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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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 누운 지율 스님을 보며 /윤제학(동화 작가)
2001년 3월 어느 날 지율 스님은 ‘산이 아파 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스님은 그 산과 그 속에 깃든 뭇 생명들과 약속을 한다. ‘지켜 주겠노라’고. 그리고 스님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섯 차례나 단식을 했고, 급기야 병상에 몸을 뉘었다.
이 상황에서 다음 질문은 대단히 잔인한 일이 될 것이다. ‘지율 스님은 과연 약속을 지켰는가?’
하지만 이 물음에 답할 사람은 지율 스님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극단적인 상황으로 지율 스님을 내몰았기 때문이다.
지율 스님의 입장을 지지하는 환경단체나 불교계조차도 천성산보다는 ‘지율 스님 살리기’에 급급했던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알량한 도덕적 방어 차원을 넘어서서 단호히 이렇게 말해야 한다.
‘스님은 약속을 지켰다’고. 우리들 마음속에 천성산이 시퍼렇게 살아있노라고.
사실 지율 스님의 문제 제기는 천성산에 국한될 사안이 아니다. 전지구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구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그 해법을 담론이나 구호가 아닌 삶의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병원으로 실려 가는 지율 스님을 보면서 눈물을 글썽이든 비난을 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엄동에 반팔 옷을 입고 그 장면을 바라보지는 말아야 한다. 자본과 개발의 관성은 그러한 도덕적 방종을 자양분으로 삼기 때문이다.
최소한 현 단계에서 소비를 멈추지 않는 한 어떤 고상한 형태의 가치도 허구가 될 수 밖에 없다.
생태 가치는 개발의 이익에 비해 비가시적이고, 거대한 시간의 사이클 속에서 발현된다. 심미적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 평등의 고공 담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AIDS조차도 인구 감소의 방책으로 반기는 과격한 인간 혐오도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결론 삼아서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지율 스님이 개발이라는 거대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동안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탐욕이라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지 않았는지를.
200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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