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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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뒤집으면 ‘살자’인걸/이근후(열린마음 클리닉 원장)
“자살 그리고 살자” 그냥 자살이란 글자를 뒤집어 본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곧 이 뒤집음과 같은데 죽고 삶이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중얼 거려 보지만 우리 같은 범속한 사람에겐 죽음과 삶이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다. 요즈음 들어 자살이란 용어가 대중매체를 통해 빈번하게 쏟아지고 있다. 자살하는 이유들도 다양하지만 자살하는 연령또한 점점 어려지기 시작한 것도 문제다.
자살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하나는 “자살이라니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지.” 물론 자살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말이다. “오죽하면 자살을 택했을까.” 이 말 또한 자살에 대한 연민의 정을 나타낸 말일 것이다. 보는 이에 따라 이런 상반된 느낌을 표현하지만 바탕에는 안타깝고 안타깝다는 정서가 깔려 있다.
자살 사이트라는 것도 인터넷에 있다고 한다. 이 사이트는 자살을 예방하는 곳도 있고 자살을 돕는 사이트도 있다. 예방하는 사이트는 ‘죽을 용기로 살기를’ 자살을 돕는 사이트는 ‘오죽하면 자살을 할까’라며 도움을 주는 모양이다. 우리 사회는 자살이 법률적으로 허용된 행위는 아니다. 불가에서도 생명의 존엄한 가치와 유아독존의 자존감을 설파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인 자세다. 이런 자세를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부처님의 말씀처럼 왜 그들이 자살에 이르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선 자살로부터 삶을 되찾도록 돕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화살 맞은 사람을 두고 왜 무슨 화살에 라는 다툼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자살은 최악의 살인이다’ 라거나 ‘자살하는 힘을 가진 사람은 그래도 행복하다’는 말장난으로 죽은 자의 마음에 또 한번의 상처를 아무런 생각도 없이 주곤 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 사회다. 살아있는 사람 마음대로 죽은 자를 단정한다. 그렇게들 단정해야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이 편하기 때문일까.
자살을 미화하거나 죄악시하거나 어느 것도 자살자의 진정한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산자가 해야 할 일은 화살을 어떻게 하면 신속하게 뽑아 그들의 삶을 그들의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런 몫이 산자의 책임이요 의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이 그러해야 하겠지만 특히 불자는 자살하는 사람 자살 하고자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통을 나누면서 위로하고 용기를 다시 찾게 할 방편을 찾는데 마음을 써야 한다.
이런 방편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방편이 있고 또 사회나 국가가 대신해야할 방편도 있다. 자살 소식이 있을 때만 반짝 관심을 표하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잊고 사는 속성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불자다. 이젠 좀더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하고 자살자나 산자에게 모두 도움이 되는 방편을 함께 찾아 나서야할 절명한 때가 된 것 같다.
어떤 방편이 공론화 되어 창출이 되든지 간에 우리들이 간과해선 안 될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자존감이다.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고 겸허하게 높이는 자세 바로 그것이 불성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 불성의 크기와 무게는 서로 다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갖는 불성을 진장한 자신의 몫으로 키워 나가도록 돕는 그런 방편은 개인이나 사회 모두에서 필요한 방편이다.
모든 원인이 자살자의 몫이 되어서도 안되고 반대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 되어서도 안 된다. 죽은 자나 산자의 공통된 몫으로 우리 마음속에 처절하게 남을 때 생명의 존엄과 자존감이 불성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다.
새해엔 우리 모두의 몫으로 생각하는 한해를 삼아 보자.
200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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