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 종합 > 기사보기
내가 본래 공했으니 하되 함이 없이 해야
어떠한 업이든 어떠한 고통이든

병고에 고통받지 않고 살아가려면


며칠 전 안양 대법당에서 수계법회를 봉행하였습니다. 해마다 참석하는 자리지만 재발심하는 마음으로 가족 모두가 참석하였습니다. 많은 대중이 한꺼번에 수계를 받고 연비 의식이 진행되어 잠시 망념이 일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내면으로 집중하지 못하고 대중의 흐름에 동화되지 못해 그런 생각이 올라옴을 자각하고 바로 분별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또 연비를 받으면서 “우리들의 삶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하고 의식을 집전되는 시간 내내 참회진언을 마음으로 읊조리면서 진정한 참회가 무엇인지를 가슴 깊이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수계식을 하는 동안 같이 동참해서 연비를 받는 저희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병고액난의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발원하고 발원했습니다. 진정코 질병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지 않고 올바로 수행정진하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요?

내가 항상 나무 뿌리하고 싹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렇게 우리도 누구나가 다 나무 싹과 뿌리처럼 본래 그렇게 달려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네 뿌리는 바로 네 주인공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도리를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우주 전체를 한데 쌓아 봤자 콩 알갱이 하나로도 할 수 있고 한 사발로도 할 수 있고 한 주먹으로도 할 수 있고 아주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 모두를 하나로 이렇게 했을 때 그 콩 하나를 갖다 짊어지니까 세상에 짊어질 수도 없고 무겁더라 이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어떡하면 빨리 해소를 시킬 수 있나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무조건 관하라고 한 겁니다. 진짜로 믿는다면 믿는 것만큼 없어질 것이고 믿지 못하고 뭐를 얻으려고만 한다면 그것이 없어지지 않고, 어떻게 해서 자기 정성에 의해서 그것이 조금 나을 뿐이지 그것이 없어지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현재만 살려고 그러지 말고 세세생생을 살기 위해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 그걸 벗어 버려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짊어진 콩 한 알갱이를 산더미 같은 산이라고 그런다면 산 하나를 짊어지고 다니는데 그 무거운 거를 그냥 다 놓아라 이 소린데, 진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인공이라는 자기 자불(自佛)을 진짜 믿어야만 하는데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이겁니다. 근데 우리가 믿는다 하는 거는 우리가 보면 알죠. 눈 뜨고 보고 귀 열고 듣고 이렇게 하는데 우리를 그렇게 형성시켜서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만든 자가 누구냐 이겁니다.
그게 바로 자기의 종자의 근본 아니겠습니까. 자기 종자라는 근본인데 그 근본으로 인해서 자기가 생겼다면 그 근본에다가 다 놓아야죠. 진짜로 믿고 놓아야죠. 그리고 하는 것도 먹는 것도 일상생활 하는 일거수일투족이 다 그놈 때문에 움죽거리게 되는 거니까요. 그러니깐 산이 하나다 해도 되고, 콩 한 알갱이다 하는데 그 콩 한 알갱이가 짊어져도 짊어질 수가 없으리만큼 무겁다 이 소립니다. 근데 그것 하나를 없애려고 한다면 진짜로 믿고, 가난하든 돈이 있든 없든 밥을 굶든 먹든 무조건 ‘굶지 않게 해 주는 것도 너고 살리는 것도 너고 길을 걷게 하는 것도 너고….’ 하면서 모두가 믿는 게 그냥그냥 그리로 다라야죠. 다죠. 자기 모습이 자기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깐 부처님 머리 위에 상투를 하나 해 놓았다고도 보고 또 때로는 부처님을 새겨 넣기도 하고 때로는 금으로다 이렇게, 지금도 해 놓았지만 그렇게 해 놓은 것은 바로 크고 좋아서가 아니라 뜻으로 볼 때는 텅텅 빈 모습이다. 텅텅 빈 모습인데 무엇이 있겠느냐. 그런데도 갖추어 가지고 계시다 이겁니다. 텅텅 비고 없기 때문에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거지 뭐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갖추어 가지고 있을 수가 없죠. 오장 육부가 다 있다면 갖추어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내 손도 빈 손 부처님 손도 빈 손, 부처님 발도 빈 발 내 발도 빈발, 부처님 몸도 빈 몸 내 몸도 빈 몸이니깐 빈 마음입니다. ‘함이 없이 하고 가는구나.’ 하고 그저, 모든 것을 알 양으로 애 쓰지 말고 모두가 공했다는 거, 우리가 공해서 함이 없이 하고 지금 생활을 하고 간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수억겁 전서부터 둘이 아니게끔 돼 있는 거죠. 인과로서 인연으로서 말입니다.
