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될 인연이 없고 부처를 볼 수 없는 사람은 곁에 부처님이 있어도 소용없다
어느 날 아난 존자는 부처님을 모시고 가다가 사위성 입구에서 어떤 불쌍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마음이 온화한 성품의 아난 존자는 그 할머니를 보는 순간 더할 수 없는 연민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부처님께 청하였습니다.
“부처님, 제발 저 할머니에게 다가가 주십시오. 부처님의 몸에는 32가지 뛰어난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듯하고 빛이 납니다. 그런 부처님을 뵙게 되면 저 할머니는 마음에 더 할 수 없는 기쁨을 일으킬 것이요, 그러면 마음이 열려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부처님은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저 할머니는 나와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구나.”
하지만 아난 존자는 할머니가 가엾다는 생각에 거듭 부처님께 청하였고 부처님은 그런 아난 존자의 청에 못 이겨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부처님이 할머니 앞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고개를 뒤로 돌렸습니다. 마치 뒤에서 누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이번에는 부처님이 할머니의 시선이 향해있는 뒤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할머니는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습니다.
부처님은 오른쪽으로 다가갔습니다. 할머니는 머리를 왼쪽으로 돌렸습니다. 부처님이 왼쪽으로 다가갔을 때 할머니는 오른쪽을 향해 돌아앉았습니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야 할 때에 숙였고, 숙여야 할 때에 고개를 들었습니다. 부처님이 몇 번이나 다가가서 그녀와 눈을 맞추려 하였건만 끝내 할머니는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는 부처님이 자기 옆에 와 있다는 것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소용없다. 구제될 인연이 없고, 부처를 볼 수 없는 이런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다.”
할머니의 곁을 떠나면서 부처님은 이렇게 조용히 탄식을 하였습니다.(대지도론)
이 글을 읽으면서 할머니와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안타까움이 잔뜩 담긴 시선으로 다가서는 부처님.
그리고 아무런 기대도 설렘도 없이 덤덤히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는 할머니.
인연이 빗겨가도 이렇게 빗겨갈 수 있을까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하다못해 왜 이렇게 자꾸 앞을 가로 막느냐며 손사래라도 쳐서 부처님과 어떤 빌미라도 마련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도 해보게 됩니다.
세상에는 가장 불쌍한 여덟 종류의 삶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옥과 축생과 아귀에 사는 삶, 장수하고 행복이 넘쳐나는 장수천(長壽天)과 변지(邊地, 웃타라쿠루)에 사는 삶, 신체기관에 너무나 큰 장애가 있는 삶, 세속의 잡다한 지식에 마음이 꽉 차서 살아가는 삶,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시대에 태어난 자의 삶이 그것입니다.(유마경)
이 여덟 가지 삶이 왜 불쌍한가 하면, 고통이 너무 모질거나 행복이 너무 넘쳐나서 또는 너무 많은 이론이나 그릇된 견해들에 꽉 차 있어 그 마음에 손톱만큼의 여백이 남아 있지 않아 부처님과 같은 성자들의 귀한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덟 가지 삶은 그렇다고 칩시다. 현실적으로 감내해야할 일들이 너무 커서 그런 걸 어떡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은 부처님이 다가갔지만 저 할머니처럼 아예 의식조차 하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푸대접하고 외면하는 경우도 경전에는 이따금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묘법연화경>에서는 부처님이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가장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해도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떠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들을 보면 마음속에는 어김없이 두 가지 궁금증이 떠오릅니다.
첫째는 대체 부처님이 어떤 존재냐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부처님을 몰라도 한평생 사는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근데 부처님을 만났을 때 법문 좀 듣지 않았기로서니 뭐 그리 엄청난 행운을 놓친 양 호들갑을 떠느냐 이겁니다.
둘째는 그렇게 훌륭한 말씀이라면 왜 부처님은 외면하거나 떠나가는 사람들의 옷자락이라도 부여잡고 설득하고 강제로라도 들려주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계속)
*위 <대지도론>의 이야기는 <인도불교사1> (에띠엔 라모뜨 지음, 호진 옮김, 시공사, pp.104~105)에서 재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