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사회 포럼’에 대한 ‘후기’
지난 11월 23일 ‘불교와 사회’의 창립 포럼이 열렸습니다. 플래카드는 “현대사회에 있어 불교는 무엇인가”입니다. 장소가 조계사 옆에 새로 지어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이라는 것이 더욱 뜻 깊었습니다.
붓다의 옛 지혜에 무어 다시 보태거나 고칠 것이 있느냐고 우엑 하는 고함소리에, 몽둥이찜질이 날아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역사를 돌이켜 보십시오. 불교는 자신의 오래된 지혜를 자산으로 하되, 지역의 문화와 습속에 따라 적응하고, 그리고 또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 면모를 달리해 왔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불교’가 있게 된 것입니다. 불교는 그런 점에서 하나의 이름이 아닙니다.
불교와 사회는 불이(不二)
세상이 너무 변했으므로, 당연, 새 불교가 필요합니다. 그러자면 달라진 세상과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활발발하게 소통해 나갈 일입니다. 이 회향(廻向)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불교의 물줄기를 바꾼 대승(大乘)이 바로 그런 혁신 마인드의 산물 아닙니까. 대승이란 출가 비구 비구니의 수행과, 재가 우바새 우바이의 삶의 현장이 연대된 새 불교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이 한국불교의 상징인 원효의 삶이었고, 또한 대승의 끝에서 최상승을 제창한 혜능의 무식(無識)불교의 취지였습니다.
한국불교가 산중으로 유폐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불교는 불교의 길을 가고, 세상은 세상의 길을 가는” 격절이 심화되었습니다. 불교와 사회는 불이(不二), 둘이 아닙니다! 옛 어법을 빌리자면, 사회를 떠난 불교는 말라비틀어질 것이고, 불교를 떠난 사회는 썩어문드러질 것입니다.
창립 포럼의 화두는 크게 두 가지 노선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1) ‘불교의 현대적 적응(How to apply Buddhism to contemporary society)’이라고 부를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2) ‘현대사회의 불교적 경영(How to manage contemporary Korea in a Buddhistic way)’이라고 부를 만한 것입니다. 첫 발제는 1)에, 두 번째와 세 번째 발제는 2)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불교와 현대사회
1. 조성택 교수님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공(空), 즉 비어있기에, 다른 문화와 관습에 유연하고 적응적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서구인들은 바로 그 빈 자리, 혹은 최소한(minimalism) 위에, 생활의 지혜라는 이름으로, 개인주의적이고 엘리트중심적 불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일러줍니다.
글로벌시대에 한국의 불교도 기존의 관행과 권위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외국의 불교도 도입하고, 필요하다면 경전도 새로 쓰자고 권합니다.
이에 대해 김종욱 교수님은 불교의 사회적 목소리에서 대안을 찾습니다. 생활불교와 국제포교도 물론 중요하지만, 불교의 활로, 혹은 ‘새 적극적 패러다임’은 사회적 이슈를 선점하고, 국가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높이는데서 찾아질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 불교의 활로는 ‘사회적 비판’보다,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쪽, 즉 불교본연의 기능에 있음을 믿는다고 토를 달았습니다.
불교와 정치
2. 두번째 박세일 교수님은 “만일 부처님께서 2005년 한국의 이 땅에 오셨다면 무어라고 말씀하실까”로 말문을 열고, 붓다께서는 아마도 대중의 분노와 탐욕을 선동하는 포퓰리즘이 현재 한국정치의 근본병폐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자답했습니다.
아울러 경제 문제는 강남특구에 세금폭탄으로 해결하고, 교육은 서울대 폐지로 해결하고, 균형발전은 수도이전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단순 이분법의 위험을 크게 지적하실 것이라고 설파합니다.
과거사 문제 또한 우리가 안고 있는 공업(共業)이고, 그 연기법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자 합니다. 부처님은 연기법에서, 나는 지금 여기의 이 상황을 만든데 대해 전체적 책임을 지고 있으며, 거기 기여한 타자의 책임은 오히려 최소한이라는 지혜를 가르치지 않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각범 교수님은 이렇게 세상을 고치지기 전에, 자기 속의 원한과 독소부터 정화하는 노력을 우선해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근본 동의하면서, 전국민을 이 기묘한 동원의 역사적 공범으로 몰아가지 말라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 세션에 대해 성태용 교수님이 강한 이의를 제기하셨습니다. 지금 두 분은 특정한 정치적 이념을 불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또 다른 포퓰리즘’을 훤전하는 것이 아니냐고요. 성 교수님은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포럼이란, 특정한 주장에 대해, 이의와 반론이 잇따르고, 이것이 토론을 통해 부딪치고 화해하는 마당인데, 발제자와 토론자가 같은 이야기를 판에 박은 듯이. “나보다 잘 썼네”하고 합창하면 어떡하느냐고 말입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저는 “저런, 사회자도 잘못 뽑으셨습니다”라고 눙치고 있는데, 저 뒷쪽에서 나이 지긋하신 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토론이랍시고 치고 받고 하는 것은 TV에서 신물나게 보아왔소. 우리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사회를 향한 불교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왔소. 두 분의 말씀을 막지 마시오.”
불교와 경영
3. 세번째 발제는 ‘불교와 경영’입니다. 노부호 교수님은 기업의 목표를 불교식으로 업그레이드하자고 제안합니다. 경영의 목표는 이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그러므로 효율을 따지기보다 가치를 중시하는 기업문화를 정착시키자고 역설했습니다. 그러자면 삶과 일의 의미에 대한 혁명적 전환이 필요하겠지요. 명상이나 충격적 경험, 그리고 타자와 전체에 대한 관계성의 인식이 깊어갈 때, 그 무상(無常)과 무소유의 비전 위에서 생산과 조직의 전 시스템이 혁명적 변화를 겪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지혜경영연구소 손기원 소장님은 이처럼 무아나 무소유같은 불교적 원리를 경영의 목표로 삼기보다 -아마도 실패하기 쉽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업경영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명상이나 지혜같은 전통불교를 가르치는 것이 더 효율적이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거꾸로 된 충고 하나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불교로 세상을 경영하겠다고만 말고, 불교집단에 기업경영의 노하우를 접목시키는 것도 시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종합토론에서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졌습니다. 왜 불교기업인클럽이 없느냐는 한탄에서, 앞으로의 포럼은 ‘연구’보다는 ‘현장’ 중심으로 가자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 중 제 가슴을 깊이 찌른 말이 있습니다. “정치고 경영이고 간에, 그 종국적 목적은 사바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포럼은 불교의 이 오래된, 성스러운 첫 번째 진리를 가슴에 품고 열어갈 것을 사부대중 모두에게 제안하는 바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