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 들고 와서 빈손 들고 가는 도리 알아야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1(남):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큰스님: 복 많이 받을 것도 없고 안 받을 것도 없고, 오는 대로 그냥 사는 거지, 뭐.
▲질문자1(남): 심응회 회원입니다. 스님께서는 고구정녕으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고 계십니다마는 아직도 저희들은 미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몇 가지 점에 대해서 좀 여쭙고 싶습니다.
▲큰스님: (질문자가 가지고 있는 질문 용지를 보시고) 이 종이를요, 이렇게 뒤집어서 쓱 한번 접어 보세요. 뭐 다 요량이죠.
▲질문자1(남): 먼저, 신선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이 신선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자는 세상에 연연해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세상을 싫어하니, 세상이 싫어서 신선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바로 어렵고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 이야기처럼 세상이 싫어서, 왜 이런 세상에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을까를 고민하기도 하고, 궁금해하기도 하고 혹은 몹시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우리 이 세상에 이런 모습으로 살게 되는, 또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인연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큰스님: 그것이 그런 말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사람은 부자를 건너다 볼 수도 없으니까 포기하는 거죠. 예, 허허허…. 포기해서 신선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신선이라는 것은, 내가 빈손 들고 와서 빈손 들고 가는 도리를 알아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 도리를 안다면 그 중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아실 겁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신선이에요. 그러니 내가 항상 얘기하죠. ‘가는 거 잡지 말고 오는 거 막지 말아라. 오는 대로 모든 것을 대치해서 놓고, 가는 것도 잡지 말아라. 나한테 다가오지 않을 거 욕심을 그렇게 부리지 마라.’ 이런 말을 항상 하죠. 그러니까 신선이라는 것은 지금 이 공부 하고 가시는 여러분들이 신선입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막론하고.
▲질문자1(남):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우선 이 처지가 힘드니까 신선을 역설적으로 말씀을 드렸는데요, 결국은 왜 이렇게 내가 힘들게 나왔는가 이런 것을 좀 여쭙고 싶었던 것입니다.
▲큰스님: 으응,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아까도 얘기했듯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게 입력이 돼서 지금 현실에서 아주 피치 못하고 그냥 사는 거니까, 자기가 벌려 놓은 거니까 자기가 해결해야지 누가 해결해 줄 수가 없어요. 가난하게 나오는 것도, 못나게 나오는 것도, 모습을 짐승으로 나오는 것도, 뭐 개로 나오는 것도 모두가, 부자로 사는 것도 자기가 지어 놨기 때문에 부자거든요. 그러니까 모두가 자기가 해서 자기가 받는 거지 누구한테 원망 하나도 할 게 없어요. 그러니까 어려운 것도 닥치는 대로 그것을 재료로 알고 ‘어, 내가 이렇게 해 놨으니까 이게 다 공부할 수 있는 재료다. 감사하구나, 오히려.’ 그러고선 거기다가 놓고 그렇게 간다면 다시금 그게 바꾸어지죠. 운명이나 팔자, 영계성·세균성·업보성·인과성 이런 것이 다 몰락 그냥 없어지죠. 지금 없애고 가시는 길이죠, 모두.
▲질문자1(남): 예, 스님 말씀을 ‘현실에 오는 어려움을 수행의 재료로 삼아서 나아가라’ 이런 말씀으로 제가 받아들이겠습니다.
▲큰스님: 예. 사실인 걸요, 뭐.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어느 도인의 말로는 우리 나라에 세계적으로 뛰어난 인물감이 태어나기는 해도 이 땅이 골육상전의 기운이 있는지라 우리 한국 사람이 한국의 인물을 죽여 버리기 때문에 세계적인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거나 세상을 살아 보아도, 나라를 망치거나 사업을 실패할 때도 적이나 경쟁자보다는 같은 민족이나 친한 사람의 해침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구나 한국 사람은 이런 점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특히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친한 사람들끼리 더 해치려는 마음이나 시기심이 강한지, 또 이런 국민성이 우리에게 있다면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요?
