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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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뜻으로 간직하면서 허탈히 戒를 생각지 말아야
앞뒤가 다 걸림없이 뚫린 퉁소같이 살아야

여러분! 오늘 오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마음공부를 증득하지 못하고 오계를 방편으로만 설하고 방편으로만 우리가 오계를 받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이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닌 까닭에 부처님의 온 누리의 그 뜻이 한 찰나에 서리니 오계를 받은 분들은 앞으로….
첫째는 악한 병고에 휘달리지 않을 것이고, 두 번째는 모두 한마음으로서 돌아가는데 공부에 게으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여우 꼬랑지라도 봐 둬야 물리가 터지고 충전이 되듯 우리가 사는 뜻이 그대로 전력과 자력과 통신력이, 그리고 광력이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오계입니다.
세 번째, 자녀들을 기르고 어머니 아버지로서 부모를 모시고 살아나가는 이 험난한 세월 속에서 한마음으로 오계 받은 사람이 낼 것이면 그 마음의 뜻이 서로서로 전달되지 않으면서도 전달되면서 이어진다는 그 밝음의 불빛. 여러분은 그저 오계만 받는다 하면 돈을 내고 가서 계를 받는데, 그것은 만약에 스님들이 돈을 모으기 위해서 계를 준다 하고 계첩을 준다고 만든다 하면 그것은 엄벌에 처할 것입니다.
여러분, 똑똑히 잘 생각하시고, 계첩이나 또는 오늘 서로 계를 주고받은 그 뜻을 마음으로서 새겨야지 물질로서 주고받은 그런 걸로만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준 사람도 책임이 있고 받은 사람도 책임이 있고 부처님의 뜻도 책임이 있으니 여러분은 잘 생각해서 그 계를 지키시도록 하며 또 그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넷째는 우리가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 하죠? 그러나 이 오계를 오늘 받은 사람들에 한해서는 만약에 승천하는 길이, 천당길이 지금 청와대라면, 비유하는 겁니다, 청와대에는 근거가 없이는, 표를 안 가지고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린 오계를 받은 뜻의 그 확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생전에만 이렇게 거추장스럽게 방편으로 그냥 떨어뜨린 게 아닙니다. 나도 책임이 있는 겁니다. 물론 나도 책임이 있는 것은 여러분과 나와, 내가 만약에 거짓으로 했다면 내 책임이 아주 클 것입니다.
그래서 내 책임이 크다면, 여러 신도님들에게 만약에 허탈해 하면서 거짓으로서 설했다면, 내가 진실된 마음으로서 여러분에게 계를 설하지 않았다면, 내가 만약에 구렁이가 돼서 여러 신도님의 의식이 그 비늘마다 들어서 그것을 내놓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책임이 얼마나 중요하고 막대한지 여러분은 그것을 깊이 모르실 겁니다. 그러니 나는 오늘 여러분한테 계를 설한 것을, 나는 주는 사이 없이 주었으니 여러분도 받는 사이 없이 받아서 오직 뜻으로 간직하면서 허탈히 그것을 생각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지금 선풍한 것이 뭐냐 하면 각 절에서 계를 준다 하면 그저 무조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가서 받는 것을 능사로 생각하시는데,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계를 허탈히 거짓으로서 방편으로 했다면 그건 한데 떨어지는 설이다.’ 이런 문제입니다. “한데 떨어지지 않게 하라. 한마디를 하더라도 한데 떨어지지 않게 하라. 계를 설하되 한데 떨어지지 않게 하라.”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있는, 그때 그 시절에 있던 그 뜻은 오늘날까지도 생생하게 지금 여러분이 하고 계십니다. 삼천 년 전이 오늘이요, 삼천 년 후가 오늘입니다.
