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마하살에겐 자의식이 없다
지지부진, 더딘 강의가 이제 3장으로 들어섰다. 언해, 원문, 현대어역을 풀은 다음, 사설로 들어간다.
3장의 여러 번역들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일르시되, “諸 보살마하살이 반드시 이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킬지니: 있는 一切 衆生 類, 卵生과 胎生과 濕生과 化生과, 有色과 無色과, 有相과 無相과, 非有相과 非無相을, 모두 無餘열반에 들게 하여, 滅度하노니, 이같이 無量無數無邊 중생을 滅度하되, 실로 중생이 滅道 得한 이 없으니. 어찌어뇨?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我相과, 人相과, 衆生相과, 壽者相이 있으면 곧 보살 아니라.”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붓다께서 수보리에게 일러 주었다. “여러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 그 모든 중생들, 알에서 나는 것, 자궁에서 나는 것, 젖은 곳에서 생긴 것, 변이로 생긴 것, 그리고 신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의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의식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 등, 이 모든 생명을 ‘찌끼 남김 없는 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구제하겠다고…. 그러나 이처럼 헤일 수 없이 많은 생명을 구원으로 인도한다 해도, 기실은 어느 생명 하나도 구원한 적이 없다. 왜냐?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라는 생각, ‘자아’라는 생각, ‘생명’이라는 생각,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라한과 보살
보살이라는 이름은 이제 흔해졌다. 절간에서 공양을 담당하거나 다른 수고로 봉사하는 사람들, 또는 그 절을 찾는 신도 아가씨 아줌마, 할머니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나 보살은 본래 ‘드문’ 이름이었다. 그것은 본시 대승의 최고 인격형을 가리켰던 말이다.
소승과 대승을 가르는 수많은 지표가 있고, 분분한 논란이 있지만, 가장 눈에 띠는 차이는 두 유파가 내세우는 이상적 인격의 모델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아라한의 목표는 자기 구원이다. 붓다는 대승의 전설이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출가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네 문을 나서서, 늙고 꼬부라지고, 병들어 신음하며, 오물을 덮어쓰고, 마침내 죽어 장작불에 사라지는 삶의 현실을 부정하고 불멸을 얻기 위해 출가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 동기는 개인적 사적인 것이었다. 그가 보리수 아래의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자신의 깨달음이 일반인에게는 너무 생소하고 그래서 비웃음을 살까봐 처음에는 혼자 그 비밀을 안고 가려 했다. 그러나 또 전설에 의하면, 범천 사함파티의 “너무 비관하지 말라. 정신적 성숙에 무르익은 사람도 있으니 어찌 그들을 버리는가”라는 목소리에 용기를 내, 비로소 ‘법의 바퀴’를 굴리게 된 것이다. 붓다의 교단도 처음은 그렇게 ‘각자 깨달음을 추구하는 집단’이었다. 그때 재가 신도들은 그런 공동체의 외곽 지원 집단이었다. 당시 승가는 그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수행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승은 이 사정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대승은 대중부(大衆部)에서 발전했다. 그들은 교리의 해석에 있어서도 유연했고, 또 계율도 상황에 따라 적응적이었으며, 일반 신도들과의 유대도 강조하는 개혁적 ‘젊은이들’이었다. 그 반대편에는 교리와 계율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보수적 어르신들, 즉 장로(長老)들이 있었다.
대승의 발전에는 외부의 사정도 있었다. 엄격한 교단은 아쇼카 왕의 귀의 이후, 풍부한 지원을 받았고, 정착지에서 주거와 음식을 제공받았다. 그런데, 그 후원이 끊기자, 교단은 재가신도들과의 긴밀한 유대와 협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부대중을 함께 엮는 대중의 불교, 즉 대승을 출범시켰다. 물론, 외부적 요인을 강조하는 것은 좀 불경스럽고 악의적일 수가 있다. 그러나 전혀 없다는 것도 지나친 결백이다.
대승은 이와 더불어 교리체계를 새로 재편했다. 그 중심에 보살이 있다. 보살을 강조함으로써 이전의 소승적 인간형들이 편협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비판받았다. “어찌 너만 해탈하겠다고 나서느냐.”
그들은 1) 자신만의 해탈을 추구하는 붓다의 제자들은 성문(聲聞), 즉 “붓다의 목소리를 다만 듣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했고, 2) 한편 ‘무소처럼’ 홀로 깨달음을 즐길 뿐, 그 깨달음을 나누어주지는 않으려는 사람들을 연각(緣覺), 혹은 벽지불이라 하여 배척했다. 이들을 일러 이승(二乘), 즉 ‘두 개의 작은 수레에 탄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 대승은 자신들의 새로운 길을 보살승(菩薩乘), 즉 ‘영웅들의 수레’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신을 비우고, 남과 더불어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진정 위대한 사람들로 불리기를 바랐다.
최고의 깨달음,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역설적 마음가짐을 가질 때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붓다는 수보리에게, “보살은 일체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영웅적 발원을 발보리심(發菩提心), 혹은 발심(發心)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종교적 회심에 해당한다.
내게 문제는 없다
단도직입, 붓다의 대답은 의외이다. 2장의 질문을 보고, 우리는 붓다가 “그래, 큰 발심을 했군. 위대한 영적 인간, 보살마하살이 되려면 말이야, 우선 마음속의 이런 습관은 이렇게 고치고, 이런 장애는 이렇게 제거하며, 구체적 수련법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어…” 등등 조언이 이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얘기는 전혀 없다. 기이한 어법이다. 보살이 되려면 어떻게 마음을 유지하고 지켜야 하느냐에 대해 그는 다만 “다른 사람을 이끌고 구원하더라도 그런 자의식이나 자만심을 갖지 말라”고만 일러줄 뿐이다. 지금 붓다는 보살 ‘개인의 문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보살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다: 붓다는 보살이 상구보리(上求菩提)를 마친 다음, 이제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할 것이냐를 가르치려 한다. 보살은 모든 생명, 즉 중생을 연민하며, 그들을 더 이상의 문제꺼리나 심리적 찌꺼기가 남아 있지 않은 지고의 평화와 행복으로 이끌고자 애쓴다.
이것은 일반적 해석이다. 그러나 미리 언급하자면 나는 두 번째 해석에 기운다.
2) 돈교,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반야부 경전,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혜능 돈교의 취지에 의하면 “구원은 이미 성취되어 있다.” 무엇을 하려는 태도, 무엇을 의식ㆍ의도적으로 이루려는 유위(有爲)의 태도야 말로, 목표에 가로놓은 가장 큰 걸림돌이다. 돈교는 이미 있는 자신을 믿고, 그 전체인 불성을 보듬고 존중하라고만 가르친다. “네가 더 이상 해야 할 일은 없다!” 나아가서 말한다. “네가 무엇인가를 하더라도 그것은 네가 하는 일이 아니다.”
이때, 단단히 주의해야 할 것은 가슴 속에 똬리 틀고 있는 자만심과 허세이다.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거나, “내가 너를 가르치고 도와준다”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 공덕을 까먹고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다. 일반적으로 나, 혹은 자아의 심리적 방해가 엷을수록 관계는 더 만족스워 진다. 이보다 더 분명한 진실은 없다. 그 ‘비움’의 극점에 보살이 있고 마하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