그러니깐 모두 그 뜻만 대략 알면 그냥 믿고 가도 된다 이겁니다. 왜, 부처님께서 가르쳐도 모르는 바보 제자에게 빗자루를 하나 주셨지 않습니까. “너는 이 빗자루 하나 가지고 항상 쓸고 털고 그래라.” 하고요. 거기서 터득을 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수없이 안다 하더라도 안 것은 다 놓아야 된다 이겁니다. 아는 것을 다 놓지 않는다면 그 아는 것 때문에 길고 짧고 이렇고 저렇고, 이론이 많아서 외려 갈 길을 더디게 만든다 이런 소리죠.
그렇다고 일거수일투족을 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하되 함이 없이 해라 이거죠. 공했으니깐 너는 함이 없이 하는 거다 이겁니다. 왜 텔레비전에 영화로서 이렇게 그림이 나오죠? 그림이 나와서 별짓 다 하죠. 자기가 그렇게 별짓 다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저거는 내 환상이 저렇게 하고 있고 나는 그냥 여기 앉아서 그걸 보고 있다. 그렇게 환상이 온통 다 하고 살듯 이렇게 하고 살아요. 그런데 우리가 거짓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돼 있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어디 다치거나 그런다면 엉엉 그냥 야단나죠. 그러나 죽어도 고만 살아도 고만, 이런 것이 다 무심하게 돌아가죠. 알게 되면 얼음판을 걸어와도 아주 편안하게 걸어올 겁니다.
그래 어느 사람이 강을 건너는데 아주 얼음이 얼었으니까 고기들을 잡느라고 모두 얼음을 깨 놓은 자리가 큰 게 있어요. 뭐 잘못 걸으면 풍덩 빠져서 그냥 야단들이 나니까 잘 걸어오는데, 스님네들 둘은 하나도 거침없이 그냥 고개도 돌리지 않고 오거든요. 그래 옆에서 오는 사람들은 모두 두리번두리번거리고 간이 콩만 해서 모두 오는데 다 건너와서 “스님! 스님!” 하고 물었어요. “스님네들은 이 강을 건너오시는데 겁이 나시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나는 이 강을 건너온 새도 없는데 어떻게 겁이 나겠소.” 하더랍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도 사는 게 아니면서도, ‘아니다’ 이러는 걸 알면 그냥 삶이 없이 사는 거죠, 그냥.
그래서 내가 그러는 겁니다. 관해서 놓으면 둘이 아니게끔 딱, 병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왜 그런 것도 있죠. 한 모습에 한 모습이 딱 들어가서 하나가 된다고요. 그런 것 보시면 아시듯이 그렇게 수천 개가 들어가도 그것은 들어가고 나간 사이가 없단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그 병은 그대로 낫는 겁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죽일 리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각자 자기 주인공을 믿고 열심히 관하며 사세요.

욕심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모든 분들이 선한 의지를 갖고 어떤 일을 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악한 의지를 갖지 않고 함에도 불구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아니면 대개 또 잘 안 풀리죠, 때때로. 그렇다면 욕심을 내지 말라고 하는데 애들이 좀더 공부 잘하기를 바라고 그래도 남들처럼 집은 하나 있어야겠는데 그 욕심의 한계는 어디까지가 욕심의 한계며, 그 구분이 확연하게 ‘이건 욕심이다. 생활하는 데서 이건 욕심이 아니다.’ 하는 것을 저로서는 구분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면 선한 의지로 어떤 일을 좀더 나아지게끔 추구하는 것도 욕심에 해당하는 건지, 아니면 그게 이루어지지 않는 게 당연한 건지 의문이 됩니다.

어이구, 참! 애들하고 살 집이 없는데 어떻게 집 걱정을 안 해요? 세상을 살면서 자기는 관리인이라는 것만 아시라니까요. 주인의 시자일 뿐이고. 누가 사랑을 하지 말래나, 돈을 갖지 말래나, 집을 갖지 말래나요. 이 말만 하면 알아듣기지 않아요? 그러면서 그대로 사는 것이 원칙인데 악하게 살지 말라고 이런 것은, 악한 것도 악한 것이지만 자녀들하고도 악하게 되는 수가 있어요. 잘못하고 나가서 안 들어오거나 이래도요, 공부를 잘못하거나….
