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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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좀 툭 틔어놓고 편안하게 사세요!
마음 하나 점프해서 돌리는 데 모든 게 달려있어

꼭 알아 둬야 할 게 있다면


새해를 맞이하여 재발심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올리겠습니다. 인간의 몸을 받아 가지고 부처님 제자로서 살아가면서 꼭 이것만큼은 알아 둬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겠는지요.

세세한 인간 사회와 생활 속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지만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꼭 알아 둬야 할 문제는 바로 마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상대가 없고 세상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을, 여러분이 각자 태어났기 때문에 이 세상이 벌어졌고 바로 상대가 생겼고 고통이 생긴 거죠. 여러분이 과거에 살던 생활 속에서 선업이든 악업이든 인과로써 업보를 짊어지고 이 세상에 출현했습니다. 불가에서 오신통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 가운데 바로 숙명통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숙명통을 우리가 깨달아 과거를 전부 알아도 도가 아니라고 했지만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데, 여러분 그 마음 가운데 숙명통은 컴퓨터와 같은 겁니다. 여러분이 사는 대로 이 세상을 걸어가면서 지은, 아는 그 모두가 거기에 자동적으로 입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입력이 된 그 자체가 현실로 나오는 거고 지금 사는 것이 미래로 나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내가 지금 여러분한테 이렇게 말씀드리면서 또 마음으로 전달을 하고 통신을 하면서 이끌어 가는 것은, 이 세상에 시발점도 종점도 없이 끝없는 이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길잡이로서 바로 그 도리를 일러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몸 바꾸기 전에 그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세세생생에 끄달리면서 인과성이라든가 또는 유전성이라든가 세균성이라든가 또는 영계성이라든가 하는 그 모든 죄업이, 즉 말하자면 고(苦) 덩어리가 해소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반드시 나온 자리에다 다시 되입력을 할 수 있는 그 마음, 그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카세트에 입력을 해 놨다가 노래를 불렀다고 합시다. 그게 만약에 죄업이라면 거기에 다시 죄 없는 마음을 입력을 해 놓는다면 그 앞서 입력된 건 다 소멸됩니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죄 붙을 자리도 없고 병 붙을 자리도 없고 업보가 붙을 자리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관습 때문에, 습관 때문에 그것을 떼 놓지 못하고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안 되지 저렇게 하는 것이 안 되지, 이렇게 하는 것은 잘될 거다.’ 이러고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사량으로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습입니다.
우리가 인생 항로를 걸어갈 때 여러분이 꼭 알아 둬야 할 것이 자기로부터 이 세상이 생겼다는 겁니다, 자기로부터. 그리고 자기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름을 믿는다든지 고상을 걸어 놓고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또는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이시여! 칠성님이시여! 독성님이시여! 신중님이시여!’ 하고 온통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 한 군데만 안 놔도 ‘아이구, 이거 저기 안 놔서 우리 아들이 잘못되면 어떡하고 우리 남편이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그런 마음의 그 습관을 가지게 되는데, 그게 습입니다. 그러한 습관에 의해서 ‘이러면 안 되지, 이러면 되지’ 하는 그 걸림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밀고 나갈 수가 없는 거죠. ‘아이구,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게 정말 될까, 안 될까?’ 이러니까 그것이 활이 제대로 쏘아지질 않는 겁니다.
밝고 밝은 이 세상에서, 지금 인공위성이 오르고 또는 전파를 통해서 전 세계를 두루 하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 줄 모르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이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인공위성보다도 더 위대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빛보다 더 빠르다고 생각은 안 드십니까?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빠르고, 한생각이 중요하고 보배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다 줘도 바꿀 수 없는 보배라는 걸 여러분은 스스로가 느끼셔야 합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요. 만약에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고 뚜껑을 닫아 놨다가 열어 보면 여름에 그냥 생명들이 우루루루 나옵니다. 그와 같이 보이지 않는 데선 한생각이 그렇게 원자에서 입자가 그렇게 많이, 그 입자에서 분자가 그렇게 많이 화해서 이 세상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부처님의 눈도 부처님의 손도 부처님의 이름도, 부처님은 그렇게 아니 계신 데가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또한 죽은 세상에나 산 세상에나,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또 생각이 없는 사람이나 생각이 있는 사람이나 다 건져 주시는 그 자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 삼라대천세계는 조화를 이루고 바로 불바퀴가 더하고 덜함도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그렇게 놓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돌아가는 진리의 뜻을 그대로 믿고 그것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실천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수박 맛을 보고 싶은데…