▲큰스님: 그런데 그건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는데요, 한 가지는 모든 국민성이 물질로만 치닫는 마음들을 가졌기 때문에 정신계의 그 모든 너그러움을 받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능히 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숨겨져 있거든요. 바깥으로 나서질 않습니다. 보배는 오히려 바깥으로 나서지 않는 법이죠. 그런데 그걸 찾지 못하는 거죠. 만약에 어떤 인연으로 인해서 나섰다 하더라도 치워 버리죠. 이런 문제가 있고요.
또 하나는 우리가 어떠한 관계상 이 마음의 공부를 해서, 우리 한국만 하더라도 그렇고 세계적으로도 그렇다고 보죠. 아까 내가 떡 먹는 사람 얘기했죠. 저 중국의 왕이 ‘음, 조선을 치면 내 나라가 망하겠구나.’ 하는 이야기요. 그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이 모두가…, (질문자에게) 그 뜻이 안 돌아갑니까, 그렇게 고개짓을 하시게? 그러니까 그거와 같이 이 생명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즉 세계로 비추어 볼 때 전력이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전력들은 다 통하게 돼 있죠. 어떤 용도로 쓰든 전력은 전력대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내 마음의 불바퀴는 그대로, 세계적으로도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불바퀴와 저 불바퀴를 한데 합치면 (손바닥을 서로 부딪쳐 보이시고) 둘이 아닌 불이에요. 그러니까 어떠한 나라를 막론하든지 또 우리 국내에서도 그렇게 되도록 희망하면서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겨 놓고 ‘너만이 할 수 있어. 너만이 사람을 찾아서 할 수 있는 거지 딴 데서는 할 수가 없어.’ 하고 관해 보세요. 모두 물질계에서 처참하게 그냥 올라가려고만 하기 때문에, 위에서 내리밟으면 또 떨어질 건데도 불구하고 그냥 올라가려고만 하기 때문에 안되는 거니까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모든 마음들을 한데 합쳐서 기울여 보시면 중국에서 말한 뜻이 아마 나올 겁니다.
▲질문자1(남): 결국은 한마음 공부를 열심히 하면 이게 극복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큰스님: 그렇죠. 평등공의 법이라는 것은 철퇴가 들어갈 수도 있지만 선지들이, 보이지 않는 손들이 전부 한손이 돼서 응시해 줄 수 있는 여건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니깐요.
▲질문자1(남): 네, 감사합니다. 다음으로는, 얼마 전 텔레비전 방송에서 중국의 사업가가 한국 사람들이 신용이 없고 약속을 지키지 않음을 비난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에 대한 이런 류의 이야기는 비일비재합니다. 큰스님께서 ‘좋은 거짓말은 나쁘지 않다’ 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만 일부의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이나 가족 혹은 단체의 이익을 위해서 예사로 거짓을 말하면서 큰스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일부 있습니다. 신용이 없다고 비난받는 사람들이 큰스님의 말씀에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면, 어쩌면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외국에서도 신용이 없다는 평판을 받는 한국 사람에게 굳이 그런 말씀을 들려주신 까닭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큰스님: 애는 애 노릇 하고 어른은 어른 노릇 하랬지 누가, 아니, 어른 노릇 해야 할 때 애 노릇 하라고 그랬고, 애 노릇 해야 할 때 어른 노릇 하라고 그랬습니까? 만약에 부모가 속상해서 병이 들까 봐, 자기의 속말을 하지 않는 것은 거짓이 되는 거지만 그것은 효(孝)고 거짓이 아니죠. 또 자식들한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사시는 분 계세요? 다 못하죠? 그게 거짓 아닌 거짓이면서도 아주 참, 뜻이 깊은 작용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요, 거짓 하라고 시키는 게 아니라 거짓 아닌 거짓을 말하는 거죠.
▲질문자1(남): 네, 스님께서는 그런 뜻에서 말씀하셨겠지만 특히, 아직 어른이 되지도 않았는데 애가 어른이 다 됐다고 우기는 그런 입장에….
▲큰스님: 그러면 안 되죠. 왜냐하면 부처가 돼도 ‘나는 부처가 아니니라’ 했습니다. 왜냐? 내가 표현을 이렇게 한번 해 보죠. 댁들 몸속에 중생들이, 생명들이 많이 들어 있는데 내가 혼자 밥 먹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네?