이거 한국에선 더 합니다. 부모가 그냥 공부 공부, 아주 상상에 빠진 거 같습니다. 그러니 자식들이 견디겠습니까. 그래서 공부에 진저리가 나서 들어오면 “어디서 배고프지 않게 뭘 먹었느냐. 피곤하지 않으냐. 배고프면 뭘 좀 먹고, 피곤한데 쉬어라.” 이러고 마음속에다가 맡겨 놓는, ‘저 아이가 공부 좀 열심히 잘하게끔, 마음잡아서 잘하게끔 당신밖에는 해결 못해!’ 하고 거기다 맡겨 놓고 거죽으로 말은 부드럽게 해 줘라 이런 소립니다. 그래서 이득이 있고 공덕이 있지, 그렇지 않고 그냥 일사천리로 말로다가 그냥 다다다 해 버리고 그러면, 냉랭하면 눈치 봤다가 그냥 또 달아나가요. 그러니 점점점 속이 썩고 이러죠.
그리고 자식들한테 조건 없이 사랑하고 그래야 하는데 많은 분들이 조건이 있이 꼭 합니다. 자식을 기를 때도 ‘너는 잘돼라. 잘되는 게 내 소원이다.’ 이렇게 조건을 붙입니다. 그런데 우린 안 그렇습니다. 조건을 붙여 놓으면 더 잘될래야 잘될 수도 있고 더 못될래야 못될 수도 없습니다. 거기 한계에서 그냥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아예 한계를 지어 놓지 마시고 조건 없는 사랑을 하시라 이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악하다는 것이 별난 게 아니라, 그저 남한테 무조건 잘 이익하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은, 공을 쳐 보세요. 공을 딱 칠 때는 공이 나한테 돌아오지 절대로 그 벽에 딱 파묻히지 않습니다. 그거와 비슷한 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데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너무 걸리지 마시고 아주 평온한 마음으로 ‘이제는 내가 관리인만 되겠다. 그저 마음의 주인이 다 알아서 할 거고, 집이 없는 생각을 하면 또 집 없다는 생각에서 주인공도 알고 있으니까 어느 때 생겨도 생기겠지.’ 하고 거기다 맡겨 놓는 겁니다. 저절로 해결돼야지 강제적으로 어디서 집이 나옵니까?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순리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업이 붙지 않는다 하셨는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지금 한 행동들은 우리가 걸어서 왔을 때 발자국을 남겨 놓지 않은 것처럼 이렇게 하고 가는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그 업이 우리한테 계속해서 있을 수 있고 계속해서 그 업을 우리가 갖고 다니는지 업, 카르마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잘 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가 한 것은 자기가 받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에 나오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느 산 부처님이 계셨는데 어느 신도가 이렇게 물었답니다. “나는 나쁜 일도 안 하고 죄 지은 일도 없는데 어찌 이렇게 가난하고 애고가 많습니까?” 하고 물었답니다. 그러니까 그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에 모든 게 닥치는 거고 지금 네가 어떻게 살고 가느냐에 따라서 또 미래가 올 것이니라.” 그러셨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모든 게 우리 마음 놀음이니까, 마음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을 나쁘게 하기도 하고 좋은 일을 하게 하기도 하고 이럽니다. 그런데 딴 사람들이, 주위의 사람들이 모른다고 생각해서 아무도 모르는 걸로 알지 마세요. 모든 것을 내 마음속의 그 의식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우주의 법계에 전부 통신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업이 생기고 인과응보가 생기고 또는 영계성이 생기고, 즉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마음, 의식 이런 것하고 첨부가 되면 영계성이 되지요. 인연의 영계성.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그 업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깥으로 끄달리지 마시고 어떠한 업이든지 어떠한 고통이든지 다 자기 마음 근본에다가 놔야, 그것이 바로 자가발전소와 같은 거니까 놔야 모든 게 타 버리는 것과 같아서 업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말을 하죠?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좋은 업이 되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나쁜 업이 됩니다. 악업이 되고 선업이 된다 이런 말이죠.
