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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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름이나 형상에 얽매이지 말라/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
방편에만 집착하면 알음알이 내게 돼
시비·분별 끊어질때 8만4천법문 온전

‘그 무엇’이란 법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다고 하는 불변(不變)과 중생의 인연을 따라 그때그때의 모습이 달라진다고 하는 수연(隨緣)의 뜻이 있다고 하였다. 3장에서 말한 “법에는 많은 뜻이 있다”라고 한 것은 수연의 뜻을 따랐다고 했다.
이는 변치않는 ‘그 무엇’이 중생의 인연을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선가귀감> 4장에서는 그 드러난 모습에 붙인 이름이나 형상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고 한다.
强立種種名字 或心或佛或衆生 不可守名而生解 當體便是 動念卽乖
온갖 이름을 억지로 갖다 붙여서 혹 마음이라 하고 혹 부처님이라 하며 혹 중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름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서는 안 된다.
그 밑바탕에서는 모든 것이 옳지만
한 생각 움직이면 근본 뜻에 어긋나느니라.

<선가귀감> 1장에서 “여기에 ‘그 무엇’이 있는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3장에서는 중생의 인연을 따라서 ‘그 무엇’이 그때그때의 모습으로 달라진다고 한다.
이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임시방편으로 온갖 이름을 ‘그 무엇’에 갖다 붙여 설명하기도 한다. 유식(唯識)에서는 ‘마음’이라 하고, 반야부(般若部)에서는 ‘공(空)’이라고 하며, 정토종에서는 ‘극락세계’라고 한다. ‘그 무엇’을 ‘깨달음’이라 하고, 이것을 깨친 사람을 우리는 부처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기신론>에서는 ‘그 무엇’이란 법에 중생심(衆生心)이라고 하여 ‘중생’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 무엇’에 ‘마음’ ‘부처님’ ‘중생’ ‘공(空)’ ‘깨달음’이란 이름들을 갖다 붙여 설명하는 것은 중·하근기 중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임시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쓰신 방법들이다.
팔만사천법문은 이런 임시방편의 가르침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늘 중생의 근기에 따라 ‘그 무엇’에 바탕을 두고서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공(空)’을 이야기하며 ‘극락 세계’를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조주 스님은 말씀하신다.
若依根說法 自有三乘十二分敎
我這裏 只以本分事接人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하자면 온갖 법이 있게 된다.
나는 이 자리에서 다만 본분사(本分事)로써 사람을 대할 뿐이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온갖 법’은 곧 팔만사천법문을 말하고 ‘본분사(本分事)’는 ‘그 무엇’을 말한다. 알고 보면 팔만사천법문의 그 밑바탕이 같은 것인데도 어리석은 중생들은 ‘마음’과 ‘공(空)’과 ‘극락세계’로 달라진 표현에만 집착한다.
그것이 ‘그 무엇’에 다가가기 위한 임시 방편인줄 모르고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라고 착각한다. 그리하여 방편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게 된다. 근본을 모르고 곁가지에 집착하여 그것이 부처님의 옳은 법이라고 시비하고 분별하게 된다.
선종에서는 부처님의 근본을 몰라서 곁가지에만 집착하고 시비와 분별을 일삼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시비와 분별이 바로 번뇌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조사스님들은 중생의 이런 잘못들을 바로 보시기에 단숨에 이를 고쳐 주고자 한다. 그래서 ‘그 무엇’에 임시방편으로 갖다 붙인 이름이나 허상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그 근본 바탕을 보라고 한다.
근본과 하나가 되어 대상경계로서의 근본이 사라지고 내가 사라질 때 주객이 사라지고 모든 시비와 분별이 끊어진다. 시비와 분별이 끊어진 마음에서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드러나고 팔만사천 법문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된다. 시비와 분별이 사라진 조사스님의 마음 그 당체(當體) 그 밑바탕에서는 세상의 모든 법이 부처님 법으로서 같아진다.
조사스님이 부처님이 되고 부처님이 조사스님이 된다. 이 자리에서는 모든 법을 드러내거나 없앨 수도 있고 모든 법을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도 있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그 무엇’에 억지로 ‘마음’ ‘부처님’ ‘중생’이라는 세 가지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은 교(敎)의 처지에서는 부득이한 일이었고, 이름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지 마라는 것은 선(禪)의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온갖 법을 마음대로 살리고 죽이며 내세우고 거둘 수 있는 것은 모두 온갖 법의 왕이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법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이다.”
허나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 뜻을 모르고 한 생각 일으켜서 시비와 분별만 일삼는다면 바로 근본 뜻에 어긋나니,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이다. 서산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久旱逢佳雨 他鄕見故人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반가운 비요
천리타향에서 만난 옛 고향 친구로다.
2006-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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