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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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2부 23강 혜능의 돈교(1): 자성여래(自性如來)의 자선호념(自善護念)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劍)

마음은 우선 죽여야 할 물건이니, 왜냐. 그것은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나무 사이를 폴짝이는 원숭이처럼 바깥 경계에 끄달려 다니기 때문이다. 혜능은 이렇게 말한다.

1. 항복
“수보리는 보았다. 우리네 중생들이 예외없이 동동 허덕대는 것을… 뿌옇게 떠다니는 마음은 갑자기 태풍처럼 일어났다 다시 염념상속(念念相續), 또 다른 마음으로 이어져 쉴 새가 없는 것을… 대체 어떻게 수행해야 이런 마음을 항복시킬 수 있겠느냐?” 須菩提見一切衆生躁擾不停, 猶如隙塵搖動之心, 起如飄風, 念念相續, 無有間歇. 問若欲修行, 如何降伏其心.
어렸을 때, 헛간 같은데서, 햇빛이 비치면, 판자들 틈으로 뿌연 먼지들이 떠다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동동거리며 천방지축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이 중생들의 삶이다. 도무지 진득한 안정감이 없는 것이다. 혜능은 선남자(善男子)란 바로 그것, 즉 평탄심(平坦心)과 정정심(正定心)을 성취한 사람이라고 썼다.
그렇다고 지레, “그럼,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가부좌 틀고 앉아 있자”라고 해서는 만만 불가하다.
사람이 어찌 몸을 움직이지 않고 살겠는가. 요동을 치는지, 안정감이 있는지는 겉으로 분주한가 한가한가와는 상관이 없다. 경허였던가, 스님 하나가 길을 가다가 소나기를 만나자, 아차 싶어 잽싸게 처마 밑으로 피했겄다. 봉창을 열고 농부 하나가 핀잔을 주었다. “거 도를 닦으신 스님네가 채신머리없이 비 정도에 이리저리 들고 뛴단 말이오.” 옷의 비를 털어내며 하늘을 보던 스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비를 피하는 것과 도(道)가 무신 상관이오.”
바쁜지 한가한지는 마음에 달려 있다. 천하의 대사를 처결하면서도 한가한 사람이 있고, 나처럼 컴퓨터 하나가 말썽이면, 아차 싶어서 한밤중에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하는 사람이 있다. “아이구, 이거 큰일이네. 파일 다 날아갔네.” 마음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여기서 저기로 휩쓸려 다닌다.
세상은 평온한데 내 마음만 공연히 바쁘고 조급하다. 안에 힘이 쏠리면 바깥은 점점 평온해진다. 그리고 돌아보면, 우리가 당시에 동동거렸던 일들이, 지나고 나면, 사소한 일이었던 것들이 적어도 태반은 넘지 않은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것들, 얻고 난 장난감들은 하루 이틀이면 방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고, 그토록 가슴 아프게 했던 사람들도 세월이 흘러가면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그 상념을 미리 당겨쓰면 현실을 대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언제 한번 마음을 쉬어 보나. 그게 어렵다. 한순간에 십만 팔천 번의 상념이 오간다. 혜능의 말마따나 마음은 염념상속(念念相續), 다시 마음으로 이어져 쉴 새(間歇) 없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 ‘뿌연 먼지’들을 가라앉히는 작업이다. 우선 마당에 찬물부터 뿌리고, 다음 이 먼지들이 어디서 오는지, 왜 이렇게 푸석거리는 구덩이를 밟은 듯, 일거에 우르르 일어나 온통 신심을 덮어버려, 뭐가 뭔지 앞이 보이게 하지 않는지, 그리고 이들을 가라 앉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차분히 짚어보아야 한다.