하여튼 이 공부의 핵심은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어디에서 돌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을 잘 관해 보세요. 여러분이 집중해서 항상 도반들과 서로 공부들을 하셨으면 합니다. 이 마음공부를 해 나가시는 분들이 법회도 자꾸 참석을 하고 도반들끼리 토론도 하면서 자꾸자꾸 진행해 나간다면, 가정도 다복해지고 화목해지고 애고가 없어지고 병고가 덜어지고 모두가 다 좋아지는 것입니다.

천도의 도리에 대해서


동물을 피치 못한 일로 죽였을 때 자기 한마음에 거둬들이면 그 동물이 다시 사람으로서 다시 환토가 된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자기 갈 길을 가라고 천도를 하는데, 제 의문은 왜 한마음으로 들일 수 있다면 동물이고 사람이고 간에 스님 같으신 분께서 한마음으로 다 들일 수가 있을 텐데, 왜 저희와 같은 범부중생이 굳이 제 갈 길 가게 마음을 내고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법원에 가면 십 년의 징역을 받기도 하고 무기징역을 받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그렇게 십 년이고 무기징역이고 간에 그렇게 죄지은 잘못으로 갇히게 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 일을 담당했던 검사가 다 해 놓은 거란 말입니다. 그죠? 새로 온 검사나 판사가 들어가서 해결할 일이 못되죠. 그와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만약에 소가 지나가는데,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합시다. 그런다면 그것은 누구도 개입한 예가 없단 말입니다. 누구도 개입한 게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그냥 그 즉시 나에게 하나로 집어넣는다면, 얼른 쉽게 말해서, 그러면 거기 들어가기 이전에 벌써 사람으로 환토가 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소는 도살장에 가서 맞아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안락사처럼. 아픈 줄을 모르고 무명을 벗습니다.
그리고 천도도 그렇습니다. 생전에 살면서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내 몸속에 들은 악업 선업의 그림자에 밟혀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몇 번 얘기했지만 부부지간이나 자식지간이나 동료지간이라 해도 그 모두는 동구 바깥에서 인사를 하고 가지만 그 악업 선업의 그림자는 떠나질 않습니다. 자기 영혼에 딱 붙어서 그냥…. 그러니까 그 의식들에 묻혀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가 없으니까, 이 도리를 모르니까 자기가 체가 있는 줄 아는 겁니다. 자기가 체(體)가 있는 줄 알고 그냥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어떡하다가 벗어났다 하더라도 강을 건너가야 하는데 빠져 죽을까 봐 못 건너갑니다. 내가 몸뚱이가 있는 줄 알거든요. 지금 살아서처럼 있는 줄 알아요. 죽어도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배가 올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불바퀴를 넘어서야 할 텐데 타 죽을까 봐 못 들고요. 그러니 세 조건이 다 없는 겁니다, 아주. 그래서 천도가 생긴 겁니다. 눈 뜬 사람을 통하고 귀 뜬 사람을 통해서, 길잡이를 통해서 벗어나는 겁니다.
원효 대사가 죽은 사자 새끼에 대고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니까 대안 대사가 ‘허, 그렇게 염불을 해서 천도가 될 건가?’ 하면서 바가지에 얻어온 젖을 사자 새끼를 끌어다가 먹였단 말입니다. 그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지금도 어느 사찰이든, 사찰뿐만 아닙니다. 어느 종교, 티벳 불교든지 일본 불교든지 한국 불교든지, 모두 이게 기복으로 하는 데는, 부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라는 대로 그냥 하다 보니까, 그것도 그대로나 하나요? 제대로 그대로 못하는 점들이 많죠.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요, 스님들이 마음이 넓어야 천도를 시키는 영혼도 들어와서 스님의 마음과 같이 동시에 알아짐으로써 시야가 넓어지는 겁니다. 스님들이 요만한 교자상에다 크게 잘 차려 놓고 할 때 그 스님들이 이렇게 잘 차리고 한다는 것만 알았지, 모든 우주 섭류의 모든 문이 여여하게 열린 줄을 모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들의 마음이 얼마큼 넓으냐에 따라서, 하다못해 찹쌀떡 하나 갖다 놓고 제사를 지내도 이 세상 영혼의…, 영혼의 것이니까, 전부.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모든 조상들을 다 먹이고도 그 떡 하나가 되남더란 얘깁니다.