▲질문자1(남): 더불어 먹었죠.
▲큰스님: 더불어 먹었죠?
▲질문자1(남): 예.
▲큰스님: 그러니까 ‘내가 밥 먹었다’ 그러고 내세울 수 없죠?
▲질문자1(남): 예. 그렇습니다.
▲큰스님: 그래요. 그러니까 밥 먹는 거 하나만 가지고 그런 게 아니에요.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만나는 거, 사는 거, 먹는 거 모두가 다 그렇죠. 그래서 공생(共生)·공심(共心)·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화(共食化) 하고 천차만별로 다 그렇게 나투고 돌아간다 이렇게 말을 했죠?
▲질문자1(남): 예.
▲큰스님: 그랬으니 이게 닥쳐오는 대로 그러한데 뭐 그게…, 할 일은 해야 하고 안 할 일은 안 해야 되는 거고, 고개가 숙여져야 되는 거죠. 그런데 내가 내세울 게 뭐 있다고 안다고 그러겠습니까? 네? 이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고 그 수많은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다 내 마음의 선장에 의해서 작용을 하고 있는데 만약에 내가 ‘나다’ 한다면 이 속의 생명체들이 ‘흥, 네가 했다고, 네가 안다고 한다면 너 혼자 실컷 알아 봐라. 너 혼자 실컷 해 봐라.’ 이러고선 작용을 안 해 줍니다. 그리고 자꾸 빗나가게끔 되죠. 그러니까 그렇게 나를 세우지 않는 게 이 부처님들의 목적이에요. 그래서 방편으로 표현을 하자면 ‘내 몸뚱이 속에 많은 중생들이 들어 있으니 나 혼자만이 있다고 세울 게 없는 것이 여래니라.’ 하는 겁니다.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제가 또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의 것하고 약간 연관이 있습니다. 때때로 큰스님께서 가르치는 여러 생활의 방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 되는 경우도 부인할 수 없고, 심한 경우에는 몇 년간의 한마음 공부가 수행하는 태도에 오히려 방만과 자만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일은 작은 일에 불과하고, 술도 그렇고, 다른 여러 가지 일도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것을 자재하자고 말하고 싶어도 왜 걸리냐는 상투적인 반응이 싫어서 아예 모른 척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이 너무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서 난감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이 매사에 걸리지 않는 자재로움을 이루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사람들에게 은근히 그것을 자랑하고 권하면서 스스로 그런 것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큰스님의 말씀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이고, 큰스님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시다면 거기에 대해서 저희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큰스님: 그러죠. 애가 갓 태어나서 씹어 먹을 이가 하나도 없는데 고기를 줘서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못 먹는 사람은 안 먹어야죠. 그리고 어른은 씹어 먹을 수 있으니까 먹어야죠. 그거와 같이 이 마음공부를 하되 진짜로 맡기고 진짜로 물러서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는 먹는 것이 그 무명을 벗겨 주는 일이고, 그것을 못하는 자에게는 살생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양단간을 놓고 어떤 것이 옳으냐 이런다면 어떤 게 옳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살생이 되니까 먹지 말아야 하고 이건 무명을 벗겨 주니까 먹어야 하고,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옳습니까? 그러니 ‘어린애는 먹지 말고 어른은 먹어라’ 이겁니다. 허허, 먹되 무명을 쓰고 애탄지탄하는 중생들을 위해서 주인공에 맡기고 먹어라. 그 몸뚱이의 살점 하나를 그런 사람이 먹기를 바라면서 천 년을 기다리고 있다 이겁니다.