스님,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진짜 알맹이를 알지 못하고 쳇바퀴 돌듯 그 자리만을 뱅글뱅글 돌고만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에는 허망한 껍데기에 끄달리지 않고 수박을 쪼개서 수박 맛을 정말 보고 싶습니다.

우리 마음들이 계발이 되고 달라져야 세계도 달라지고 모두가 달라집니다. 우리 마음이 밝아지지 못하다면 영원히 쳇바퀴 돌듯 돌아갈 겁니다. 그리고 부족한 게 생기고요. 만약에 지구의 모든 재료가 부족하게 된다든가 태양계에 어떠한 팽창력으로 인해서 열이 생긴다든가 타 버린다든가 또는 은하계에 어떠한 문제가 생겨서 별성이 껍데기를 벗고 활력을 띠지 못한다면 우리에 직결된 이 마음부터 벌써 잘못돼 돌아가는 겁니다. 염주알 돌아가듯, 우주가 지금 한 염주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빈약하게 그냥 그렇게 생각을 하고 기복으로만 나가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꽃 한 송이를 생각해도 바로 네 뿌리 내 뿌리가 둘이 아니요, 이 마음에 천만 개의 마음을 한데 합쳐도 둘이 아니어서 내 주인공에, 직접 네 꽃 한 송이를 내 꽃 한 송이에 바로 갖다 놓는 것입니다. 저 부처님 형상도 여러분의 형상과 둘이 아니요, 부처님의 마음도 여러분의 마음과 둘이 아니요, 부처님의 생명도 여러분의 생명과 둘이 아닙니다. 이런 컵도 지수화풍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 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했습니다. 출현했다면 그 이름과 여러분의 이름과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광대무변한 법을 이렇게 가르쳐주시고 길을 인도하시면서 ‘과거심·현재심·미래심이 둘이 아니니라. 과거·현재·미래가 둘이 아니니라. 너희 마음먹기에 달렸느니라. 너희가 악한 마음을 쓰면 악한 일을 하고 악한 행을 하면 악업을 짓는 것이고,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고 좋은 생각을 한다면 바로 선업을 짓는 것이니라. 그러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느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바로 개선해야 할 문제를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뿌리를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쥘 수 없고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여러분의 뿌리, 그 불씨! 내가 나오기 이전의 바로 내 씨가 있다더라 하고 일러 주셨는데도 바깥으로 휘휘 전부 찾아요. 바깥으로 휘휘 둘러 찾거든요. ‘아휴, 부처님! 나 좀 깨닫게 해 주십시오.’ 과거에 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야단법석이지요.
그러나 수박에 비유해 봅시다. 수박씨를 작년에 받았으면 바로 올해 심죠? 심어서 수박 싹이 났습니다. 여러분이 수박 싹이라고 봅시다. 그러면 수박이 벌써 모두 열렸습니다. 그래서 수박 속에 단맛이 나고 씨가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랬는데 여러분이 수박씨를 어디 가서 찾아야 되겠습니까? 과거의 씨는 현실로 나왔는데, 작년 씨를 올봄에 심어서 싹이 돼서 열매가 열려서 지금 수박이 데롱데롱 매달려 있는데 말입니다, 그 수박씨를 어디 가서 찾아야 되겠습니까? 지금 현실의 수박 싹에, 수박 열린 거기서 찾아야지요? 그 씨는 벌써 화해서 싹이 돼 버렸으니까요. 그런데 어디 가서 부처님을 찾습니까? 나로부터 부처님이 계신 겁니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은 그렇다는 사실을, 그런 길을 인도해 주시는 방편의 부처님이십니다.
그러니 제일 급한 것은, 여러분이 지금 내 안에 수박이 있고, 수박 맛을 봐야 내 씨를 내가 찾는다고 봅니다. 수박 맛을 보지 않고는 수박 속의 씨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하나, 내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거기에다 맡겨 놓고 관찰해서 지켜보는 그 자체가 참선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체험하는 것이 참선의 기초적인 문을 찾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그거를 실험해서 체험하는 것이 수박 맛을 보는 거나 한가지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정도 유유하게 되고 애고도 없어지고 병고도 없어지고 업식이, 유전성이, 영계성이 소멸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 마음의 지혜는 세세생생에 갈 겁니다. 왜냐하면 금은 금방에 갈 것이고 넝마는 넝마전에 갈 것이니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사람의 차원에 따라서 세세생생에 자동적으로 끼리끼리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아픔이 내 아픔이라고 생각하고 모두가 나 아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평등공법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나 아님이 없이 응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없어서 공부를 못한다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여유가 없으나 있으나 마찬가집니다. 일할 때나 누워서나 앉아서나 서서나 뭐, 그건 자유에 맡깁니다.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거기다가 맡겨 놓는 것. 자기 앞에 닥친 문제를 바로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 거기서만이 낫게 할 수 있다. 거기서만이 이끌어갈 수 있다. 거기서만이 모든 애고를 없애 줄 수 있다.’ 하고 모든 것을 거기다 맡기고 가시되, 조용하게 집에 앉아서 하거나 시간이 나서 절에 와서 하실 때나 관하는 법은 꼭 잊지 마십시오. 항상 그렇게 관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대로 행선이자 그대로 참선입니다.