천도를 시켜도 이쯤 돼야지 천도라고 할 수 있는 거지, 목탁 치고 염불이나 한다고 천도가 아닙니다. 영계를 만나서 얘기할 줄 알고 교류할 줄 알고, 그래도 어떠한…,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지금 가고, 뭐를 하고 있는지 그쯤은 알아야 천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천도도, 소가 지나가는 걸 보는 것도 천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천도하고 그 천도하고는 또 다르죠. 왜냐하면 아무 조건도 없어야 할 텐데 이 한 사람을, 내가 이거는 너무도 철저하게 실험하고 체험한 거니까요. 한 사람을 건져 주려면 몇 집을 돌아쳐야 한 사람 건질 수가 있는 겁니다. 연결 연결 돼서 말입니다.
이걸로 인해서 이게 막아지고 저걸로 인해서 저게 막아지고, 죄 이렇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그러한 천도도 가지가지에 의해서 용도에 따라서 주어지는 거고 그렇지, 그 천도도 천차만별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천도라는 거 한마디는 그냥 천도지마는 그 천도의 가짓수는 나름대로 그 사람이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주어질 테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제가 자식을 가르치는 엄마의 입장에서 좀 여쭤 보겠는데요, 예를 들면 지금 제 큰아이가 대입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큰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렇고 집안을 위해서도 잘되기를 엄마로서 바라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기독교를 다닐 때도 하나님에게 잘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를 했는데 불교로 개종을 하고나서도 별반 다른 게 없이 이름만 바꿔서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주인공’ 하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불교의 진정한 뜻을 몰라서 그렇게 항상 생각을 하는 건지, 그게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이거 보세요. 내가 항상 수없이 여러분한테 말하죠. 십 년뿐이 아니라 이십 년 삼십 년씩 이렇게 지금 얘기해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벌써 상대가 생기지요? 벌써 한 다리 건너서 공을 딱 쳤을 때에 맞은 자리가 그냥 정통으로 들어가야 공이 힘이 있죠. 만일 한 번 맞아 가지고 그쪽으로 가 보세요. 힘이 있나. 그러니깐 여러분이 무엇을 바라는 생각으로 하는 기도를 하라는 게 아니라 자기 근본을 깊이 관하라 이겁니다. 모든 것을 자기 주처에 돌려놓고 지켜봐라 이겁니다. 무조건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관을 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깐 여러분은 자기 주처를 업신여겨서 믿지 않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주여, 하나님이시여, 아버지시여!’ 하면서 바깥으로 기도하고 찾고, 또 부처님 믿는 사람은 땅에 가서 빌질 않나, 용신한테 가서 빌질 않나, 지신한테 빌질 않나, 온통 빌고 다니는 그러한 분들이 미신 행을 하니깐 미신이 있고 귀신이 있지 왜 미신이 있겠습니까? 달마 대사께서는 양 무제가 그렇게 많은 절을 지어 주고 옷을 해서 보시하고 시주를 많이 해도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그랬어요.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한마음으로 돌아가질 않기 때문에 공덕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님이에요. ‘님이시여, 님이시여! 영원한 님이시여! 수억겁 광년을 거쳐 와도 나하고 둘 아니게 이끌어 오신 당신이시여! 님이시여!’ 하는 겁니다. 그 님을, 내 님부터 알아야 하늘님을 알고 한울님을 알죠. 요 세 가지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늘님! 지혜입니다, 이게. 한울님! 통신입니다, 법계. 내 님에서 문리가 터져야 하늘님도 한울님도 다 알게 되는 거죠.
불가에서 말하면 바로 지금 보이지 않는 데에 그 들음, 바다와 같이 넓은 자비, 그것이 나를 증득하면, 나를 발견해 내면, 즉 말하자면 현재의식의 자기는 자(子)고, 과거의 자기를 끌고 지금 나온 그 무심은 바로, 불성은 바로 부(父)다 이겁니다. 부와 자가 상봉하면 그대로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되느니라, 그대로. 문리가 터지느니라 이 소리거든요. 그런데 그 나는 발견했는데, 육조 스님도 나는 발견했는데, 달마 대사도 그랬죠. 나를 발견했는데, 둘이 아닌 도리는 다 알았는데 둘이 아니게 나툴 줄을 몰라서 면벽을 했단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한 분은 6년을 면벽을 했고, 한 분은 12년을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시험을 했습니다.
