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홍가사 왜곡사례 많아/법현(태고종 사회부장)
TV 드라마나 영화 또는 연극이나 뮤지컬 등에서 스님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면서 가사의 고증에 관한 문제점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신돈’이라는 MBC 주말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편조 스님(신돈)이 홍가사를 수하는데 머리를 기르고 다니더니 태고 보우 국사는 밤색가사를 수하게 해서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태고종 포교원장 무공 스님이 정식 이의서를 제출했다. 그것을 받아들인 MBC가 겨우 한 일은 태고 보우 스님이 밤색도 붉은 색도 아닌 어정쩡한 빛깔의 가사를 수하고 오게한 것. 신돈은 또 갑자기 밤색을 입고 나오고 있다.
또 12월 2일에 방영된 MBC의 ‘직지’라는 기획드라마도 직지심체요절을 지은 백운경한 스님과 묘덕이라는 여인(여승)의 사랑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또 백운 스님의 가사를 밤색가사를 수하게 하더니 선암사와 필자의 이의제기에 역시 필름작업을 거쳐 어정쩡한 중간색 가사를 수하게 했다.
한국불교의 전통가사는 삼국시대부터 홍가사가 분명하다. 고구려시대에 홍가사를 수하고 있었음이 쌍영총의 고분벽화에 드러나고, 신라시대에는 자장율사, 원효대사, 의상대사 등의 영정 및 자장율사가 문수보살로부터 받았다는 석가여래의 가사 등에서 홍가사를 수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홍색가사가 많이 쓰였으며 일제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현재의 밤색 가사(장삼)는 1950년대에 조계종이 창종하면서 보조국사의 괴색가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일반화된 것이다.
덧붙여 가사를 드리우는 시간과 장소의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불교에서는 참선, 강의 등을 하거나 공양, 법회, 예불을 올릴 때 법의를 걸쳤다. 그런데 드라마 속에서는 법회의식 등 뿐 아니라 외출을 할 때에는 가사를 드리운다. 심지어는 술을 마시거나 여인과 수작을 나눌 때에도 가사를 드리우고 나와서 문제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드라마 자문에 신중해야 한다. 잘못된 고증은 어느 한 종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를 왜곡시키고 결국 불교의 본 모습을 왜곡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제작자들도 계속 잘못을 저지르지 말고 제대로 아는 이, 아는 곳에 자문을 하기 바란다.
과거사를 정리하기 전에/황경환(초기불전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그토록 집착하던 ‘진실ㆍ화해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출범한단다. 100여 년 동안에 걸쳐 일어났던 과거사의 진실을 캔다고 말이다. 잠깐 지난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자.
1900년대가 시작 될 즈음 조선이 일제의 침탈을 받아 몰락하여 36년 이란 긴 세월을 속박과 억압속에 나라 잃은 슬픔에 시달리는 시절을 겪었다. 해방이 되자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6ㆍ25, 연합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다시 이어진 민족의 갈등은 결국 38선으로 남과 북이 갈라진 채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고, 배고픔에 찌들었던 보릿고개를 넘어 잘살아 보자고 외쳐 됐던 박정희 정권의 제3공화국을 거쳐 한국은 지금에 이르렀다.
자동차, 선박, 철강, 반도체, IT기술, 건설, 플랜트 분야, 이제는 BT라고 하는 바이오산업까지 세계 최고의 자리에서 용트림을 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우리 국민들의 이 위대한 힘을 느낀다.
이제 우리 국민들의 앞에 놓인 과제는 그러한 과거 점철이 다시 되풀이 되지 않도록 더 충분한 대안과 제도를 만들고 겸손하게 한발 한발 전진하는 일이다.
모든 일의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러한 일에는 그러한 조건적 발생의 법칙이 있는 법이다. 지난날의 역사를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잘 말해주듯 남인, 북인, 벽파, 공파, 노론, 소론 하면서 그 많은 세월을 당파싸움질과 아욕을 위한 아첨, 탐관오리들의 기막힌 권력 남용 등 역사가들이 말하는 그 과거사는 과연 지난 100여년의 세월과는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누구나 인정하듯 역사는 지난 과거사가 함께 섞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시작의 원인 발생은 그러한 조건이 있으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사실 앞에 누가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 스스로가 자유스럽다고 단정할 수 있으랴. 물론 선구자적인 삶을 살다간 사람들도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지만, 이것을 모든 국민에게 원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래서 진실, 과거사 정리라는 말은 어쩐지 내 귀에는 어떤 사람이 모래를 쪄서 밥을 만들고,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겠다고 하는 한국불교에서 가끔 비유로 인용되는 말처럼 들린다.
신라의 고승 원효 스님은 “붕새(朋鳥)가 청운(靑雲)에 날아 오르면 산악에 나지막함을 알게 되고 하백(河 )이 개천을 떠나 넓은 바다에 당도하면 정작 개천의 비좁음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했다. 이제 21세기를 향한 세계화를 넘어 ‘우주화’ 시대에 정치인이나 정부,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우리 국민 앞에 보여야 하는 진정한 리더십은 진실이니 화합이니 하는 현수막을 앞세우지 말고 진정한 진실과 화합은 관용과 용서 그리고 넓은 이해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미움의 독기를 먼저 씻어 내는 일이 시급한 문제리라.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부질없는 일에 미움으로 질주하는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미움의 독기는 자신을 망가뜨리고 이웃을 망가뜨리고, 사회와 국가를 망가뜨리는 무서운 요소의 한 부분이라는 선지자들의 한결같은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부처님 당시 어느 제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존자시여, 편안히 잠자고 슬픈 일 없음이 인간의 행복일진데, 어떻게 하면 편안히 잠자고 슬프지 않겠습니까?”
“미움을 끊어서 편안히 잠자고, 미움을 끊어서 슬프지 않다네.”
잘해보자고 출발하는 진실ㆍ화해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또 다른 미움의 씨가 되는 위원회로 전락하지 않을까 정말 걱정스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