이생에 받는 선업과 악업!


우리가 지은 선업과 악업대로 지금 이 생을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곧 지금 우리들이 행하고 있는 이 선업과 악업이 다음 생에까지 연결된다는 그런 말씀이신 것 같은데 그게 과연 사실인지 궁금합니다.

어저께 누구 따귀를 때렸는데 맞은 그 사람이 이를 북북 갈고 있다가 그 이튿날 와서 아주 작살나게 팼더랍니다. 그것도 바로 과거에 지은 것대로 현실에 받은 것입니다. 그런 거와 같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에 받고 현실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미래에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도 오늘이요, 미래도 오늘입니다. 연방 연방 오늘입니다. 그러니까 알고 지은 것은 알고 받게 마련이고 모르고 지은 것은 모르고 받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하면, 전에는 팔자 운명이 주어져 있었는데 공부를 하면서 모든 악업 선업을 다 거기다가 놓는다면, 악업을 선업으로 돌리는 것도 거기서만이 할 수 있다는 그 믿음에 의해서 오간지옥이 무너진다 이 소립니다. 오간지옥이 무너지고 유전성이나 영계성이나 업보성이나 세균성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무너진다 하는 것은 바로 컴퓨터에 입력이 됐던 것이 새 거를 자꾸 넣으니까 앞서 넣었던 것이 다 없어진다 이겁니다. 앞서 넣었던 것이 다 없어지고 새로 들어간 것이 자꾸 입력이 돼서 자꾸자꾸 나오는 겁니다. 그래 나오는 대로 또 놓으니까 앞서 새 거라고 어저께 넣은 것이 또 다 없어지고, 현실에 생각하는 대로 넣고 그러니까 그릇에 잔뜩 담겨 있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새 그릇에 새 거를 자꾸자꾸 넣을 수 있는 거죠. 잘된 거든 못된 거든 그렇게 잔뜩 넣어 놓은 데다가는 아무리 좋은 게 닥쳐도 넣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모든 거를 녹여라 이겁니다.
업이 본래 붙을 자리도 없는데 모두 붙어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붙어서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그대로. 여러분이 그 관습에 의해서 붙어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붙어 있는 거지, 붙어 있다고 생각을 안 하는데 어떻게 붙어 있겠습니까. 꿈을 꾸고도 ‘아이구, 인제 죽었다. 이게 살 꿈이 아니고 이게 다 무너질 꿈이야.’ 이런다고요. 그러면 그렇게 무너질 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너져요! 그러나 무너지는 걸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래, 업이 다 무너져서 다 없어지는구나.’ 이렇게 바꿔서 한번 생각을 해 볼 수 없느냐 이 소립니다. 좋게 생각을 하면 좋게 현실로 나올 것이고 언짢게 생각을 하면 언짢게 현실로 나와요. 꿈이 생시고 생시가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헌 쇠든지 새 쇠든지 쪼가리든지 간에 그냥 재생처로 들어가는 데는, 업을 녹이는 데는 어떠한 물건으로 돼 있다가 그냥 그 용광로에 넣기만 하면, 용광로에 넣는 작업만 하면 재생이 돼 나가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겁니다. 그냥 용광로에 들어가면 녹아서 재생이 돼서 나오니까요. 그러면 그 쇠를 주문이 오는 대로 그냥 찍어서 또 내보내죠. 만약에 목걸이라든가 반지라든가 좀 끼고 다니다가 찌그러지거나 또 돈이 없거나 그러면 금방으로 가지요. 금방으로 가지 넝마전으로 가진 않죠. 금방으로 가면 금방에서는 목걸이 했던 것을 녹여서 다시 목걸이로 만들 수 있고, 팔찌로도 할 수 있고, 별 걸로 다 나가요. 그러니깐 자꾸 바뀌어서 나가는 겁니다.
마음은 저 달나라에도 지금 한 찰나에 갈 수 있고, 한 찰나에 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이라는 것은 광대하기 그지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행기 프로펠러가 돌아가듯이 우리가 살아나가는 이 수레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으니 거기는 먼지 앉을 자리도 없을 거고 고가 있을 자리도 없을 거고, 그러니 죄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 하나 점프해서 돌리는 데에 모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돈을 어떻게 벌고 써야 하는지