오늘이라는 이 자체에서 찰나찰나 공해서 변해 돌아가고 부서지고, 모든 게 찰나찰나 늙어지고 젊었다가도 자라고, 자라면서 늙어지고 없어지고 또 생하고 이러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잘 마음을 가다듬어서 한마음으로서 한마음에서 나오는 걸 한마음에다 되입력할 수 있는 그런 믿음과 진실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또 계 받은 사람이 딴 데 가서 또 좋을 줄 알고 계를 받으면 여러분은 오늘의 그 계 받은 게 무효가 될 것입니다. 애써 그냥 피땀을 흘리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어서 살 연구 하는 사람이 옳게, 단 1불을 쓴다 하더라도 옳게 써야지 허무하게 써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오늘도 어저께도 가만히 보니까 이 장소가 좁습니다. 하지만 좁으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마음 깊이 생각하면서 옹기종기 앉아서, 또 옹기종기 앉아 있지 못하면 저기서라도 들으면 또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살림이 궁색한데 이 절에서 크게 한다고 집만 넓히고 그런대서야 말이 됩니까? 그러나 우리는 정성스럽게 되는 한, 십시일반으로 되는 한 넓히자는 거지 여러분이 집이 없이 굶주리면서 이 절간을 넓히자 하는 거는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궁색하고 고독하고 가난하고 병고에 휘달린다면 이 못난 나 역시 마음이 아픕니다. 똑같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화목하고 또는 병고가 없어지고 가난이 없어지고 가환이 없어지고 업보가 무너진다면 여러분의 그 밝은 마음과 내 밝은 마음이 지속되면서 아마 웃음으로써 꽃이 필 것입니다.
우리 스님들이 목탁만 쳐서 중이 아니고 머릴 깎아서 중이 아니고 옷을 입어서 중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시간마다 나름대로 자기 머리를 자기가 채찍으로써 치면서, 오늘도 자기 채찍으로써 자기 머리를 쳤습니다. 자기 장삼자락의 그 순색을, 그대로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중심과 중도와 중용을 그대로 실천화시키는 이런 보람 있는 오늘의 이 깊은 진실된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여러분을 지속 이끌어 갈 것입니다. 앞으로 이 스님들이 또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또 태어난다 죽는다 이런 마음도 없이 끝간 데 없이 여러분의 심부름을 싫다 안 할 것입니다.
난 다짐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따라서 지속되기도 하고 반 길을 가다가 반 길에 끊어질 수도 있고 현실에 한 발짝도 내밀지 못한 채 끊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오계를 준 오늘, 내 책임도 있으니만큼 여러분 앞에 오늘 내가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그렇게 여러분이 오계를 받은 것이, 그리고 계첩을 받은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이 거짓이라면 여러분이 한번 지켜보고 부처님의 뜻이, 삼라만상 우주 세계, 이 세계가 말없이 바로 말이 전달되고 바로 손 없이 손이 온 누리에 꽉 차 있고 걸어다님이 없이 그 평발을 어디고, 바로 부처님의 발은 한발로 디뎠습니다. 이 엄청난 도리를, 광대무변한 이 도리를 여러분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타의에서 구하는 것은 미신 짓이요, 자의에서 구하는 것은 진실한 정(定)에 드는 바로 참선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살던 그 마음, 참마음을 바로 발견하는 옳은 길이 정에 드는 길입니다. 내가 잠시 살다가 갈 것을 뭘 그렇게 욕심이 많아서 잠시 낙엽과 같은 것을 그렇게 타의에서 나를 살려 달라고 구해야 되겠습니까? 양심도 없고 또는 자기의 그 모든, 왜 자기의 마음 이런 거 있지 않습니까? 자기의 마음도 꿋꿋하게 인간이라면 왜 남한테 빕니까? 왜 남한테 노예가 됩니까?
왜 만날 심부름꾼이 돼야 하고 왜 남한테 구걸을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농사지어서 가을이면 추수를 해 들이고 봄이면 또 심어서 또 먹고 되남고, 그 어려운 사람들을 또 퍼 주기도 하고 그렇게 살지, 여여하고 부유하게 살지 왜 마음을 가난하게 해서 그렇게 좁디좁은 골짜기에서 썩은 물이 고이게 만듭니까?
