놈이란 얘깁니다. 여러분과 나와 똑같은 놈이라 이 소립니다. 똑같은 놈이라면 마음은 체가 없으니 이렇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거기에 책임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네? 그냥 허탕으로 말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생각을 하면 나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즉시 응신으로 화해서 거기에 첨보가 된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미리부터 나는 힘이 없다고 전제하고 들어가니까 힘이 없을 수밖에 없는 거죠. 이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기가 막힌 묘법인데 그러십니까?
그리고 일거일동,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무슨 얘기를 들으면 그대로, 그 살아온 습성 때문에, 살아온 관습 때문에, 그 이름에 걸려 그만 녹아나는 거죠. 토정비결을 봤는데 올해는 이렇게 이렇게 나쁘다더라, 이러니까 조심해야 되겠다 하면 이게 또 걸린 거죠. 점을 치니까 또 이런 게 이런 게 걸리지요? 또 누가 지난 일을 잘 맞추는데, 삼재가 들면 모두 그냥 언짢고 망하고 그런다더라 하면 여기에 또 걸리죠. 아예 의식적으로 아주, 의식이 전부 그렇게 돼 있어요. 이사를 가도 방향을 봐서 가야 된다더라. 이것저것 뭐 이루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일거일동이 다 그래요. 좀 자유스럽게, 편안하게 살 생각은 못하고요. 아주 그냥 일거일동…, 머리는 요만한 데다가 그것까지도 전부 넣고 살아가려니 그릇이 꽉 차서, 좋은 것이 하나도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러니 법당에만 부처님 법이 있는 게 아니고요, 또 불교라는 것이 목탁만 두들기는 게 아닙니다. ‘불(佛)’이라는 건 생명을 뜻하고 ‘교(敎)’라는 건 서로 전달하고 말하고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냥 생활 자체가 불교란 얘깁니다. 우리가 모두 죽고 살고 생활하고 이러는 것이, 그냥 그대로 불교고 종교란 말입니다. 여여하게 그냥 자유스럽게 살아라 해서 인간으로 진화돼서 태어났고 “인간이 되면 만물의 영장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또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부처다.” 이렇게 말을 했어요.
그런데 그 구실을 했으면 좋겠는데 그 구실을 못해요. 아까도 얘기했잖아요. 그냥 소 타고 피리 불고 여여하게 돌아가는 것이 진리고 도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 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디 가서 찾으려고 그렇게 헤매는지 모르겠습니다. 나한테다 두고 어디 가서 도를 찾습니까? 역대 조사들한테서요? 역대 경설로 부처를 찾으려고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내가 그전에도 얘기했죠. 제일 처음엔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어려웠더니 인간이 돼 놓고 보니까 살림살이하기가 또 어렵더라. 살림살이를 하려니까 도구를 만들 줄 몰라서 막대기를 도구로 사용을 했다. 막대기를 사용을 하면서 살다 보니까 지혜로운 마음이 생겨서 돌을 갈아서 쓰기도 하고, 뼈로도 그렇게 쓰고…, 그러다 구리가 더 단단할 줄 알았는데 쓰다 보니 안 되겠으니까 또 철을 쓰게 되고. 사람이 이렇게 자꾸자꾸 발전하는 겁니다.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서 진화되고 또 진화되고, 이렇게 하면서 지금은 마음의 진화까지 바라게 된 겁니다, 마음의 진화! 이 모습은 일단 사람으로 진화가 됐으니까, 이제 정신적인 진화가 돼야 발전이 되고 창조력이 생기고 만물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대권(大權)을 얻지 않겠습니까?
지금 부족한 거는요, 마음의 정신세계를 판단치 못하는 거죠. 그것 때문에 우리가 애를 쓰는 겁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지금 일체 만물만생이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포착했다면, 과학자들한테 가고 옴이 없이 전달을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지구 안에만 사는 게 아니라 이 집을 딴 데다 지어서 살 수 있는 계기가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닙니다. 지구 안에서 부족한 재료를 딴 데서 끌어들이기도 할 수 있는 그런 여건도 되죠. 수명이 짧은 것을 길게 할 수도 있고…. 인간의 마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는 인간으로선 첨단의 진로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서 한 몸뚱이도 지탱을 못하고 이렇게 간대서야 어떻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을 듣습니까? 자꾸자꾸 생활해 가면서 우리가 마음을 진화를 시키고, 마음의 계발을 시켜야 된다는 얘기죠. 우리가 해 보지 않는다면 어디 가서 이 중요한 재료를 얻겠습니까? 그리고 체험을 하겠습니까? 자기가 체험을 안 해 보면 모릅니다. 아까 내가 잣 얘기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내가 해 보지 않는다면 귀한 줄 모르고, 즐거운 줄 모르고 자유스러운 줄도 모릅니다. 생활고를 모른다면 그 고를 시원하게 대치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고를 알아야 고를 해결하죠. 고라는 거를 모른다면 어떻게 대치를 합니까? 지금 우리가 목이 컬컬하고 춥고 배고플 때 뜨거운 엽차 한 잔을 얻어먹는다면, 한번 보세요. 뜨거운 줄 아니까 시원한 맛이 나지, 뜨거운 걸 모른다면 시원하지 않습니다. 뜨거운 걸 알기 때문에 시원한 맛을 압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어디서 오는 줄 알아야 대치를 하죠. 어디서 고가 오는 줄 알아야 대치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오는 구멍은 한 구멍밖에는 없다는 얘깁니다.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그 애고, 업장이 그냥 자동적으로, 한두 건이 아니라 천차만별로 나오는 데가 한군데밖에 없단 얘깁니다. 그러니 한군데다가 되놓으면서 ‘너만이 할 수 있어.’ 할 때에, 바로 거기에 앞서 입력된 게 없어지고 새로 입력이 되면서 그게 현실로 나오는 겁니다. 잘 아시겠죠? 딴소리 하지 마세요, 이제. 하하하…. 딴소리들 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수차에 얘기했습니다. 일체 만물은 지수화풍으로 인해서 생겼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먹고 살며, 지수화풍의 재료를 가졌기 때문에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하다고. 우리의 용도에 따라서 끌어쓰기에 달려 있다고요. 어떠한 환경,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든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끌어 쓸 수가 있는 거라고요. 그리고 병원에서 어떠한 병명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엔 콧방귀를 탁 뀌고 ‘그건 이름일 뿐이야. 우리 몸속에서 일체 나 아님이 없는 나가 한마음에서 다 작용을 하는데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고 모든 것을 다 거기에 진짜로 믿고 맡겼을 때, 한마음은 꺾어질 수가 없습니다. 한마음이란 건 꺾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이렇게 하나하나라면 그냥 담박 꺾어집니다. 이 뜻을 아십시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3년 2월 7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