진리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고 하지만 어렵기만 하던 한해를 지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스님, 송구영신이라고 하던가요. 모든 것을 다 나온 그 자리에 내려놓고 새롭게 몸과 마음이 태어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루하루를 새롭게 걸림 없이 살아갈 수 있을는지요. 그리고 어려운 이 시대에 어떠한 마음으로 돈을 벌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요?

여러분이 생활해 보시지만 회사에 가면 회장이 있고 사장이 있고 직원이 있듯이 우리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있음으로써 우리가 말도 할 수 있고 생각도 할 수 있고 움죽거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움죽거리는 것은 무엇이 움죽거리고 있나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살던 인연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아버지 어머니의 정자 난자에서 배출된 그 몸이라고 하지만 여러분 몸속에는 바로 여러분이 과거에 살던 인과로 인해서 뭉쳐진, 간단히 따진다고 하더라도 16억, 10억이나 13억이나 이렇다고 봅시다. 그러나 그 모습 속에 또 생명이 있으니 그건 헤아릴 수도 없는 문제죠.
그러나 마음은 체가 없어서 의식 하나가 생각하는 데도 천백억화신으로서 화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잠깐 생각을 해 봐도 우리 몸뚱이 속에 생명들이 운행을 해 주니까 지금 이렇게 내가 산다고 하시죠? 그리고 또 내가 이렇게 잘했다고 하고. 천년만년 살듯이 말입니다. 남이 그랬으면 남이 망하게 해 줬다고 하고 남의 탓 하고 남을 원망하고, 한 식구도 부드럽게 하지 못하고 항상 악의적인 말이 나가고 이렇게 하시는데, 우리가 자식을 기르나 부모를 모시나 사대 성인들이 가르쳐 주신 것은 자비한 마음, 즉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내 몸, 내 아픔과 같이 생각하고 내 생명같이 생각해서 모두 내 탓으로 돌리고 바로 한마음, 지금 내면에 여러 의식들이 있는 그 자체를 한마음으로 생각하고, 그 줏대를 바로 주인공으로 생각해서 ‘한마음 주인공만이 이렇게 이끌어 줄 수 있고, 가정을 이끌어 줄 수 있고 자식을 이끌어 줄 수 있다.’ 하고, 속이 상하더라도 거기다 한번 맡겨 놓고서 부드러운 말로 또는 웃는 얼굴로 대하며 한 가정에 조화를 이룬다면, 화목하고 너무나 복이 들어오고 또는 공덕도 받을 수 있고 아주 화합도 되고 그럴 것입니다. 또 돈도 웃는 얼굴에 들어오지 그냥 악의적으로 나가는 데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좀 어리석은 게 있어요. 뭐냐하면 회사를 운영하거나 장사를 할 때, 사람이 안 온다 온다 뭐 이런 문제들, 뭐 이(利)가 부진하다 이런 문제들이 생길 때, 이런 공부를 하고 부처님을 믿으면서 내가 어떻게 이익을 취할 수 있을까 이러는데, 그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든 거를 진짜로 믿는다면, 진짜로 믿는다면 고꾸라지든지 가든지 오든지 그런 걸 상관 안 하고 거기다 턱 맡기고 간다면 그냥 진짜로 아무 괴로움이 없어요. 돈이 많이 벌려도 걸림이 없고요, 돈이 안 벌려도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거기다 놓기 때문에 괴로운 게 없어요. 그런데 믿지 못하는 까닭에 그렇게 괴롭고 힘들지 않을까요?
