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년간의 법문 나눠보면 인천·소승교 등 다섯 가르침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법을 알아듣게 그들의 근기에 맞추어서 가르침을 준 것을 교(敎)라고 한다. 이것들이 모여 팔만대장경이 된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근원을 <선가귀감> 5장에서 말한다.
一代所說者 爲敎門 故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세존이 한평생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가르침을 준 것이 모여 팔만대장경이 된다. 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은 중생 근기 맞춰
여기서 ‘한평생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가르침을 준 것’은 부처님이 49년 동안 말씀하신 인천교, 소승교, 대승교, 돈교, 원교의 다섯 가지 가르침을 말한다.
인천교(人天敎)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고 부처님의 계율을 지키면서 좋은 일만 하라고 일러주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따르면 다음 세상에 복이 많은 인간이나 하늘에 사는 하느님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르치는 도덕적인 가르침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고 보아도 좋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부처님이 쓰신 자비로운 방편이다.
소승교(小乘敎)란 무엇인가? 복을 지어 인간이나 하늘에 태어나도 그 복이 다하면 다시 중생계에 윤회해야 하는 것이 중생의 운명이니, 실체가 없는 중생의 허망한 삶에 집착하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중생 삶에 대한 집착을 떠나 온갖 번뇌를 끊는 공(空) 체험으로써 부처님 세상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뜻을 잘못 알고 오로지 공(空)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을 소승교라고 한다. 오로지 공(空)만 주장하여 모든 것을 부정하다 보면 허무주의나 무기력한 삶에 빠지기가 쉽다.
‘소승(小乘)’이란 작은 수레란 뜻인데 보통 공(空)에만 집착하여 폭이 좁게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이 여기에 해당되므로 이승(二乘)이라고도 한다.
대승교(大乘敎)란 무엇인가? ‘대승(大乘)’은 큰 수레란 뜻이다. 많은 중생들과 함께 부처님의 세상으로 가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보살들의 큰 틀을 말한다. 소승처럼 공에만 집착하여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모든 중생들과 함께 부처님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민중불교 운동이다.
부처님이 공(空)을 말씀하시는 것은 온갖 번뇌를 끊는 그 자리에서 바로 부처님의 세상을 드러내고자 한 것인데, 소승들은 그 뜻을 모르고 공(空)에만 집착하여 나쁜 경계에 빠진 채 주저앉아 있으므로 그 반작용으로 일어나게 된 개혁 불교이다.
돈교(頓敎)란 무엇인가? 소승이다 대승이다 말들을 하지만 사실 ‘한 생각 돌이키면 서있는 그 자리가 모두 부처님의 세상’이라는 가르침이다. 여기에만 해당하는 특별한 경론(經論)이 없지만 이와 같이 설법하는 내용들을 모두 돈교라고 한다.
원교(圓敎)란 무엇인가? 이 세상은 그 자체가 안팎으로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오롯한 부처님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근본 뜻은 중도실상(中道實相)에 있으므로 이것을 올바르게 드러낸 가르침이다.
모든 중생이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 속의 달과 같아서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끝내 어떤 실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삼제(三諦)의 도리가 완연히 구족되어 있다. 대표적인 경전이 <화엄경>과 <법화경>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도리를 <화엄경>에서 “참으로 놀랍고 놀랍도다. 모든 중생들이 다 여래의 지혜와 공덕을 갖추고 있는데도 분별망상 때문에 그것을 알지 못하는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가섭과 아난이 선과 교를 갈래짓다
이 많은 가르침들은 모두 부처님을 따라 다니면서 모든 법문을 듣고 외워놓았던 총명한 제자 아난에 의하여 이 세상에 전해진다. 가섭이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아 선종(禪宗)의 초조가 되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난에 의해 정리된다. 선(禪)과 교(敎)의 근원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인데 선과 교로 갈라지게 된 것은 가섭과 아난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말 없음으로써 말이 없는 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선이요, 말로써 말이 없는 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교이다. 마음은 선법(禪法)이요 말은 교법(敎法)이다. 법은 한 맛이더라도 양쪽의 견해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니, 이것으로 선과 교의 두 갈래 길을 잘 분별해야 할 일이다. 서산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不得放過 草裡橫身
일어나는 한 생각도 놓치지 마라
차가운 풀 속에 옆으로 누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