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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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불구대천의 원수 (2)/이미령(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원한 아닌 것에 의해서만 원한 누그러진다”는 아버지의 음성 떠올라 왕 살려주고 원한 풀어

곤히 잠든 왕의 얼굴을 내려다보자니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었음에도 약소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순순히 나라를 넘겨줘야 했던 아버지의 그 억울함, 그 후에 이어진 불안하고 암울했던 도피의 나날들,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주었음에도 처참하게 목숨을 잃고 만 부모님의 원한….
디가부의 마음속에는 모진 설움과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그는 칼을 빼들었습니다.
‘이 원수! 네가 한 짓에 대한 응분의 댓가를 고스란히 받을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뇌리를 강하게 때리는 어떤 음성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긴 것을 보지 말고 짧은 것도 보지 마라. 원한은 원한으로 누그러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들아, 원한 아닌 것에 의해서만 원한은 누그러진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허공에 대고 외쳤던 그 말이었습니다. 디가부는 그 음성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칼을 칼집에 도로 넣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원수를 단칼에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다시 칼을 빼어들었습니다. 역시 어디선가 그 음성이 들려와 디가부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이렇게 칼집에서 칼을 빼었다 넣었다 하기를 세 차례 하는 사이에 브라흐마닷타왕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습니다.
“꿈을 꾸었다. 내가 예전에 죽였던 디기타왕의 아들이 나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다가오는 꿈을 꾸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왕의 말을 들은 디가부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아무도 없는 호젓한 숲속, 그리고 날카로운 칼을 들고 서있는 복수의 화신 앞에 왕은 온 몸을 떨며 엎드렸습니다.
“제발 살려다오. 내 목숨만은 살려다오. 사랑하는 디가부여.”
와들와들 떨면서 살려달라고 비는 왕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디가부는 칼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의 목숨을 살리고 죽이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야말로 저의 목숨을 살려주셔야 할 것입니다.”
디가부는 죽이려던 마음을 품었던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결국 왕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디가부야, 너는 나의 목숨을 살려 주고 나는 너의 목숨을 살려 주기로 하자.”
왕궁으로 돌아와 며칠이 지나자 왕이 디가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대의 아버지가 허공에 대고 긴 것과 짧은 것을 보지 말라고 외쳤던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긴 것을 보지 말라는 말은 원한을 오래 끌지 말라는 뜻입니다. 짧은 것을 보지 말라는 말은 우정을 급하게 끝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원한은 원한으로 누그러지지 않는다는 말은, 왕께서 제 부모님을 죽였으니 제가 왕의 목숨을 빼앗을 텐데 그러면 왕의 측근에서 다시 제 목숨을 빼앗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 편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다시 왕의 측근을 해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원한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왕께서는 제 목숨을 살려 주셨고 저는 왕의 목숨을 살려드렸습니다. 원한 아닌 것으로 원한이 누그러졌습니다. 제 아버지의 말씀은 그런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마하박가)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해친 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예기(禮記)>에 나옵니다. 한 하늘 아래에 살 수 없는 원수라는 뜻입니다. 결국 내가 죽든지 네가 죽든지 누구 하나가 죽어야만 한다는 뜻이지요. 얼마나 지독하게 원한에 사무쳤으면 이런 말을 할까요?
그런데 위의 디가부 이야기를 음미해보니 부처님은 ‘원한을 품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원한이 누그러지는 법’을 가르쳤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원한은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푸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 푸느냐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대답은 뻔합니다. 내가 먼저 풀어야 합니다.
분해서 견디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구대천의 원수가 대대로 이어갈 것이 뻔한 데 어쩌겠습니까?
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간에 허공에 대고 외쳤던 디기타왕의 그 절규는 사무친 원한을 풀지 못해 몸부림치는 21세기의 인간들을 향한 호소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200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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