그런 것과 같이 여러분은 좀더 생각을 넓게 해서, 지금 그 앉은 자리에서 바로 연습을 한번 해 보실까요? 집에 한번 갔다 와 보세요, 어떤가.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 하고 잘된다 하고 기대는 게 아니라 여러분도 갖추어 가지고 있으니까, 여러분의 주처를 믿고 거기에 모든 걸 맡기시고, ‘너만이 나를 이끌어갈 수 있어. 너만이 내 병을 낫게 할 수 있어.’ 하고 일체를 맡기시라는 겁니다. 아들이라는 거 어머니라는 게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내가 불을 켜면 자식들의 마음에도 불이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빠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믿고 그냥 거기다가 맡기는 겁니다. 그러면 자식들이 공부 안 한다는 놈이 스스로 공부하게 돼요.
그렇게 연결이 이어짐이 없이 이어져요. 그래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고, 이어짐이 없이 마음을 전달하고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깐 끝간 데 없이 시발과 종점도 둘이 아니요, 이어지는 사이 없이 이어져서 돌아가니깐 한마음이다 이거에요. 그래서 원자라고 말을 하죠. 오온이라고 했는가 하면, 원자에서 입자가 되고 입자에서 분자가 되고 분자에서 그저 한생각에….
한생각이고 뭐고 세 가지 네 가지 습이 있다면, 통 안에 뚜껑을 열어 보면 그냥 생명들이 와르르 하고 일어납니다. 누가 거기 뭐 하려고 생명을 조작해서 한 건가요? 자연입니다, 그게. 그래서 습기가 있고, 지수화풍, 습기가 있고 원기가 있고 그렇게 되면 다 생명이 생기게끔 돼 있어요. 그것이 오래 살다 보면 경험을 얻고 해서 진화되고 그렇게 해서 이렇게 아주 영리한 인간까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벌레를 업신여겨요? 아프다는 사람 업신여겨요? 그리고 자기가 자기를 업신여겨요? 왜, 형상은 믿고 업신여기지 않으면서, 고상한 부처님 형상은 그렇게 고귀하게 생각하고 믿으면서, 이름도 믿으면서, 그리고 고상도 믿으면서, 성모마리아 상도 믿으면서, 왜 자기 근본은 안 믿는 겁니까? 자기가 지금 말하고 다니고 살면서 산부처를 왜 안 믿어요? 아, 자기 산부처를 왜 안 믿느냐 말이에요. 자기 얼굴 더러우면 닦아 주는 산부처를 왜 안 믿느냐고요. 그리고 더우면 시원한 옷 입혀 주는데 왜 안 믿느냐고요. 조금 더 옷이 더러워 보세요. 훨훨 벗어 버리고서 좋은 옷 입혀 주고 그러는데 왜 안 믿어요? 형상을 믿을 거예요, 이름을 믿을 거예요? 고깃덩어릴 믿을 거냐고요. 그리고 허공을 믿을 거냐고요.
다른 데 믿을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못났든 잘났든 자기밖에 자기가 믿을 곳이 없어요. 그러니깐 믿는 거는 여러분의 주인공을 믿어야죠. 주인공이라는 뜻은 돌아가니깐, 찰나찰나 돌아가요, 화해서. 금방 어머니가 됐다가 금방 할머니가 됐다가 금방 아내가 되시죠? 그런데 어떤 게 되었을 때 나라고 할 수 없으니까 그게 부처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되었을 때 놓고 빌지 말고, 아내가 되었을 때 빌지 말고, 지금 부처님 불상을 모셨는데 부처님을 모셔 놓고 부처님 마음이, 마음을 내면 문수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마음을 냈는데 또 보현이 되었다 이겁니다. 그 보현은 화신이에요. 몸이 움죽거린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바로 그분들이에요. 그러니깐 여러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생명 근본과 마음 내는 것과 몸이 움죽거리는 것, 셋이 이름은 각각이지만 같이 돌아가는 게 주인공이에요. 같이 돌아가니깐, 내면세계의 모든 생명들도 같이 따라서 돌아가니깐 그것이 바로 한마음이자 주인공이란 얘깁니다. 그러니 한마음 주인공에서 나오는 그 자체를 되놓으시면 바로 거기에서 앞서 짊어지고 나온 그 모두가 무너지는 겁니다.
2006-01-01
 
 
   
   
2024. 5.17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