모든 도리를 간단히 생각하세요. 돈을 수억을 번다 하더라도 걸림이 없어야 돼요. 왜냐하면 그것도 자기 혼자 갖는 게 아니잖아요. 혼자 번 것도 아니고, 혼자 가질 것도 아니고, 혼자 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거기 걸려요? 내가 이렇게 많이 버니까 내가 또 많이 번다고 하는 ‘내가’라는 생각이, 나를 내세우는 게 있기 때문에 그게 걸리는 거지, 한마음이라는 주인공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가 많은데, 일체가 다 나 아님이 없는데 구태여 왜 거기 걸립니까? 그러니까 선지식들은 개구리 하나를 죽여도 죽인 사이가 없고, 깨치지 못한 자는 개구리 하나를 죽여도 살생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거는 여러분이 여러분 마음을 증득해야 알아져요. 그러니까 열심히 무조건 믿고 거기 맡겨 놓고 지켜보시고 그러세요. 그리고 거기에 걸림이 없어야 됩니다. 몇만 냥을 벌더라도 또 욕심을 내서 ‘저걸 벌어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이 나도 당신 혼자 그런 생각이 난 게 아니에요. 수십억의 의식들이 한데 모여서 그렇게 생각을 한 거지요. 그러니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돈이라고 그러는 것은 돈도 아니고 종이도 아닙니다. 그리고 돈을 자기가 벌었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써도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써야 하느냐. 자기를 자기답게 만들기 위해서 쓰는 겁니다. 그러니깐 잘 써야지 못 쓰면 자기가 망한다 이거예요. 그걸 가지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돈을 쫓아가면 돈이 달아나가죠. 스스로 자동적으로 돈이 오게 하고 자동적으로 선의적으로 되게 하는 것이 바로 50%의 무의 세계를 우리가 사용하는 겁니다. 50%의 무의 세계와 유의 세계 50%를 같이 쥐고서 우리가 중용을 한다면 여러분의 가정에 꽃이 필겁니다. 여러분이 삶의 보람을 느끼며, 또는 부처님께서 49년 설해 주신 그 뜻을 당당하게 떳떳하게 아실 겁니다. 그리고 진정한 불제자라고 하실 겁니다.
만약에 그 도리를 모른다면, 즉 말하자면 부처님께서는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지 않으면서도 전달을 했고 이렇게 3000년 후 오늘까지도 바로 하나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둘이 아닌 도리를 배우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그러한 도리도 배울 거지만 바로 무심 축지법도 배울 수 있는 것이고 원자에서 입자가, 입자에서 바로 분자가 화해서 이 세상을 두루 하면서도 세 가지로 나누어서 통신하고 결정하고 들이고 내는 작업을 함으로써 내 몸속의 의식들이 나가서 내 보호를 해 준다는 그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혹성뿐만 아니라 저 지구나 어떠한 혹성에도 다 그렇습니다. 지구에 주인들이 살기 때문이고 생명들이 살기 때문이죠. 우리가 이 뜻을 모르고야 어찌 부처님 제자라고 하며 어떻게 불제자라고 하겠습니까.
또 한 가지는, 여러분이 살면서 겪는 가난과 병고와 우환을 생각할 때 기가 막힌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거를 자기 자신들이 재료로 삼아서 실험하고 체험한다면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발견을 해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또 시공을 초월한 이 진리를 알고 그것을 초월했으면 바로 나툼을 알기 위해서 또 한 군데로 모으고 맡기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 생활속에서 열심히 할 수 있는 그런 도리를 배우기 위해서 게을리 생각하지 마시고 꼭 실천하여 아셔야 합니다.