여러분은 못났든지 잘났든지 이 세상에 나온 보람이 있게, 당당하고 떳떳하게, 남의 노예가 될 게 아니라 자신이, 여북하면 자신(自神)이라고 그랬나요? 다른 신에다 빌 게 아니라 내 신에다가, 차라리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신에다가 믿고 거기에 맡겨 놓고 거기서밖에 해결 못한다는 그 믿음을 갖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쫓기고 쫓으면서, 그리고 밟히면서 이렇게 진화돼서 오늘날까지 인간의 탈을 쓰게끔 한 장본인의, 그렇게 여러분을 이끌고 여기까지 이끌어 온 장본인의 참자기를 무시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그래서 옛날에도 이렇게 비유를 했죠, 부처님께서. 어떤 사람이 마누라를 넷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첫 마누라더러 인제 죽게 되니까, 부자인데 돈을 많이 벌어 놓고 죽게 되니까 너무 원통하거든요. 그래서 첫 마누라한테 고했습니다. “내가 인제 죽게 됐으니까, 마누라! 당신과 나와 같이 갑시다.” 하니까 “나는 당신하고 못 가오.” 그러거든요. 둘째 마누라더러 또 “갑시다.” 하니까 “나도 못 가오. 당신이 좋아했지 내가 당신을 좋아한 건 아니오. 당신이 나를 좋다고 쫓아다녔지 내가 좋아서 당신을 쫓아다닌 건 아니오.” 하더랍니다. 당신하고는 영 못 가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또 셋째 마누라더러 가자고 했습니다. “내가 갈 때 혼자 가기가 너무 쓸쓸하니 당신과 나와 같이 갑시다.” 하니까 “나는 당신하고 같이 가되 묘지 앞밖에는 못 가고 화장터밖에는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럽니다. 그러니 또 쓸쓸해서 넷째 마누라더러 그랬습니다. “여보! 같이 갑시다.” 하니까 “여보,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이오! 수억겁 광년을 거치면서 당신과 나와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일 초도 떨어지지 않고 이날까지 살았거늘 올 때도 같이 왔고 갈 때도 같이 가지 그게 무슨 소리요?” 하더랍니다.
그게 누굽니까? 첫째 마누라는 내 몸뚱이를 말한 것입니다. 둘째 마누라는 재산을 말한 겁니다. 셋째 마누라는 자식과 부인, 가족입니다. 넷째 마누라는 바로 자기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그거를 비유할 때 첫째 마누라인 그 자기 몸도 같이 가지 못한다 이거죠. 그래 몸도 다 내버리고 갈 거예요. 여러분이 쓰다듬고 뭐 멋 내고 뭐 그냥 머리 빗고 목욕하고 바르고 이러던 이 몸뚱이도 같이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 둘째 마누라인 돈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좋아서 쫓아다니느라고 병까지 들면서 쫓아다녀도 그 돈이 말을 하기를 “당신이 좋아서 쫓아다닌 거지 내가 좋아서 당신을 쫓아다닌 게 아닌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쫓아가겠소?”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가족들도 보세요. 자식들을 아무리 애지중지하고 기르고 그냥 내가 쓴 것을 먹고 단 거를 주고, 내가 굶더라도 자식들을 먹이고 이렇게 길렀는데도 데리고 갈 수 없어요. 같이 가 주지 못해요. 살아서도 다섯 가지를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어저께 그랬죠, 다섯 가지를 대신 못해 준다고. 아무리 부모 자식이라 하더라도 대신 못해 준다고요. 또는 부부가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대신 못해 준다고요. 그렇듯이 가족이 바로 화장터나 묘 터까지밖에는 못 가 준다는 거죠. 그것도 인연에 따라서 한데 합쳐서, 짚단 모여서 매 놓듯이 비가 와도 천둥이 몰아쳐도 서로 쓰러지지 않고 살자고 인연을 맺은 바로 가족이죠. 그래 그 가족들도 또 쫓아갈 수 없고, 오로지 자기 주인공만이 이 세상을 같이 살고 자기를 또 형성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림을 그려서 못나게 했든지 잘나게 했든지, 자기 작품을 자기가 그려서 자기 모습을 턱 해 놓고, 형성시켜 놓고 자기가 그 속에 들어서 그냥 왈가왈부하면서 같이 살고 있는 거죠. 우리 이 몸뚱이가 없으면 무효고 분별이 없으면 목석이고, 바로 생명이 없으면 아예 보이지도 않는 거죠. 그러니 또 무효죠. 그렇듯이 주인공만이 변소에 가도 같이 갈 수 있고 아파도 같이 아플 수 있고 또는 웃어도 같이 웃을 수 있고 사랑을 해도 언제나 일분일초도 떠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내 주인공밖엔 없는 것이죠, 늙으나 젊으나. 그냥 고독해도 같이 살아갈 수 있고 자비를 베풀 수 있고, 구경을 가도 같이 구경하고 올 수 있고 똥을 누어도 같이 똥을 누고요. 허허허, 참 그런 사랑이라면 능히 할 수 있는 거죠.
