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가 된 형 도오선사가 예 갖추고 법 청했으나 법랍만 믿고 미진하게 답한 운암 뒤늦게 깨달아
(지난호에서 계속)운암은 형을 데리고 약산 사숙에게 가서 전후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속가의 형을 백장 선사가 보내서 왔다고 하니 약산 선사는 그의 출가를 허락했다. 행자생활을 야무지게 했을 것이다.
그 뒤 운암은 형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계를 받도록 하였다. 친히 형을 데리고 서울로 갔다. 무사히 수계식을 마치고 다시 백장산으로 함께 돌아오는 여정이 남아있었다. 절집의 ‘왕초보’인 형을 위해서 동생이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이미 형과 아우가 바뀐 상태이기도 하였다. 수계식을 했으니 법명을 ‘도오’라고 받았다. 이제 정식으로 동생인 운암이 사형이 되고 형인 도오가 사제가 되었다.
오다가 길에 앉아 쉬고 있는데 형인 도오가 동생인 운암에게 큰절을 하고는 물었다.
“나에게 의심되는 일이 있소. 물어보려고 한 것이 오래인데 그동안 짬을 내지 못했소. 오늘 다행히 기회가 있어 사형(동생)에게 묻겠는데 괜찮겠소?”
정중하게 동생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무슨 일이요?”
운암은 정색을 하고 물어오는 형 도오의 진지한 표정에 약간 긴장하면서도 법랍이 주는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되물으니 형의 물음은 의외였다.
“이 몸이 껍질을 벗어버리면 뒤에 어디서 우리 둘이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 형제가 이렇게 다시 만났는데, 이제 혹여 서로 인연이 다하게 된다면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눈물이 핑 도는’ 물음인 동시에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소식’을 묻는 법담이 어우러진 이중적인 질문이었다.
동생은 총림에서 장래의 큰스님으로서 근엄하게 법대로 한마디 하였다.
“불생불멸하는 곳에서 만나리다.”
인정은 무시하고 도심(道心)으로만 대답한다.
사실 형만한 아우가 없다. 출가야 늦었지만 소견머리야 형이 나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형으로서 동생에게 들은 대답에 뭔가 미진함을 느꼈을 것 같다. 그리고 동생의 대답 역시 뭔가 형식적인 것에 그친 느낌이 없지 않다. 형식에 국집하면 말이야 맞지만 건조해서 듣는 사람은 감동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보탐관(報探官)이란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한 마디 쏘아붙였다.
“풀밭에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누군가가 꼭 살피고 있습니다.”
“뭐라구요? 아직 이마에 벼슬아치 시절의 갓 쓴 자국이 그대로 있으니 그런 말을 하지요.”
한마디로 속물이 덜 빠진 말이란 뜻이다.
“사형은 그런 말 마시오. 불법에는 승속이 없습니다.”
“그럼 사제(도오)의 견해는 어떠시오?”
“불생불멸하는 곳도 아니요, 만나기를 구할 것도 아니외다.”
듣고 보니 형의 말이 맞았다. 법랍만 믿고 짬밥경력으로만 지나치게 승속을 나누고 법집에 치우쳐져 있는 자기를 일깨워주는 선지식이었던 것이다.
“이 몸이 껍질을 벗어버리면 뒤에 어디서 우리 둘이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불생불멸하는 곳에서 만나리다” 라는 묵은 승려의 답변보다는 “불생불멸하는 곳도 아니요, 만나기를 구할 것도 아니외다”라는 새 출가수행자의 말이 훨씬 더 근본적 살림살이에 충실하다. 그래서 이 법은 승속도 없고 노소도 없다고 했던 것이다. 법랍 높은 운암이 이제 갓 계를 받은 도오의 손을 잡으면서 형제가 아니라 도반으로서 이렇게 마무리 말을 짓고 있다.
“안목이 분명하군요. 당신(속가 형)의 안목이 그리도 뛰어나니, 같이 산으로 돌아가거든 서로 이끌어 제도하십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