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외부세계의 끊임없는 진동을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듣고 있을 뿐
서암 스님은 현대에 보기 드물게, 자신의 선 수행을 모범적으로 열반 시까지 보여주셨던 분이다. 자신이 조계종 8대 종정이셨음에도 스스로 세속적인 문중을 만드는 데 관심이 없을 만큼, 수행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작년 서암 스님의 제자들은 <소리없는 소리>’라는 책을 펴냈다. 서암 스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스님의 가르침의 자취를 실감 나게 정리한 매우 품격이 높은 책이다.
그 책의 제목을 왜 ‘소리 없는 소리’라고 했을까 생각해본다. 아마 <반야심경>에 있는 말, ‘무색성향미촉법’, 즉 우리가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대상이나, 감각기관에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다는 말에서 따 온 것이 아닐까. 서암 스님의 가르침이 의미를 가지더라도, 스님의 목소리 자체에는 집착할 만한 것이 없다는 체와 용에 대한 불교의 양면성을 만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한다.
‘소리‘를 통해서 사람은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와 만나기도 하고, 아파트 위층에서 이웃이 만드는 소음과 만나기도 한다. 소리는 공기와 같은 매질을 통해서 전달된다. 매질이 딱딱할 수록 소리가 손실이 없이 전달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귀를 책상에 대고, 책상을 두드릴 때 들리는 소리는 공기를 통해서 들리는 소리보다도 훨씬 더 생동감이 있다. 책상이라는 매질이 공기보다는 더 소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물질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소리를 녹음으로 듣는 것과 스스로 인식하는 소리에 차이가 나는 이유가 자신의 소리를 두개골을 통해서 듣기 때문이다. 두개골이라는 뼈의 소리 전달 능력이 공기보다도 더 우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공기는 사실 공기분자가 수 없이 돌아다니는 공간이다. 19세기 말을 살았던 볼츠만은 이 공기분자의 운동이 압력, 온도를 결정한다는 이론을 세운 첫 과학자다. 당시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이해했거나, 받아들인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가 향을 피울 때, 연기는 아름다운 자취를 만들면서 공기를 퍼져나간다. 이 움직임은 향의 큰 입자를 공기 중의 작은 입자가 무수히 때리기 때문에 생기는 운동이다. 작은 입자가 향 입자를 때리는 행동은 매우 임의적이다. 이러한 행동을 예측한 사람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꼽히는 아인슈타인이다. 사실 향이 공기 중을 운동한다고 해도 좋고, 꽉 찬 공기분자 중을 향 연기가 비집고 움직인다고 해도 좋다. 마치 목욕탕 물속에 물방울이 움직이는 것과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공기에도 이와 같이 오묘한 과학이 있다. 이러한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서 우리는 외부 세계의 끊임없는 진동을 소리라는 이름으로 듣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을 한다면, 우리에게 들리는 소리에 깊은 이치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서 전해지는 우주 만상의 진동에 반응하는 ‘나’라는 진화의 결과를 느낄 수도 있고, 파도의 소리와 반응하는 자신의 인식에서 ‘불성’을 발견한 관세음보살의 위대한 수행을 편린이나마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