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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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형과 아우가 뒤바뀌니/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속가 형 도오 보다 먼저 출가한 운암 선사
형 데려가 스승에게 보였으나 제자로 안받아

언젠가 풍수지리에 관한 책을 읽다가 한반도는 장남보다도 둘째가 더 능력을 발휘하는 땅이라는 구절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 풍수문제가 아니라 대가족이라는 구조의 특성에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고 할 것이다.
장남은 태어나면서 이미 기득권자가 된다. 분배순위에서 늘 우선이다. 그러다보니 현실에 안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둘째는 항상 형의 것을 빼앗아 와야 한다. 그러다보니 진취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때 〈이 땅에서 장남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라는 책이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장남만이 가지는, 차남들은 알 수 없는 그 어려움을 읽어내고는 만인이 공감하였다. 결국 ‘형만한 아우 없다’고 하는 말은 장남만이 누릴 수 있는 부모의 열정과 관심으로부터 비롯되는, 부모 나름대로의 심혈을 기울인 영재교육과 가문을 이어가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절집에서도 형과 아우가 동시에 출가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래도 친한 경우가 아니면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한참 뒤에 풍문으로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쩐지 누구랑 닮았더라”고 하면서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바로 위 사형과 한참 밑의 사제가 형제간이다. 이런 경우는 “그런가보다” 할 수 있는데, 더 큰 문제는 동생이 먼저 출가하고 형이 나중에 입문하는 경우다. 그렇게 되면 법랍순으로 앉는 자리가 결정되니 속가의 형과 아우가 절집에서는 뒤바뀌게 된다. 그래서 한 스승 밑으로 형제가 동시에 출가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그리고 형은 지명도가 있는데 동생이 묻혀있거나 동생의 유명세에 형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당나라때 도오 화상(도오가 여럿인데 누군지 확인 불가)과 운암담성(782~841) 선사의 집안도 형제출가자를 배출했다. 운암은 동산양개(807~869)의 스승이다.
도오 화상은 46세에 출가했다. 그야말로 완전한 늦깎이인 셈이다. 운암 선사는 도오의 친동생으로 아주 어려서 출가했고 형이 출가할 무렵에는 백장선사의 시자로 있었다. 그 무렵 형인 도오는 보탐관(報探官)이란 벼슬자리에 있었다.
어느 날 출장을 나와 진종일 걷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백장산의 농막에 이르렀다. 배가 너무 고파 염치불구하고 와서 밥을 달라고 했다. 이 때 마침 운암이 농막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더니 장주(莊主:농장 책임자)는 운암에게 손님 접대를 부탁했다. 그런데 대면한 나그네가 너무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긴가민가해 수인사를 마치고 물었다.
“장군은 어디 사람이오?”
“강서성 종릉(鍾陵) 건창(建昌) 출신이외다.”
“성은 뭔가요?”
“왕씨요.”
운암은 이 말 끝에 바로 친형임을 알고서는 손을 덥석 잡고서 물었다.
“어머니는 잘 계신지요?”
“동생(운암) 생각에 너무 울다가 한 쪽 눈을 잃으시더니, 이제 아주 별세하셨소.”
가족사의 아픔과 그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형을 출가토록 꼬드겼다. 마침내 운암은 그날로 백장선사에게 형을 데리고 가서 뵙게 하였다.
“저의 형인데 출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나는 제자로 받을 수 없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나의 사형인 약산유엄(745~823) 선사에게 보내라.”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형제를 동시에 한 문중에서 거느리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운암은 형을 데리고 약산 사숙에게로 가게 된다. (계속)
200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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