한 철 살고 헤어질 거라면, 그거 무슨 한 철을 살겠습니까? 그래서 스님들은요, 다 버리고 한 철 살 수 있는 인연들을 맞지 않으려고 이렇게 머리 깎고 모두가 내가 되고 남이 하나도 없듯이 모든 걸 버리고 입산을 해서 모든 걸 얻어 가지고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그 자체를, 그 능력을, 그 중용을 해서 보이지 않는 데 중생들이나 보이는 데 중생들이나 다 같이 한마음으로 건질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연비를 하면서도 ‘자성본래불!’ 여기 이렇게 돼 있죠? 이거 잘 보세요. 그래서 옛날부터도 그랬지만 나 역시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여러분한테 오늘 이렇게 오계를 설하면서 아주 진실하게 또는 거짓 없이, 저 애들이 지금 연비를 했는데 아주 돌아서서 중병을 앓지 않을 거라는 거, 이것만 해도 고마운 걸 말로 할 수 없는데 앞으로의 그 인연으로 인해서 죽어도 천당문이 활짝 열렸다 이 소립니다. 청와대 들어갈 때 그냥 그저 여기 마크 하나만 붙였으니까 인정을 받은 거 아닙니까. 들어가는 거야, 그냥. 문 닫고 들어오지 말라 이런 소리가 없거든. 그와 같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오늘 오계 받은 게 얼마나 중요하고 진실하고 참된지, 오늘 바로 여러분이 그런 연비를 받으셨습니다.

삼계에 두루 하니
그 두루 하는 그 모습들이여, 영가들이여!
그 생명 그 자체가 바로 영가들이 따로 없고
현재 생명들이 따로 없는
바로 도심으로서의 여여하고 생활이 실상이니
한마음으로 뭉쳐 그 도리를 알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일체의 모든, 여러분이 나왔으니깐 여러분이 일거리가 있고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것을 다 한마음에다 놓고 거기서만 해결할 수 있다 하는 믿음을 갖고 그렇게 사신다면 바로 우리 일상생활이 참선이요, 또 어저께가 없고 내일이 없는 오늘의 앞뒤가 다 걸림 없이 뚫린 퉁소와 같이, 대나무 퉁소와 같이 앞뒤 뚫린 그런 것과 같이 우리가 일상생활을 산다면 그것이 참선이요, 망상이라고 많이 끄달리고 모두 끊으려고 앨 쓰지 말고 그 망상이 바로 부처를 이루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끊지 않고 그대로 거기 놓고 들어가는 것이 열반의 참선입니다. 열반의 길로 그냥 들어가는 아주 코스라 이겁니다.
