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76) 2부 22강 윤리 vs 창조/한국학중앙연구원
진실을 말한다는 입을 참회하자

그렇지만 제 믿음의 기초는 아직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황우석 교수가 말한, “그럼에도 줄기세포의 원천기술은 있다!” 입니다. 있지도 않은 기술을 가지고 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친다? 그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0과 1 사이
이 상정 위에서 생각해 봅시다. 경제학적으로 0과 1사이는 거의 단절이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은 그러나 좀 불안합니다. 우연한 성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가 나왔다면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됩니다.
그것은 다시 실험을 통해 재검증될 수 있는 훨씬 큰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실험 결과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과학은 실험 결과의 어느 정도의 우연성은 접고, 과감하게 다른 걸음을 떼놓기를 요구합니다. 한 시가 급한 일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인문과학을 하는 저도 그렇습니다. 새로운 논문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성과를 참작하고, 자기가 발굴한 것을 업그레이드해서 이루어집니다. 독창적 논지를 펼칠 때는 뚜렷한 부분은 확대하고, 희미하고 반대되는 증거들은 무시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사실들의 나열들 속에서 길을 잃거나, 충돌하는 논점들에 휘둘리다 결국 죽도 밥도 아닌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해석’은, 그것이 역사이든, 철학이든, 그리고 과학이든 이런 선택과 취사, 과장과 무시의 과정을 거칩니다. 일반화의 수준이 높을수록, 통찰이 독창적일수록, 그것은 더 큰 비판과 반론 앞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두렵다면, 우리는 남이 짜놓은 틀 안에서만, 그리고 남이 하는 이야기를 그저 앵무새처럼 반복할 수밖에 없으니, 그 쳇바퀴 안에서 우리의 안목은 제자리걸음이고, 우리네 삶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라는, 불란서의 포스트 모던 작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면, 우리는 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삶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저는 황우석 교수가 원천 기술을 갖고 있다면, 그 근본적 사실 하나가 분명하다면, 성과를 부풀리고, 실수를 속인 것은 사소한 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만한 흠은 덮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컨대 사실을 밝히는 자들과,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무게를 갖습니다. 너무나 다르기에 우리는 그들을 달리 대접해주어야 합니다.
뒤에서 말을 하는 자들, 자기들은 손끝 하나 깜박하지 않으면서 품평으로 번성하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런 독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불이 나서 다들 양동이에 물을 지고 황급히 오가는데, 곁에 선 자들이 양동이 들고 뛰는 품새가 품위없다고 입을 댄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다.”
이 참에 한 마디 해 두어야겠습니다. 저는 말끝마다 ‘윤리’와 ‘도덕’을 외치는 사람들을 순진한, 낭만적인 사람들로 봅니다. 책에서 배운 윤리적 잣대들은, 그것을 외치는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원칙에 따라 살겠다는 사람은 좀 낫지만, 그 기준을 남에게만 적용하겠다는 사람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종교인들이 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게 “삶을 경멸하는” 자들을 경계하십시오. 그들의 말은 가시돋혀 있고, 사람들을 파괴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니이체가 <짜라투스트라>에서 한 말입니다.

대승의 지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그리고 창조적인 활동들은 일반적 윤리의 규범을 무시하고, 그 경계를 밟고 지나갑니다. 작은 예를 들자면, 남녀간의 자유로운 만남이나, 생활을 위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단과 전체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일부의 불만과 불이익을 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만족할 조처나 시책은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일반적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그것이 전체를 위해 무슨 도움이 될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 ‘이익’이 모든 윤리적 언명의 최종적 준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법상응사(法尙應捨), “법조차 버려야 하거늘”이라는 <금강경>의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원론을 잊어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익이 있다면, 더구나 그것이 개인이나 국가가 아니라, 휴매니치의 이름으로 인류가 얻게될 이익이라면, 작은 이해관계는 물론이고, 자신이 믿고 있는 이념이나 종교조차 거두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태가 분명해 질때까지 기다려주는 덕목 또한 귀하디 귀한 것입니다.
가끔 <불자보감>을 들추어봅니다. 오늘은 유독 그 <참회게>가 가슴에 아려옵니다. 우리 모두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울력하지는 않고, 말로써 세상을 상처내고 쪼개는데 입을 보태지는 않았습니까?

참회게(懺悔偈)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내가 지난날, 지은 악업들은”,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 “아득한 시절부터의, 탐욕과 배타와 무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내 이제, 육신으로, 혀로, 그리고 마음으로 지은 바 죄업들을,”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그 모두를, 이제 참회하나이다.”
살생중죄금일참회(殺生重罪今日懺悔), “죽인 죄”, 투도중죄금일참회(偸盜重罪今日懺悔), “훔친 죄”, 사음중죄금일참회(邪淫重罪今日懺悔), “간음한 죄,” 망어중죄금일참회(妄語重罪今日懺悔), “거짓말한 죄,” 기어중죄금일참회(綺語重罪今日懺悔), “꾸며서 말한 죄,” 양설중죄금일참회(兩舌重罪今日懺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죄,” 악구중죄금일참회(惡口重罪今日懺悔), “남한테 험한 욕 한 죄,” 탐애중죄금일참회(貪愛重罪今日懺悔), “탐욕의 죄”, 진에중죄금일참회(瞋
重罪今日懺悔), “성질 내고 으르렁거린 죄,” 치암중죄금일참회(痴暗重罪今日懺悔), “무지와 어리석음의 죄”, 그 모두를 오늘 참회하나이다.
(우리네 삶은 이들 불순물들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늦었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짐이 너무 무겁다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백겁을 쌓은 죄업도,”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한 순간 마음먹기에 몽땅 스러집니다.”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 “불이 마른 풀을 불태우듯,” 멸진무유여(滅盡無有餘), “거기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명심하십시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라는 것은 본래 뿌리가 없으니, 그것은 마음 따라 문득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그 마음이 스러지면, 죄업 또한 사라집니다.”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죄 없어지고, 마음이 스러지면, 거기 아무 흔적도 없으니,”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이를 일러 진정한 참회라 합니다.”
참회진언(懺悔眞言)을 욉니다.
“옴 살바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3번)
2006-01-01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