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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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부 25강 혜능의 돈교(3): 새로운 교판(敎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승, 문자 숲에서 헤매는 사람들

혜능 포교의 특징은 자성불(自性佛)을 재창한데 있다. 성의 정통은 바로 이 토대위에 서 있다. 누가 내게 선의 핵심은 무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전폭적 신뢰’라고 답할 것이다.
자성불(自性佛), 즉 나 자신이 부처이므로, 이제 팔만대장경의 가르침들을 굳이 익힐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진리의 빛은 나 자신의 힘으로 내 속에서 찾아질 것이다. 그리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즉 “정보에 의지하지 않는, 경전 밖의 진실!”이 선의 표어가 되었다.
헌데, 이 진실에 어떻게 접근할까. 바깥의 것은 보기 쉬우나, 눈이 눈을 보지 못하듯이, 자기 속에 있는 것은 진정 보기 어렵다.

옛 부대에 새 술을
전통적 경전과 수행법들을 버렸으니, 선은 새로운 독자적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그것이 선의 얼굴과 트레이드마크가 될 것이었다.
육조 혜능은 그러나, 전통 전체를 내버리기보다, 그 오래된 부대에 단순화 직설화의 새 술을 담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나중 발전되는 선의 파격과 파천황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온건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오래되고 다양한 불교의 교학과 수련법들을 ‘마음의 즉각적 파지’ 하나로 귀착시켰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1) 경전의 문자에 끌려 다니지 말고, 핵심적 취지를 캐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평생 <법화경>을 읽어왔다는 어느 학승을 향해, “그 근본 취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법화경>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굴림 당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 차이가 소승과 대승을 가른다고 말한다. 경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과, 그 취지를 장악하는 것은 천지현격(天地懸隔), 하늘과 땅 차이이다.
2) 소승과 대승에 대해 우리는 많은 얘기를 들어왔다. 그러나 혜능은 이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한다. 혜능의 새로운 교판(敎判)에 따르면, “소승(小乘)은 아직 문자의 숲에서 헤매는 사람이고, 중승(中乘)은 문자의 취지를 대강 캐치한 사람, 그리고 대승(大乘)은 바로 그 자각에 따라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럼 최상승(最上乘)은? 그는 바로 그런 구차한 노력조차 필요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3) 불교가 개발한 다양한 수련법에 대해서도 혜능의 생각은 파격적이다. 그는 “마음은 거울이 아니므로, 어디 손댈 데가 없고, 손을 대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마음은 거울이 아니니, 어디 먼지 앉을 데가 없다!”
그는 삼학(三學)이라 하여 주어진 계율을 지키고, 특정한 명상에 몰입하며, 불교식 지혜를 터득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에 의하면 삼학이란 요컨대 “마음에 아무런 내적 외적 갈등이 없는 것, 자신의 불성이 아무런 장애 없이 스스로의 빛과 활동을 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육조단경>은 기존 불교에 대한 파격적 재정위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
4) 그는 좌선(坐禪) 또한,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고, 명상에 빠져드는 특정한 작법(作法)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아무런 외적 유혹에 이끌리지 않고, 본래의 빛을 차단하지 않도록 하는 각성의 길”이라고 돈교적으로 변용했다.

그는 이렇게 마음의 자기 각성을 유지하는 것이 불교의 길이라고 믿는다. 그밖에 다른 어떤 외적인 장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불교가 오랫동안 그린 꿈인 서방의 정토나 극락도 실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마음의 각성이 주는 안정과 축복으로 해석했다. “서방 정토는 없다. 그것은 지금 여기, 당신들의 마음 안에 있다.”
놀라는 무리들에게 그는 “어디, 한번 보여주랴”라고 농을 할 정도이다.

육조 이후의 선
혜능의 돈교는 불교의 면목을 완전히 일신했다. 이후의 선은 이 자성불(自性佛)의 강령을 바탕으로, 그동안 하찮고 불완전한 것으로 여겼던 자기 자신과 일상적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방거사의 감탄을 기억할 것이다. “이런 신비가 있나. 내가 장작을 패고 물지게를 지다니….”
돈교의 확산 진전과 더불어, 자아는 극단적으로 고양되었다. “네가 곧 부처이다”는 자연스럽게, 기존의 전통 전체를 격하하고, 급기야 창시자의 신성까지 모독하는 파천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단하(丹霞天然 739-824)는 법당의 목불을 쪼개 캠프파이어를 해 버렸다. 이 정도는 약과에 속한다. 임제(臨濟義玄 ?∼867)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권했고, 운문(雲門文偃 864∼949)은, “붓다가 태어나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다는데,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몽둥이로 때려잡아 굶주린 개에게 던져주었을 것을…”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 우상 파괴적 정신은 양날의 칼이었다. 전통과 접맥되지 않고 파격과 기행에 의존하면서, 선의 생명력은 오히려 쇠퇴하고 고갈되어갔다.
경전과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공동체의 규율을 떠나서, 순전히 자기 확신에만 의존하는 길은 위태롭고 취약하다. 이 약점은 일반적으로 입문(initiation)에 의존하는 신비주의의 역사가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이다. 여기 동서양에 예외가 없다.
선은 8세기를 지나면서 활력을 잃기 시작했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이 행해졌다. 선의 정신에 어울리지 않게, 선의 역사를 적은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선의 정당성을 변명하기 위해 새로운 계보까지 씌어졌다. 그에 의하면 달마는 인도의 법통을 28대째 이은 사람으로 등록됐고, 6조 혜능이 선종사의 정식 법통으로 낙착됐다.
이와 더불어 선은 자신들의 독창적 방법을 제도화할 필요를 느꼈고, 그 결과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간 법담을, 깨달음을 위한 명상의 도구로 삼는 간화(看話)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육조단경>과 <금강경 구결>은 같은 정신의 산물
선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봤다. 또 왜 엇길로 샜느냐 하면, <육조단경>을 <금강경 구결>과 견주어보기 위해서이다. 누구든 두 작품의 해석학적 정신이 같은 궤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니, 틀림없이 <육조단경>은 <금강경 구결>과 동일한 사람의 손으로 지어졌다.
<육조단경>이 기존의 전통적 불교를 돈교적 이념에 따라 파격적으로 재정위한 것들로 점철되어 있듯이, <금강경 구결> 또한 금강경의 본래 맥락에 충실하지 않고, 자성불(自性佛)을 중심으로 한 자유롭고 파격적인 변주로 이어 나간 것을 보라.
저번 강의에서 <구결>이 호념(護念)을 “바깥의 여래(如來)가 아니라 자성여래(自性如來)가 자선호념(自善護念)할 뿐”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거기서 부촉(付囑) 또한 “저 밖의 여래의 약속이 아니라, 청정(淸淨)한 생각들이 이어져 나가도록(付囑)” 하는 노력이라고 탈 맥락적으로, 그러나 공부에는 절실하게 해석해 나간 것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2006-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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