우리 마음은 체가 없어서 바로 은산철벽도 없는 것이고 사방이 막힘도 없고 지붕도 막힘도 없고 모두가 뚫렸어요. 사방이 툭 터졌으니 내 갈 길이 걸림이 있으며 내 가는 길에 또는 막힘이 있으랴! 이겁니다. 내 마음먹는 대로 내 마음은 거침없이 지구 바깥을 벗어나고 어느 혹성이라도, 어느 펄펄 끓는 물속에라도…. 여러분! 지금 사시는 의식이 바로 ‘물이 깊어서 나는 못 간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몸뚱이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 의식이, 죽어도 그냥 그 의식이 남아 있어서 이런 공부를 안 하면 그냥 남아 있어 가지곤 ‘아이고! 저 물에 빠져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있어서 못 건너가는 겁니다. 기독교에서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하죠? 부처님께서도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하죠? 그러한 강을 건너는 데도 내가 마음이 체가 없어서 한순간에 빛보다 더 빨리 건너 갈 건데도 불구하고 살아생전에 그 의식과 참된 마음을 몰라서 그냥 그 의식대로 가지고 아이고, 저 물에 빠져서 죽을까 봐 건너가질 못하는 거죠. 그 의식으로 사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또 불이 있으면 불의 소용돌이가 있으면 불로 건너가질 못해요. 그 속에 들어가질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불 소용돌이가 있으니까 뜨거워서 거기 타 죽을까 봐 못 들어가거든요. 그러니 부처님 세계를 맛볼 수가 없는 거죠. 우리가 살아생전에 그곳을 그렇게 건너가지 못한다면 죽어선들 건너가리까? 또 그뿐입니까? 은산철벽이 막혀 있으면 그게 높고 두꺼워서 뚫질 못해서 못 간다는 겁니다. 살아생전에 그렇게 그거 넘어가지 못 넘어 가죠. 귀신들이 득시글득시글 하고 독사가 득시글득시글 한데 그거 잡아먹힐까 봐 또 못 갑니다. 그러니 그것만 보더라도 네 군데가 다 그냥 못 건너가죠? 살아서 그렇게 못 건너가죠? 청와대도 그렇게 못 들어가게 해서 못 들어가죠. 그게 의식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내 마음에 체가 없는데 뭣 때문에 강을 못 건너가느냐, 불을 못 지나가느냐, 독사가 있는 데 왜 못 가느냐, 은산철벽을 왜 못 가느냐. 이걸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난 여러분한테 연습시키는 거예요. 죽어도 거기에 걸리지 않게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진실하게 걸어가는 이 참사람의 참뜻을 여러분은 아셔야 하고, 자유인의 길이라는 것이 그렇게 소중하다는 거를 아셔야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넉넉하고 지혜 있고 다 물리가 터져서, 마음으로 창살 없는 감옥을 만들어 놓고 헤매다가 그 감옥을 그냥 툭 쳐 버리고 한 찰나에 나서는 그런 당당한 여러분이 되시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의식, 오늘도 지금 연비를 하고 이렇게 오계를 여러분한테 주었는데 오늘 그렇게 연비를 하고 오계를 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하려고 그래도 업이 많아서 두꺼우면 물리가 터지질 않아요. 아둔해서. 아둔해서 철겹이 됐거든요. 그러니 그것이 얼른 뚫어지기가 쉬우랴 이겁니다. 어느 땐가는 그 철겹을 한 그 업이 이 공부를 계속해 나가다 보면 그냥 뚫려서 그냥 통과하게끔 할 수만 있다면, 오늘의 연비 받는 분들에게 그렇게 내린 겁니다. 언젠가는 가볍게 터질 겁니다. 우리가 한마음으로 뭉쳐서 돌아갈 때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옛날에도 유교에서 이런 말을 했죠. 막대기를 한 줌 해 오라고 그랬습니다. 막대기를 같이 한 줌을 쥐고 꺾어 보니까 안 꺾어지거든요. 그런데 회초리 하나를 꺾는 데는 금방 꺾입니다. 여러분이 그 마음이 두루 하는 마음으로, 포괄적인 마음으로 한마음이 된다면 절대로 누가 꺾고 들어올 수가 없는 집입니다. 그러나 자기 개별적인 마음 가지고 어허, 내 주인공 찾으랬으니까 ‘나 하나’ 요것만 생각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왜냐? 이것은 포괄적인 우주 전체 삼라대천세계의 근본이 인간의 마음에 있으며 태양의 근본도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니라. 이 세상의 산하대지의 근본도 바로 마음의 근본이라는 뜻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이 뜻은, 여러분이 왜 배웠습니까? 이거를 알면서도 실천을 못하는 거야 어쩌겠습니까? 그러니 여기서 밝게 켜는 그 장본인의 그 발전소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거지 딴 데서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지구의 주인은 여러분이고 그 지구는 우리의 집입니다. 집과 주인과 둘이 아닌 까닭에 지구에서도 대기권이 있고 나쁜 것은 레이다망이 막아서 이렇게 하고 있는 이런 문제들도 개발되고 알게 되고 천문학으로서의 그걸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죠.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0년 12월 9일 수계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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