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계도반들과 공부인연 짓는데 큰 역할
수덕사는 비구니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미루어 짐작된다. 만공 대선사께서 근대한국불교 최초로 비구니선원을 건립해서 많은 비구니선지식이 배출된 까닭이 첫째요. 둘째는 일엽 스님이라는 걸출한 신여성이 오랫동안 수행하고 또 입적한 곳이 만공 스님 문하의 덕숭산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불자가수 송춘희씨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때문이다. 그래서 수덕사는 여성 출가자가 많아 비구니대중이 비구스님들보다 훨씬 많이 살고 있다.
나의 행자시절에도 남행자에 비해 두 배나 많은 20여명의 여행자들이 있었다. 그때 수덕사는 본사 주지스님께서 행자들에게 직접 <초발심자경문>을 강의했는데, 남녀 행자들이 함께 모여 공부를 했었다. 단호 스님도 그렇게 같이 <초발심>을 배운 행자도반이다. 당시 행자들은 산중의 네 곳에서 살았는데, 수덕사와 총림선원 정혜사에 남행자들이, 비구니선원 견성암과 일엽 스님이 노년에 창건한 환희대에서 여행자들이 살았다.
<초발심>은 주지스님 일정에 따라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오후에 강의를 했다. 행자들은 공양주며 채공, 갱두 소임을 살며 바쁜 가운데 염불과 의식을 익히고, 또 거의 매일 울력이 있어 피곤한 가운데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초발심>을 반드시 외워야 한다는 주지스님의 엄명은 행자들을 초긴장하게 만들었다. 공부를 처음 시작할 무렵 30여명의 남, 여 행자들이 모이면 각자의 개성과 그들이 사는 대중처소의 특색이 드러나곤 했다.
단호 스님은, 일엽 스님의 직계권속들이 사는 환희대에서 공부를 하러 다녔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라 처음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행자들에 비해 다른 뭔가가 느껴지곤 했다. 마치 집안의 맏이처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런 저런 일들을 챙겼다.
환희대는 그때부터 월송 스님이 감원으로 계신다. 월송 스님은 체격이 남자처럼 장대해서 꼭 비구스님을 보는 듯하지만 그 품성이 아주 부드럽고 섬세하다. 산중의 대소사는 물론 신도들을 챙김에 있어서도 빈틈이 없기로 유명하다. 단호 스님은 이런 월송 스님의 성품을 빼닮았다. 환희대 대중들의 살림살이가 다들 짬지고 꼼꼼하지만 단호 스님은 특히 마음이 가는 도반이다.
사실 당시 수덕사에는 유례없이 행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승복이 모자라 행자들의 삭발이 늦어지기도 했고, 수계할 때 가사장삼을 구입하는 것도 사중에 적은 부담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는 스님들의 여벌옷과 가사장삼을 얻어 수계를 하게 되었다. 나는 체구가 조금 커서 옷을 얻기가 쉽지 않았는데, 마침 월송 스님이 여벌 장삼을 보내주어 그 장삼을 입게 되었다. 이후 나는 그 장삼을 10여년간 입었다.
계를 받고 도반들이 다들 선방이며 강원으로 갔지만 나는 산중에 남아 법당소임을 살고 있을 때였다. 단호 스님은 일이 있어 큰절에 들리면 꼭 찾아서 수행의 인연지을 것을 당부하곤 했다.
출가인의 본분사가 수행정진해서 불조의 혜명을 잇는 것 이상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없는데, 소임도 중요하지만 공부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 단호 스님의 말이었다. 공부도 때가 있는지라 때를 만나 인연을 짓지 못하면 공부의 인연이 멀어질까봐 진정으로 걱정했다.
몇 년이 지난 뒤 다들 강원을 마치고 제방에서 정진중일 때 수계도반들에게 새로운 공부 인연을 짓게 하는데도 단호 스님 역할이 컸다.
<초발심>을 같이 배운 도반들에게 해제철에 설정 스님을 모시고 선어록 강의들을 것을 제안했고 다들 뜻을 같이했던 것이다. 처음 행자시절 도반들이 모은 작은 마음은 산중과 종단 전체에 퍼져나가 좋은 인연을 엮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수덕사는 비구 비구니 대중이 잘 화합해서 사는 도량으로 손꼽힌다. 만공스님이래로 산중의 어른 스님들께서 서로 존중하고 도우며 살아가는 모범을 보이시니 후학들이 어떻게 그 본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덕사에는 비구니스님들이 산중의 어른 비구스님을 잘 모시고, 단호 스님도 나의 은사스님을 자신의 은사스님 챙기듯 정성을 다해 모시니 때로 시봉으로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단호 스님은 작은 절의 주지소임을 보고 있다. 같이 주지를 살면서도 공부 인연을 놓치지 말라는 그 염려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늘 멈춤이 없다. ■서산 부석사 주지
이번호로 ‘스님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6년동안 ‘스님이야기’를 써주신 스님들과 애독해 주신 독자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