2. 호념
이 뿌연 마음들을 어떻게 가라앉힐 것인가. 혜능은 여기 함부로 손을 대거나 돌로 누르려는 마음을 경계한다. 다만 자성(自性)의 힘을 믿고, 그저 조용히 바라보라고만 권한다. 혜능의 돈교는 그 믿음이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해 줄 것이라고 설파한다.
호념(護念)과 부촉(付囑)에 대한 혜능의 생각은 독창적이다. 그는 “여래(如來)가 밖에 서서 보살들을 축복하거나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여래(自性如來)가 자선호념(自善護念)할 뿐이라고 말한다. 즉 “자기 내부의 불성의 자각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를 정화해 나간다”는 것이다.
“여래가 보살들을 잘 호념한다는 뜻은, 여러 학인(學人)들로 하여금, 반야지(般若智)로, 제 마음과 몸을 기억하여(念), 망녕되이 증애(憎愛)를 일으키지 않도록, 또 바깥의 육진(六塵)에 물들지 않도록 하여, 생사의 고해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제 마음 가운데 생각 생각(念念)이 항상 바르게 있어 사악한 것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자성(自性)이 여래(如來)이고, 자선(自善)이 호념(護念)한다!” 言善護念者, 令諸學人, 以般若智護念自身心, 不令妄起憎愛, 染外六塵, 墮生死苦海. 於自心中念念常正, 不令邪起. 自性如來, 自善護念.
자성여래(自性如來)는 “내 마음의 여래”를 가리킨다. 이는 “내 마음이 곧 여래이다”라는 말로서, “네가 부처다”라거나, “내 마음이 부처이다”라는 돈교의 취지를 그대로 표명하고 있다.
다만, 그 여래를 숨 막히게 하는 잡동사니와 장애물을 걷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 방법은 증애(憎愛)를 일으키지 않고, 육진(六塵)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역시 사랑과 미움이 문제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모든 문제의 진원은 사실은 마음속에 있다. 같은 잘못이라도 마음에 맞거나 이해를 같이 하는 사람은 눈감아주고, 같은 공적이라도 뜻을 달리 하거나, 당파나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은 무시하거나, 깎아내리기 바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판단이나 태도가 공적이고 객관적임을 웅변하고 설득하고 강요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문제가 바깥에 있기보다, 안에 있다는 불교의 판단이 옳지 않은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 내부의 사랑과 미움의 투영에 불과하다!
만일 우리가 그런 사적 관심이 어지럽게 분출하는 것을 조정하고, 편견의 고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꿈꾸는 세상은 성큼 다가올 것이다. 그 점에서 불교는 옳다. 애증(愛憎)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때 통연명백(洞然明白), 사태는 투명하게 드러난다.
불교는 바로 이 사사로움이 통하지 않는 은산철벽의 <객관성>을 향한 노력이다! 그것을 불교는 법(法)이라고 불렀다.
법(法)은 인정사정 보지 않는다. 나는 인도 불교의 다르마(Dharma)를 왜 법(法)으로 번역했는지 늘 궁금했다. 그 기미를 조금 알 듯하다. 법은 투명한 세계를 가리킨다. 그래서 나는 법을 ‘객관적 사태’로 번역하기를 즐겨한다. 이에 대비되는 상(相)은 ‘주관적 판단’이다. 평화와 안정, 질서, 행복 등 인류가 꿈꾸는 가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주관성의 편견과 협애함을 자각해야 한다. 이곳에 착목(着目)했다면 반야바라밀, 일은 거지반 이루어졌다.
수행이란 마음에 그런 불건전한 상념들이 더 이상 반복되거나, 강화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결단하는 일이다. 혜능은 선부촉(善付囑)이란 바로 그 지속적 정화의 노력, 즉 청정(淸淨)한 생각이 ‘이어져 나가도록(付囑)’ 하는 일이라고 해석한다.
“앞 생각도 청정하고, 뒷 생각도 청정하도록 이어져 끊이지 않도록 하면, 나중에는 결국 해탈할 것이다. 여래는 이 뜻을 중생들과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간곡히 일러 주었다. 그렇게 살도록… 이를 선부촉이라 한다.”
言善付囑者, 前念淸淨, 付囑後念, 淸淨無有間斷, 究竟解脫. 如來委曲誨示衆生及在會之衆, 當常行此, 故云善付囑也.
마음은 그렇게 죽이고, 다시 살려야 할 물건이다.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劍)!” 그런데주의할 것은 이 칼자루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점이다. 그것이 혜능선의 독창적 소식이고,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희망이다. 다음 몇 회는 그 혜능선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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