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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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부 24강 혜능의 돈교(2) : <금강경 구결>과 <육조단경>/한국학중앙연구원
돈교, “번뇌가 곧 깨달음!”

선은 이를테면 불교의 사춘기적 각성에 해당한다. “밥 먹고 학교 가라는 엄마의 말이 지겨워질 때쯤” 사춘기가 찾아온다는 어느 여중생의 말처럼, 불교가 오랜 세월 온축해온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이 갑갑해질 때쯤, 선이 태동되었다.
선은 정통 불교에서 보면 문제아들의 반란에 해당한다. 그들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교과서를 내팽개치고, 직지인심(直旨人心)을 외치며, 학교를 떠나 삶의 현장과 대면하겠다고 선언했다. 고의적인 기행과 우상파괴, 의미를 따라잡기 힘든 ‘선문답’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은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다.
선의 복음을 보여주는 대표구 하나를 인용한다.

돈황본 <육조단경>의 일절
(40) 志誠(城)聞法, 言下便悟, 卽契本心. 起立卽禮拜. 自言, 和尙, 弟子從玉泉寺來. 秀師處不得(德)契悟, 聞和尙說, 便契本心. 和尙慈悲, 願當敎(散)示. 惠能大師曰, 汝從彼(被)來, 應是細作. 志誠曰, 未說時卽是, 說[及]了不(卽)是. 六祖言, 煩惱卽是菩提, 亦復如是.
(41) 大師謂志誠曰, 吾聞汝(與)禪師敎人, 唯傳戒定慧, 汝(與)和尙敎人戒定慧如何, 當爲吾說. 志誠(城)曰, 秀和尙言戒定慧, 諸惡不作名爲戒, 諸善奉行名爲惠, 自淨其意名爲定. 此卽名爲戒定惠. 彼作如是說, 不知和尙所見如何. 惠能和尙答曰, 此說不可思議, 惠能所見又別. 志誠(城)問, 何以別. 惠能答曰, 見有遲疾. 志誠(城)請和尙說所見戒定惠. 大師言, [如]汝聽吾(悟)說. 看吾(悟)所見處, 心地無[疑]非自性(姓)戒, 心地無亂是自性(姓)定, 心地無癡自性(姓)[是]惠.
읽기 쉽게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성이 벌떡 일어나 절을 올리며 말했다. “저는 옥천사에서 왔습니다. 신수(神秀) 스님 밑에서 안개 속을 헤매다가, 오늘 스님의 법문을 듣고, 제 마음의 비밀을 엿보았습니다.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혜능(慧能)이 말했다. “신수가 보냈다니, 너는 필시 스파이로구나.” “사실을 숨겼을 때야 스파이겠지만, 털어놓았으니 이젠 아닙니다.” 혜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는 이치도 그와 같다.”
혜능(慧能)이 지성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듣자니 신수(神秀)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만 가르친다는데,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더냐.” “제발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을 찾아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속의 불순한 의지를 지속적으로 정화해 나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계, 정, 혜 삼학을 수행하는 길이라고요.” 혜능이 말했다. “훌륭하다!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것과는 좀 다르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점진적 단계적이라면 나는 즉각적이며 초월적 방법을 제시한다. 나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마음에 아무런 인위나 거짓이 없도록, 마음에 아무런 혼란이 없도록, 그리하여 마음 바탕에 어떤 무지의 구름도 끼지 않도록 하라고만 가르친다. 누구나 자기 안에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빛을 갖고 있다. 다만 그것을 발휘하기만 하면 그뿐, 달리 별도의 수행체계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돈황본(敦煌本) 육조단경> 40-41)

<돈황본 육조단경>과 선의 정통 시비
20세기 초 돈황에서 발견된 풍부한 자료는 선종사 연구에 획기적 전기를 가져왔다. 선의 역사는 이 발굴로 하여 다시 써야 한다고까지 할 정도였다. 가장 첨예한 논제는 남종(南宗)과 북종(北宗) 사이의 정통성 시비이다.
7세기 중엽, 신비주의에 경도한 측천무후는 불교를 파격적으로 옹호했고, 이와 더불어 동산(東山)에서 큰 5조 홍인의 제자들이 중앙으로 진출했다.
신수의 선은 무후와 귀족들의 후원과 지지에 힘입어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포교의 중심지는 달마가 주석하고 있던 숭산의 소림사였다.
그런데 이 움직임에 하택(荷澤)의 신회(神會 670-762)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732년 낙양 근처 개운사(開雲寺)의 공개토론회(無遮大會)에서, 신회는 수많은 승려와 학자들 앞에서 북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선의 정통은 남방의 혜능에게 있다. 북종은 선의 방계일 뿐이다.” 신회는 거두절미하고, 법통의 증표인 가사(옷)가 지금도 혜능의 처소인 조계(曹溪)에 현존한다고 강조했다.
신회는 여기 그치지 않고, 신회와 혜능의 선 사이에 깊은 골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차이가 선의 근본정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역설했다.
신회의 활약으로 북종은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다. 이후 선의 역사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혜능의 남종이 주도해 나가게 된다. 현행본 <육조단경>은 이 같은 파란을 거치면서 편집되고 유통되었다. 이 책이 아예 신회와 그 계열에서 정략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일찍이 중국의 근대 철학자 후쓰(胡適)는 ‘돈황의 발굴’ 이후, 선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나는 이 종파적 투쟁이 <육조단경>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는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의 해석에 동의한다.
돈교, 새 불교의 목소리
<육조단경>은 6조 혜능이 창도한 선의 기본 정신을 담고 있다. 책의 전반부는 특이하게도 그의 행적과 이력을 길고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그런데, 그 안에 선의 정신이 ‘이미’ 다 들어있다.
이 책은 편집부터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전까지 해오던 스콜라적 경문(經文) 주석이 아니라 구도의 여정과 삶의 진실을 대중강연 형식으로 풀고 있다.
그는 변방의 오랑캐인데다가 일정한 교육을 받은 바도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선의 정신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 “경전에 대한 지식도 없이 일정한 교육을 받지 않고도 불교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다!”
여기가 신수의 정신과 혜능의 정신 사이를 갈라놓았다. 선의 역사는 이것을 북종(北宗)과 남종(南宗), 혹은 점교(漸敎)와 돈교(頓敎)로 구분한다.
신수의 점교는 계율과 선정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정화시켜 가라고 권한다. 이는 <법구경(法句經)>에 나오는 불교의 가르침, 즉 “여러 악한 업을 짓지 말고 뭇 착한 일을 해 나가라. 스스로 마음을 맑게 가라앉힐지니, 이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니라(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心, 是諸佛敎)”와 같은 정신을 표명하고 있다. 신수는 이 길을 철저히 밀고나가 신비한 위광을 얻고, 이윽고 측천무후의 심복과 귀의를 얻기까지 했다.

그러나 혜능은 전혀 달리 말한다. “너 자신이 곧 부처이다!”

그동안의 불교는 저쪽 언덕에 거룩한 부처들이 있고, 이편 언덕에서 한심한 내가 그분들을 경배하고, 그분들을 닮기 위해 길고 고된 수련을 해 나가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육조의 선은 이 점교(漸敎)의 발상을 일거에 쓸어버렸다. “다시 기억해라. 네가 곧 부처이다. 너를 하찮게 보는 사람들의 혀에 속지 마라!”
이 돈교(頓敎)의 선언으로 하여 그동안 불교를 구성하고 있던 수많은 코드들이 혹은 버려지고, 혹은 전혀 다른 얼굴로 재편되었다. 위에 인용한 ‘새로운 삼학(三學) 해석’도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이다.
200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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