왜 그게 벗어나기가 힘드느냐 하면, 소로 살았으면 소의 습성이 잔뜩 붙어서 그 영(靈)도 사람으로 가지 않고 소로 갑니다. 그래서 소를 면치 못해요. 개도 그렇고 다 그래요. 한 찰나 알았으면 훌떡 뛰어넘으면 될 텐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무명을 벗지 못하고 세세생생에 그 모습을 쓰고 허덕이는 것이 바로 짐승들의 사연입니다. 그래서 그 무명을 벗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짐승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연히라도 선승(禪僧)들이 그 살점 한 점 잡수어 주시기를 원하고 원하고 그냥 염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생명을 죽이지 않고 풀 이슬만 먹으면서 사는 짐승들도 많습니다. 그런 짐승들이 오히려…, 소가 왜 여물만 먹고 삽니까? 살생을 하지 않고. 그러니까 우리 인간도 잘못하면 소로 태어날 수도 있고 잘못하면 독사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반복돼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왜 이런 공부를 하라고 하겠습니까?
▲질문자1(남): 스님께서는 먹히는 고기나 먹는 사람들도 다 방생을 하기 위해서 말씀을 해 주셨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보면….
▲큰스님: 이걸 이렇게 들으셔야 돼요. 그러니까 자유죠. 그러니까 먹을 만한 사람이 먹든지, 먹을 만하지 않은 사람이 먹든지 그건 너희들 생각대로 해라. 지혜롭고 틀림없는 사람들 같다면 모든 걸 거기다 맡기고 먹되…, 옛날에도 이런 점이 있죠.
산간 절에서 스승이 다 죽게 됐어요. 제자가 생각을 하니 참 무엇을 어떻게 갖다가 병을 낫게 할 수도 없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분에게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호미를 들고 통을 들고 나갔어요. 지렁이를 그냥 수백 마리를 잡아서 푹 고아 가지고선 그거를 체에다 착 받쳐 가지고 버리고선 ‘지옥을 가도 내가 갈 테니까 지옥을 보내든지 마음대로 해라.’ 하고 그냥 갖다가 드리니까 “이게 무슨 물인데 이렇게 맛있니?”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이것이 풀뿌리를 고은 물입니다.” 하고선 갖다드렸더니 그것을 먹고 병이 완쾌돼서 건강하게 도로 다니시더랍니다. 그래도 이것은 풀뿌리라고 했더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갔겠네요?
그러니 예를 들어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거짓 아닌 거짓이 효가 된다 이랬죠. 자기가 죄를 받고 죄를 안 받고 그걸 떠나서, 오직 그 스승을 살리기 위해서 그 생명체들을 다 죽였다면, 그건 죽인 게 아니고 그냥 곧바로 인간으로 전부 환생을 시킨 거죠. 예를 들어 닭을 수십 마리를 죽였다 해도 닭의 마음을 한데 합치면 하나가 돼요. 아시겠어요, 그 뜻을? 닭 수효대로 사람으로 화하는 게 아니고, 닭 30마리면 30마리를 한데 합쳐서 한 사람으로 만든다면 되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지렁이가 수십 수백 마리라도 그것은 한 사람으로 인간 환생을 시킬 수가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착한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손들이, 부처님의 손들이 다 응신(應身)으로 화해서 응해 주신 겁니다. 그러니 어찌 그게 천도가 안되겠습니까? 그러니 살생이 없죠.
▲질문자1(남):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옛날 경허 스님은 무애행(無碍行)을 많이 하셨고요. 또 얼마 전에 열반에 드신 성철 스님은 그 입장을 조금 배척을 하신 걸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큰스님: 그 입장을 뭘요?
▲질문자1(남): 경허 스님의 무애행 그 자체는 긍정을 하시지마는 일반 대중들에게 비쳐지는 데 대해서는 경계심을 가지고, 무애행을 권장하는 입장과 다른 입장에 서신 것 같아요. 제가 알기로는요.
▲큰스님: 이거 보세요. 그것을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성철 스님은 그거를 자기가 알더라도 중생들에게 비칠 때 누(累)가 되지 않게 하지 그랬느냐 하는 측면에서 생각을 하셨겠죠. 또 경허 스님께서는 ‘너희들이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이거를 보고 뛰어넘어라.’ 하고서 (오른손 주먹을 쥐어 들어 보이시고) 이렇게 든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높으냐 하면 다 똑같습니다. 다 똑같아요. 다 똑같으니까 피장파장이에요. 한 분은 뛰어넘게 하기 위해서고, 한 분은 그거 왜 자꾸 누가 되게 하느냐 이런 거고. 그러니까 다 똑같습니다, 그 마음은요.