욕망과 야망을 충족시키려면


스님께서는 전부 다 놓으라고 그러시는데요,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사람이 자기가 목표로 하는 어느 지점에 도착하면 그 다음 야망이 생깁니다. 그게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더 올라가고 싶고 그 위에 닿으면 또 야망이 있고, 그 야망을 향해서 그렇게 자꾸 가려면 자기를 놓지를 못하잖아요. 그렇듯 끊임없는 야망으로 인해서 삶의 행복도 불행도 느끼면서 사는 것 같은데 자기 안의 욕망과 야망을 어떻게 충족하면서 살 수 있는지요?

어느 학자가 지금 질문하신 분처럼 바로 그렇게 말을 합디다. 그래서 “야망이라는 것도 그냥 놓고 가는 거다. 왜냐하면 절망이라는 것도 없고 야망이라는 것도 없다. 나무 하나 한 발 디뎌 올려놓으면 뒤쫓아서 또 올라옵니다. 그렇게 인간의 모습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뒤에서 받히는 것 때문에 떨어져 버리고 말죠. 그런데 야망은 가져서 뭘 합니까? 그렇게 떨어질 것을.” 그래서 떨어지는 그 자체가 자기가 떨어져서 죽기 위해서 그냥 올라가는 거지, 그게 살기 위해서 올라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지금 생활하면서 그냥 놓고 가고 있잖아요. 아니, 본 거 고대로만 보고 있었소? 들은 거 고대로만 듣고 가만히 있었소? 또 가는 것도 한 군데만 갑니까? 말 갈 데 소 갈 데 다 가죠? 가고 싶을 때 다 갑니다. 또 누구를 만나는 것도 그래요. 한 사람만 만나나요? 요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고 그러죠? 그러니까 놓고 가는 겁니다, 그냥. 공했다 이겁니다, 그래서. 24시간 사는 게 그냥 연방 놓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되놓고 가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사는 게 놓고 가는 건 줄 모르기 때문에 또 놓고 가라고 그런 소리가 되나오는 거예요.
아니 글쎄, 부처님께서 49년, 아니 49년이 아니지. 49년 하면 벌써요, 이 세상 전체, 또 과거 현재 미래, 이건 헤아릴 수가 없이 말씀하셨다는 얘기고, 헤아릴 수 없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한마디도 한 사이가 없느니라 한 겁니다. 지금까지도 하고 가십니다. 아 그런데 글쎄 그냥, 그렇다고 놓고 가는 게 죄가 되는 게 아니라 생각 자체를 잘못해 가지고 자기가 지금, 블랙홀이라는 게 그냥 막 돌아가는데, 우리의 불성 자체가 그냥 같이 막 돌아가는데, 자기 마음이 그냥 괜히 ‘나는 놓지 못해. 이거는 안 돼.’ 뭐 이렇게 하기 때문에 창살 없는 감옥이 돼 버리고 말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몸에 좋게, 가정에 좋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좀 놓고 사세요. 놓고 사는 것이 원칙입니다. ‘아하, 내가 지금 말하고 돌아서니까 또 놔졌구나. 내가 또 이 길로 갔다가 이 길로 오니까 또 놔졌구나. 내가 아무리 먼 데를 가고 오고 이랬지마는 그 발자취를 걸머지고 다니는 게 하나도 없구나.’ 내가 지금 금방 남편을 만났는데 또 금방 아들을 만나니까 ‘아이구, 남편 만난 사이가 벌써 없구나.’ 자식을 만났으니 말입니다. 그러다 또 금방 다른 사람을 만나면 ‘아이구, 자식 만난 사이가 벌써 지나갔구나. 그러니 놓고 가야지.’ 아, 이렇게 좀 생각해 보실 여유를 가지세요. 그리고 마음을 좀 푹 틔어 놓고 편안하게 사시구요.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좀 그렇게 편히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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