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그보다 더 소중한 희망
불교처럼 실용과 구체성을 중시하는 사유는 ‘자유’나 ‘민주’같은 추상적 이념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역사가 모종의 궁극적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역사는 회귀하는 것, 우리는 그 음양의 순환회전하는 어디쯤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조금 더 나은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애쓸 뿐이라고 겸허하게 말한다.
이 접근은 문화와 전통의 차이를 고려하며, 현실적 여건에 입각한 해결책을 고취한다. 같은 민주주의라도, 한국적 풍토에서는 한국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며, 10년 전의 해법을 두고 지금 적용하려는 것은 각주구검(刻舟求劍), 어리석기 그지없고 위태롭기 한량없는 무지의 불장난이다.
1.‘고통’의 진리에서 출발하는 생명윤리
불교는 ‘생명’과 ‘환경,’ 그리고 ‘인권’에 친화적이다.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 가치를 드높이고 절대화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생명을 둘러싼 논의를 보자. 다들 논의를 배아의 생명성 여부에 맞추고 있다. 불교계 또한 언제를 생명의 시작으로 볼 것이냐, 수정 때냐 착상이냐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 가이드라인을 누가 그을 것이냐. 문화와 관습에 따라, 그리고 각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선은 수없이 다르게 그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논의는 쳇바퀴를 돌 것이다.
이 접근은 불교의 규범 가운데 ‘불살생’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이 접근의 층위를 더 높이거나 방향을 달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발은 불교의 위대한 진리 가운데 첫 번째인 ‘고통’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점에서 지관 총무원장님의 지적은 시의적절한 경고이다. “환자와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불교의 논리는 철두철미 방편론에 철저하다. 그것은 “세상의 진리는 이렇다”거나, “하느님이 이렇게 명령하셨다”가 아니라, “우리는 이런 문제로 고통 받고 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것을 완화라도 하기 위해서는 이런 조처를 할 필요가 있다”는 실용적 실천적 발상 위에 서 있다. 그것이 불교의 위대하고도 위대한 접근법이다.
2. 불살생계는 지킬 수 없다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불살생은 지킬 수 없는 덕목이다. 아니 먹고 어떻게 살 것인가. 동물은 그렇다 치고 풀을 다치지 않고 어떻게 샐러드 접시에 올리겠는가. 생명은 생명의 파괴로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에 뜬 벌레를 걷어낸다고 불살생계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불교 초기에도 그 점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마음은 우리가 다른 이들의 생명을 빌려 살고 있다는 것에 겸허하며, 우리 속에 자라고 있을 잔인함을 누르고 무심함을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이 현실 앞에서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심령의 내면에서 나를 위해 몸을 내놓는 생명들을 기억하자고 주문했다. 원시의 토템 또한 이 원초적 진실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살육과 전쟁 속에 있다. 그래서 원광법사는 살생유택, “함부로 불필요하게 죽이지 말라”고 했지, 칼을 들지 말라고는 할 수 없었다. 비현실적인 주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승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불살생계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다.
나는 그래서 불살생의 계율을 불교가 엄격하게 적용하려는 것을 오히려 경계한다. 그것이야말로 ‘이름’일 뿐이니… 이름은 추상의 세계이고, 그 세계의 논리를 실상의 세계에 그대로 갖다 대려는 유혹을 천만 경계해야 한다. 좋은 이름일수록 더욱 그렇다. 자유니, 인권이니, 하는 보편적 가치는 세미나실의 덕담이고, 거리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외치는 구호는 너무 깨끗해서 쉽게 악마로 변질한다.
3. 법(法)조차 버려야 하거늘
동아시아의 전통은 추상적 이념보다 구체적 실용에 철저하다. 그래서 보편이 아니라, 늘 국지적으로 접근한다. 예컨대 자유나 인권 같은 추상적 가치를 드높이기보다 얼굴을 맞대는 가족, 학교, 이웃과의 인간적 유대와 소통에 더 큰 가치를 둔다. 하느님의 명령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선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분명히 알고 있다.
그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라면 추상적 원칙이나 이념조차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그것이 <금강경>이 말한 “법조차 버리라”는 말의 뜻이다. 불교적 진리도, 윤리적 규범도, 구체적 ‘인간’을 위해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공자가 남쪽 초나라의 섭공을 만났다. 섭공은 이렇게 넌지시 말했다. “우리나라에 한 정직한 아이가 있습니다. 애비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고발했습니다.” 공자는 그러나 달리 말했다. “그런가요, 우리 동네와는 다르군요. 애비와 아들이 서로의 잘못을 품어주고 감싸주는 바로 거기에, 정직이 있습니다.
남의 잘못도 들추기보다 덮어주는 것이 미덕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알 권리’보다 ‘그 사람’이 입을 상처에 더 가슴이 아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이 공동체나 인류의 공통 이익에 관련된 것이라면, 함부로 정직과 ‘진실’을 앞세워 되는대로 까발려서는 안 된다. 거기 지혜와 섬세함과 균형감이 필요하다.
4. 진실, 그보다 더 소중한 희망
황우석 박사를 둘러싼 진실 게임에 우리 모두는 좌절한다. 사태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미 승자는 없이 패배자들뿐이고, 이익은 없고, 무진장한 손해만 있다. 도약의 기회가 불투명해졌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우리 삶의 의미인 희망을 손상당했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가 진짜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혹시 사소한 실수나 약간의 과장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이다. 사람의 일에 털어 먼지 하나 없는, 그야말로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 의혹이 사실이라면? 한 두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어도, 전체를 상대로 하는 속임수가 가당하기나 하겠는가. 시간은 진실을 스스로 드러내고, 만일 필요하지 않다면, 바닷가의 모래처럼 사태의 흔적을 지워나갈 것이다.
공자와 섭공 사이에 오간 말의 맥락을 짚어주어야겠다. 섭공은 황하 저쪽 공자의 고향 노나라의 정세가 궁금했다. “듣자니, 당신 고향 노나라는 제후의 권위가 유명무실해지고, 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혼탁해졌다는데… 당신은 인의(仁義)의 덕목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니, 어디 당신 나라에 대해서 ‘정직하게’ 실토해 주시리라 믿소.”
공자는 정직 운운하는 섭공의 의도를 알았다. 그래서 짐짓 은유로 응답했다. “집안일이나, 가까운 사람의 험담은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 정직한 태도요! 요컨대 진실이란 덕목은 배려의 덕목보다 아래쪽에 있는 것이오.” 이것이 공자의 응수에 담긴 숨은 뜻이다. 그렇다. 진실 이전에 요익(饒益)이 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의 이익’보다 더더욱 귀한 가치가 있으니, 그것은 희망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