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 중생 근기따라 법 설할 수 있어 8만4천법문 자신 바로보는 지혜 길러줘
부처님의 세상이요 깨달음인 ‘그 무엇’에 대하여 근본 자리에서는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도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고 하였다. 체험을 통하여 ‘그 무엇’을 바로 알고 직접 깨치고자 하는 것이 선(禪)이다. 다시 말해 먼 길로 돌아가지 않고 화두로써 직접 단숨에 깨치고자 하는 것이 간화선(看話禪)이다.
그러나 이 공부는 아주 뛰어난 역량이 있어야만 한다. 전생에 해 놓은 공부가 많든지, 금생에 죽어라 공부하여 깨달음의 문턱까지 가 있든지 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단숨에 깨달아서 단숨에 수행을 끝내는 이런 공부를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역량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글이나 말을 방편으로 써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선가귀감> 3장에서는 말한다.
然法有多義 人有多機 不妨施設
그러나 법에는 많은 뜻이 있고 사람의 근기에는 많은 차별이 있으니 여기에 맞추어서 방편을 쓸 수도 있다.
여기서 ‘법’이란 앞서 말한 ‘그 무엇’으로서 곧 깨달음의 자리이다. 법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불변(不變)’의 뜻과 인연을 따라 그때그때의 모습이 달라지는 ‘수연(隨緣)’의 뜻이 있다. “법에는 많은 뜻이 있다”라고 한 것은 수연의 뜻을 따른 것이다. 변치 않는 ‘그 무엇’이 중생의 인연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불변과 수연은 바닷물과 파도
이것은 바닷물과 파도에 비유해 볼 수 있다. 바닷물이 여러 가지 모습의 파도로 나타나지만 바닷물 자체의 성질이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닷물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것은 불변의 ‘그 무엇’에 해당되고 여러 가지 파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인연을 따라 그때그때의 모습이 달라지는 수연에 해당된다.
바닷물이 있어야 파도가 있고 파도의 실체는 바닷물이기에 바닷물이 파도이고 파도가 바닷물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불변이 수연이 되고 수연이 불변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반야심경>에서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과도 그 의미가 같다.
사람들에게는 근본을 단숨에 깨칠 수 있는 돈오(頓悟)의 근기도 있고, 공부를 점차 닦아 나가야만 하는 점수(漸修)의 근기도 있다. 상근기에게는 돈오할 수 있는 법의 근본 자리를 바로 가리켜서 깨달음으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
화두선(話頭禪)은 화두를 통해서 이 자리에 바로 들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점수에 해당하는 중·하근기 사람에게는 이 방법이 통하지를 않는다. 그들은 근기에 맞추어서 법을 설해 주어야 조금 알아듣는다.
이 근기에 맞추어 법을 설해 주는 것이, 인연 따라 나타나는 법이 그때그때 달라진다고 하는 수연(隨緣)에 해당된다.
법에는 수연의 뜻이 있기에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글이나 말을 방편으로 쓰게 되는 것이다. 옛말에 “공(公)의 자리에서는 바늘 끝만큼도 잘못을 용납할 수 없지만, 사(私)의 처지에서는 큰 수레도 오고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근본을 드러내는 불변(不變)의 자리에서는 언어 문자가 가지는 허술한 틈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상계를 드러내는 수연(隨緣)의 처지에서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얼마든지 법을 설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팔만사천 법문이 있게 되는 것이다.
팔만사천 법문은 부처님의 자비
중생은 본디 오롯하게 완성되어 있다고 한다. 다만 눈 밝은 지혜가 없으므로 윤회를 한다. 세간을 초월하는 번뜩이는 지혜가 없으니 그들의 두텁고 어두운 장막을 어떻게 걷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부처님은 팔만사천 법문을 통하여 중생들에게 자신의 삶을 바로 보는 지혜를 키워주고 길러 주시려 한다. 중생은 자비로운 부처님의 큰 은혜를 입어야 비로소 괴로운 사바세계를 벗어나 행복이 가득한 부처님의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된다.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입게 된 은혜는 우리가 갠지스강 모래알만큼 많은 목숨을 바친다 해도 그 만분의 일도 갚기 어려울 만큼 크다.
서산 스님은 “이 단락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로 공부해야 할 것을 드러내 보이고,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자 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 기쁨을 게송으로 말한다.
王登寶殿 野老謳歌
임금님이 높은 용상에 오르시니
촌 늙은이 흥얼흥얼 노래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