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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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기/장석주(시인)
생각은 짧고 몸가짐은 살뜰하지 못했으니, 나는 봄날 담밑에 모란꽃 붉은 움돋듯 청신하게, 혹은 가을날 창공에 매날듯 날렵하게 살지 못했다. 그런 어리석은 내게도 새해는 다가왔다. 아직 집 맞은편 국도엔 가등 불빛이 환하고, 오가는 자동차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집앞 얼어붙은 호수와 빈들엔 며칠 전 내린 눈이 하얗고, 엷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어 떠오르는 해는 볼 수가 없다.
적막하고 엄숙하게 한 해의 첫 아침을 맞지만 몸과 마음이 두루 건강하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어디선가 해는 떠오르고, 샘물은 퐁퐁 솟고, 새는 너울너울 날갯짓하며 남쪽을 향하고, 땅속에서 모란 작약의 뿌리들은 꽃망울을 준비하고, 구름 속에서 여름에 내릴 빗방울들은 꿈틀거리고, 올해 사랑에 빠질 젊은이들은 금빛의 시간을 꿈꾸며 지금은 단잠에 빠져 있고, 이 새벽 젖내나는 어린 것들은 제 어미 아비보다 먼저 깨어나 막 피어난 연꽃처럼 방글거릴 게다.
내 심장은 이 우주에 생동하는 기쁨에서 나오는 기운을 빨아들이며 펄럭펄럭 뛴다. 나는 주저함없이 그 무상의 기쁨들과 입 맞춘다. 오, 내 앞의 암초, 덫과 바위들이여, 실망하지 않겠노라. 그대들이 있어 나는 지치지만, 아울러 그대들이 있어 나는 살맛이 났었구나! 어둠이 빛을 불러오듯, 배고픔이 식욕의 싱싱한 기쁨을 선명하게 하듯, 나는 그대 때문에 사랑의 고통을 알게 되고, 내가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불꽃의 빛과 사랑과 충만함으로 그대를 으깨며 건너뛰며 달려 나가겠다. 기꺼이 나를 던져 나를 구하겠노라!
새해 첫날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추운 곳에서 밤을 지낸 집개들에게 뜨거운 물을 주고, 미명에 잠긴 산 능선들을 바라보며 누리의 새 기운을 호흡한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 나라엔 액운이 끼었던 묵은해는 어둠 속에 묻혔으니, 충직하고 부지런한 개의 해인 올핸 좋은 일만 많았으면 좋겠다.
혼자 기도하는 동안 머릿속에 구름 위로 불끈 해가 떠오르는 심상과, 소(沼)에 몇 백 년 웅크리고 있던 잠룡이 금비늘 번득이며 하늘로 떠오르는 심상을 그려본다.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자꾸 그려보면 실제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시작’에 축복이 함께 하길 빌고, 이 세상 모든 이들의 ‘꿈’이 울울창창 뻗어나가길 빈다. 아울러 올 한해 내 몸과 마음을 두루 다스릴 글귀로 청나라 문인 장주의 오골불가무(傲骨不可無), 오심불가유(傲心不可有)를 마음 한 귀퉁이에 새긴다. 몸을 꼿꼿이 함은 없어서는 안 되나, 마음을 오만히 함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주변에서 입엔 아첨을 달고 살고 몸은 뼈가 없는 듯 굴신(屈身)이 자유자재라 잘도 구부러지지만, 거꾸로 마음은 사뭇 뻣뻣해서 가난하고 못나 보이는 이웃을 업신여기며 제 잘난 줄만 알며 살아가는 이들을 여럿 보았다. 그 품성이 속되고 비천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그들을 거울삼고 각박과 탐욕을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보다 더욱 제 자신을 돌아보기를 자주 하여 몸은 오동나무처럼 강건하게, 마음엔 청품(淸品)과 미풍 이는 봄날과 같은 온유한 인격이 담기도록 애써야겠다.
저 잘난 줄만 믿고 앞뒤 분별없이 달려가는 자는 필경 남에게 누를 끼친다. 저를 돌아보는 분별심을 가져야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다. 기도하는 마음에서 저를 돌아보는 분별심이 솟아난다. 기도는 고독의 오롯한 숭고함 속에서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기도 중에서 기복(祈福)에의 토로를 되풀이 하는 것은 낮은 기도다. 제 삶을 웅숭깊게 하고 제 품격에 향기를 더하는 기도는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보고 옛 경전을 널리 섭렵하여 제 마음을 여미는 것과 같다. 옛사람은 하루의 계획으로 파초를 심고, 한 해의 계획으로 대나무를 심고, 십 년의 계획으로 버들을 심고, 백 년의 계획으로 소나무를 심는다고 했다.
새해 첫날의 기도는 파초, 대나무, 버들, 소나무를 한꺼번에 심는 것과 마찬가지다.
200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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