▲질문자1(남):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대중 박수)
▲큰스님: 이 마음의 길을 걷지 않고는 그 도리를 모릅니다. 모두 몰라서 내가 이런 대답을 해도 ‘저게 뭐 마땅한가?’ 이러겠지만 사실이 그러니까요. 한 손에 뼈다귀를 들고 다른 손에 술을 한 바리때에다 착 들었으니, 야! 뼈다귀 든 거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해서 건지고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 됐고, 술 바리때를 든 것은 수레바퀴처럼 물처럼 모든 중생들이 다 찰나찰나 돌아가느니라, 하는 거죠. 물이 수없는 중생들에게 양식도 될 수 있지만 또 뜻을 크게 본다면 끊임없이 돌아가는 이치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리때예요. 그러니 모두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공부요, 공부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도리를 아신다면 여러분도 이 세상을 쓰다 달다 생각 없이 그냥 참, 그대로 그냥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나처럼 말입니다. 하하하…. (대중 박수)
▲질문자2(남): 스님, 오늘도 이렇게 뵙게 돼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질문드릴 요지를 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마음에서 나오는 그대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전번에 질문드릴 때도 말씀드렸지마는, 이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은, 머리로 아는 것보다 단 한 자라도 마음으로 알아야 된다 하는 것이 제가 안 진실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상반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백이냐 흑이냐 하고 제 마음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있을 때에, 부정적인 것은 ‘저것은 아니야’ 그러고 ‘그저 놔야 된다’ 이런 마음이 생기는데,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은 그것까지도 다 수용해야 되지 않냐 이렇게들 말하거든요. 그런데 제 마음에서 그것까지 다 받아들이지를 못해서 그러는지 어쩌는지 거기에서 지금 약간 맴돌고 있기에 질문드리러 나왔습니다.
▲큰스님: 긍정적인 일은 해야죠?
▲질문자2(남):네.
▲큰스님: 네, 그런데 부정적인 일은 하지 말아야죠?
▲질문자2(남): 네.
▲큰스님: 그렇게 댁에서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하는 걸 벌써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질문자2(남): 네.
▲큰스님: 그게 묘법이죠, 그 알고 있는 자체가. 그러니까 벌써 알고 있기 때문에 안 하게 되고, 알고 있기 때문에 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그것이 긍정이다 부정이다 하는 게 한 구멍에서 나오는 거지 두 구멍에서 나오는 게 아니죠. 그러니까 나오는 대로 긍정적으로 나오는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나오는 것은 ‘부정적으로 나오는 것도 너한테서 나오는 거니까 긍정적으로 나오는 것도 너한테서 나올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가 놔라 이 소리예요. 한 구멍에다가!
▲질문자2(남):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말이지만 예를 들어서 이 공부의 일차적인 목적은 선행하는 데 있다 그러는데, 선행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 뒤에는 또 악행이 뒤따른다 하는 상반되는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판단해서 ‘옳은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옳은 길이면 가면 된다.’ 하는 마음을 먹고 있지만,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이 “선행이 있으면 악행도 있는데 선행과 악행을 다 받아들여야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큰스님: 이거 봐요. 받아들이라는 이치는 나쁜 사람이 나한테 접근을 했다, 접근을 해 온다, 망하게 만들어졌다 이런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라 이 소립니다. 왜냐? 전력에 비유한다면 어떤 용도에 쓰든 전력이 똑같듯이, 나쁘게 하는 사람이나 좋게 하는 사람이나 그 전력은 똑같아요. 그러니까 마음이 천리만리도 멀다 하지 않고 전달이 돼요. 그러니까 내 주인공에다 모든 걸 놓고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것도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할 때에 그 마음과 통하게 되죠.
그러니까 이걸 응신이라고 그러죠. 만보살(萬菩薩)이 응신으로 화해서 각계각층 모든 중생들이 원하는 대로 응해 주신다, 나투어 주신다! ‘나투어 준다’ 하는 거는 병을 앓는 데는 의사가 돼 주고, 좋은 데로 못 가서 원하는 사람한테는 지장이 돼 주고, 또 좀더 살게 해 달라고 하는 데는 칠성이 돼 주고, 이렇게 나툰단 말입니다. 딴 걸로 화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하고 가지 않습니까?
