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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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마조의 선맥이 동쪽으로 가다/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마조가풍 이은 서당지장, 도의국사 인가하며
“이 사람 아니고 그 누구에게 법 전하리”

부산 일광에 있는 묘관음사는 향곡(1912~1978)선사의 열반지이다. 영정도 모셔져 있다. 절친한 도반이었던 성철선사의 ‘향곡을 보내며(哭香谷兄)’라는 조사(弔詞)는 역설적 미학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슬프다! 종문의 흉악한 도적놈아 / 천상천하에 너같은 놈 몇이나 되리 / 인연이 다하여 손을 털고 떠났으니 / 동쪽 집의 말이 되었는가, 서쪽 집의 소가 되었는가 / 쯧쯧. 갑을병정무기경(甲乙丙丁戊己庚)이로다.
묘관음사의 조사전에는 다른 선원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영정이 모셔져 있다. 마조선사와 남전보원, 백장회해 3인을 함께 모신 것이다. 그런데 그 화면구성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맨오른쪽 끝에 마조선사가, 가운데 남전보원, 왼쪽에 백장회해가 앉아있다. 역사적으로 마조의 3대 제자는 서당지장, 백장회해, 남전보원으로 알려져 있다.
스승이 오른편 구석에 보처(補處)처럼 앉아 있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제자인 남전보원이 가운데 우뚝하게 위치하고 있는 것도 의아하다.
조사탱화의 기본구도에 대한 미술적 안목도 없으면서, 애써 모셔놓은 남의 절 조사영정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지만 추측컨대 뭔가 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완성 후 마지막 찰나에 긴장이 풀린 불모가 그 이름을 잘못 기록했을지도 모르겠다. 즉 3인의 이름에서 잠시 혼동을 일으킨 것 같다. 짐작으로는 서당지장을 마조도일로 오기(誤記)한게 아닐까 한다. 만약 맨 정신이었다면 더 깊은 뜻이 있는지도...
비록 그 영정에서는 푸대접을 받고 있지만 서당지장은 한국선종사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조계종 종조 도의국사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도의국사는 왕씨이고 북한군(北漢郡: 현 서울)출신으로 선덕왕 5년 784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40여년을 그 곳에서 살게 된다. 그 때 이름은 ‘명적(明寂)’이었다.
오대산 문수도량을 참배한 이후 육조단경 설법처인 보단사(寶壇寺)에서 다시 계를 받았다. 선종승려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때는 각 종파마다 승복 색깔이 달랐다. 그래서 종파를 바꾸는 것을 ‘옷을 바꾸어 입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조계산으로 가서 육조영당을 참배하였다.
여기서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영당입구에 명적이 서자 그 문이 저절로 열렸다. 참배고 나오니 역시 저절로 닫혔다. 때마침 바람이 두 번이나 불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였을 것이다. 육조께서 당신의 적손(嫡孫)으로 인정한다는 강력한 메시지 전달이었다.
하지만 그 때 이미 육조와 마조는 열반했다. 마조가 활약했던 강서 홍주 개원사에는 그의 제자 서당지장 선사가 마조가풍대로 법을 펴고 있었다. 명적은 서당지장의 문하에서 안목이 열렸고 스승의 인가를 받으면서 ‘도의’라는 법호를 받게 된다.
서당지장은 도의를 인가하면서 “참으로 이 사람이 아니고서 그 누구에게 법을 전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육조혜능 선사도 남방출신이라 중원사람들에게 오랑캐 소리를 들었는데 신라 변방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 하랴. 선어록 곳곳에 등장하는 “화살이 신라를 지나가 버렸다”는 속담은 ‘이미 늦었다’ ‘턱도 없는 소리’라는 뜻이다.
그런 풍토 속에서 스승에게 이런 찬사를 받았으니 그 인물됨의 출중함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백장회해 역시 그를 보고서 “마조의 선맥이 모두 동국으로 가는구나”라고 한 마디를 더 거들었다. 이 언급처럼 신라 구산선문의 대부분은 마조계열이다. 즉 마조도일의 법맥이 해동 조계종의 원류이다. 그래서 해동선종 최초 전법지 설악산 진전사 조사전에는 마조와 서당지장의 영정도 함께 봉안해야 하는 당위성이 도출되는 것이다.
200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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