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후 눈밝은 이 만나면 가차없는 평가 따라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한 ‘귀담아 들을’ 이야기
7~8년 전 한글번역본 두 권을 내 이름을 달고서 세상에 내놓은 적이 있다. 그 책 원저자인 혜홍각범(慧洪覺範 1071~1128)선사의 〈선림승보전>은 처음엔 일백명의 선사행적을 수록했다. 그런데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선사가 책이 나오기 전에 먼저 읽고서 그 가운데 19명의 기록을 추려내어 불태워 버렸다.
의아하게 생각한 각범 스님은 황벽사의 지(知) 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무슨 이유로 종고 선사가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는 넋두리를 한다. 하지만 이런 불쾌함을 뒤로 하고 출판할 때는 그 19명을 빼고 책을 냈다. 대혜 스님 안목과 고언을 기꺼이 받아들인 결과다. 이러한 감수자 대혜와 저술자 각범의 태도를 높이 평가한 이가 명나라 무온서중(無 恕中 1309~1386) 선사였다.
무온 선사는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한 시대를 같이 사는 승려들에게 내뱉기 쉽지않은 말을 할줄 알았다. 그는 세상에 나가기를 싫어했고, 행각과 안거로 일관한 삶을 산 까닭에 인정에 끄달리지 않고 할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선사는 임제종 양기파 축원묘도(竺元妙道) 선사의 법을 이었다. 선승이면서도 역사적 안목을 가진 시대의 지성이기도 했다. 특히 선사는 안목없이 만연하는 어록의 무차별적 간행에 대해 가차없이 일갈하고 있다.
당시의 대표적 어록 생산가 삼인방으로 사명(四明)땅 출신 소천강(炤千江) 화상, 천태인(天台人) 원직지(圓直指) 화상, 양주(揚州)사람인 혁휴암(奕休菴) 화상 등이라고 구체적으로 그 이름까지 지목하고 있다. 더 심한 것은 이 세 사람에 대한 가혹하리만치 냉정한 인물평이다.
그들은 온갖 번뇌에 얽힌 범부에 불과하며 안목없는 머리깎은 외도일 뿐이라고 했다. 함량미달이라는 자질론적 언급인 셈이다. 공부한 바가 없으니 불조화두의 근본 뜻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면서 현학적인 말로 어리석은 자신의 해석을 잘못 붙여놓고 ‘제 마음대로’ ‘어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그의 지적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한 술 더 떠 간행비용을 신도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의 직설은 성역이 없다. 보나마나 이 무리들은 당시의 세력가였을 것이다. 이들을 바로 잡아주어야 할 법상위 앉은 큰어른들까지 그들을 칭찬하고 심지어 어떤 조실은 엉터리 어록에다가 서문과 발문까지 써주고 있다고 당시의 흐름을 탄식하고 있다. 모두가 선문(禪門)에 끼친 죄로 인하여 함께 지옥에 떨어질 일이라고 통탄했다.
이처럼 비분강개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드디어 방(棒)을 가차없이 날릴 기회가 왔다. 소천강 화상의 제자인 휘장주(暉藏主) 스님을 만난 것이다. 휘장주 역시 <금강경>을 조목조목 분석하고 제멋대로 송(頌)을 붙여 간행 배포한 전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무슨 일인지 무온 선사가 주석하고 있던 동곡사(桐谷寺)에 찾아왔다. 또 새 책을 얼렁뚱땅 한 권 만들어 감수라도 받으러 왔는지 모르겠다. 그렇잖아도 벼르고 있었는데 제대로 딱 걸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이 경에다가 제목을 붙였으며, 무엇으로 종지를 삼았는가?”
덕담은 고사하고 예기치 못한 서릿발같은 질문에 아연한 휘 화상은 묵묵부답 좌불안석이었다. 덕산 선사가 곁에 있었다면 삼십방이 아니라 몽둥이로 찜질을 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건 명나라 시대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다. 어떤 어록이건 간행이후 눈 밝은 임자를 만나면 가차없는 평가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괜히 선지(禪旨)도 없는 엉뚱한 소리 어설프게 늘어놓았다가 세세생생 등줄기에 식은 땀 흐르는 일 만들지 않는 것도 또 다른 ‘불립문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