▲질문자2(남): 네.
▲큰스님: 자꾸자꾸 바뀌어서 만나고, 바뀌어서 말하고, 바뀌어서 듣고, 바뀌어서 보고, 발자국을 떼어 놔도 딴 데를 자꾸 딛고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거와 같이 모든 거는 그렇게 해서 해결도 하지만, 그러면 이쪽에서 그것을 받아서 차차차차 잘못되는 그 자체를 잘되게끔 자꾸 연결이 돼서 잘하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야비하게 하는 사람도 마음이 야비하지 않게 되죠. 그래서 건지라는 거지, 악한 거를 버리게 되면 인과가 돼서 또 따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악과 선을 몽땅 다, 하나는 감사하게 놓고, 하나는 그냥 되돌려 놔라는 겁니다. 남이 그르다 하더라도 자기 주인공에다 들이대고 ‘너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지 않아. 그 사람도 본래 나쁜 건 아니잖아. 그러니깐 그렇게 해.’ 하고서 거기다 놨을 때에 그 사람도 마음이 변하게 되죠. 그렇게 해서 건져야죠. 그리고 그 뒤에 말 한마디 또 할 거는 뭐냐 하면, 우리가 녹음을 할 때 차례차례로 녹음을 하죠, 네? 녹음한 대로 차례차례로 먼저 한 거부터 나오죠. 그리고 나중에 한 거는 맨 끄트머리로 나오죠. 그렇듯이 여러분도 과거에서부터 녹음이 돼서 차례차례로 쌓여졌다고 할까요? 쌓여진 것이 차례차례로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차례차례로 업이 많이 쌓인 사람이 있고 적게 쌓인 사람이 있는데 그냥 “딴 사람은 그렇게 잘되는데 나는 왜 그렇게 안됩니까.” 하고 오는 사람 앞에는 아무 말 없이 “정성이 지극하면 돼.” 이렇게 하기는 하지만, 그 업이 너무 쌓여서 그게 모두 다 녹아야 되니까 나온 자리에다 되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야 앞서 입력된 게 자꾸 없어지면서 줄어들 텐데, 그래서 그게 거반거반 다 됐으면 ‘어, 이제 거반거반 다 되는구나.’ 이렇게 속으로만 말을 하죠.
그러니까 그러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빨리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그 악업들이, 모두 나쁜 고가 쌓인 것이 차례차례로 없어지는 거니까 좀 인내가 있고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고, 실천적이고 평등하고, 이해성 있고 지혜롭고 이래야만이 입력된 걸 무난히 다 폐지시킬 수가 있죠. 새로 좋은 마음으로 입력된 게 나올 시기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
질문자2(남): 대단히 감사합니다.
▲큰스님: (삼 배를 올리는 질문자에게) 삼정례(三頂禮)를 일정례(一頂禮)로 합쳐서 하나로 합해서 하면 좋아요. 이렇게 자유스러운 법이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법이거든요. 허허허….
▲질문자3(남): 큰스님, 저는 수유동에서 왔습니다. 세상에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식 치고 부모님의 병환에 대해서 근심 없는 자식은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얼마 전 저희 아버님께서 모 대학병원에서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여직껏 살아오시면서 남들을 위해서 좋은 일도 많이 하셨고 옳게 살아왔다고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에게 옳게 살기를 항상 말씀해 주셨습니다. 큰스님 말씀대로 저희 아버님께서는 육신의 집을 고치기 위해서 지금 투병을 하고 계십니다. 큰스님, 저희 모두에게, 저희 아버님에게 한마음 내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음, 그러시다면 다른 거는 하나도 안 하더라도 ‘내 깊은 마음속의 주인공 뿌리야, 너만이 네 몸뚱이의 병을 고칠 수 있어.’ 하고 그것 한마디만 관(觀)하시라고 그러세요. 그러면 꼭 접근이 될 겁니다. 통신이 돼야 됩니다. (합장을 하시며) 또 없습니까?
※위 법문은 1994년 1월 2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