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그리고 늘 여기 계시는 여래들
수보리가 일어나 “합장 공경하면서, 붓다(佛)께 사뢰었다. ‘희귀한 일입니다. 세존(世尊)이시여. 여래(如來)는 보살들을 잘 지켜주시며, 또한 잘 이끌어 주십니다.’” 而白佛言, 希有世尊,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붓다
오늘은 여기 등장하는 배역들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동안 늘 독송하던 것이지만, 누가 누군지 몰라 답답했던 분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보리는 ‘붓다’를 향해, ‘세존’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여래’께서는 하고 묻는데... 이 세 분은 같은 분입니까, 서로 다른 분들입니까.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는 뜻이고, ‘세존’은 ‘세상(世)에서 가장 고귀한(尊) 분’이라는 뜻입니다. 붓다는 산스크리트 buddha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한자로는 불타(佛陀)로 음역되었다가, 줄여서 불(佛)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해 세존은 의미를 살린 번역입니다. 두 용어의 성격이 전혀 다르지요.
지금 맥락에서 ‘붓다’는 객관적 호칭인데 비해, ‘세존’은 앞에 선 분을 향해 올리는 존칭이지만, 가리키는 대상은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여래는 무엇입니까. 이 말을 하자면 곡절이 좀 복잡합니다. 우선 붓다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라는 것을 일러두겠습니다. 요컨대 깨달은 사람은 다 붓다입니다.
물론, 기원전 6세기에 석가족의 왕자로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불교의 복음을 열었던 창시자 고타마는 한 분이지만요.
불교는 그 ‘깨달음’을 그러나 독점하지 않습니다. 그게 위대하고도 위대합니다. 고타마 붓다는 자신이 특별한 은총이나 선택에 의해 깨달음을 점지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그 길을 열어갔으되, 그것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열려있다고 말한 점에서 아무런 특권 의식이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처음이 아니다. 나 이전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길은 늘 옛길이었다.”
불교는 그 말에 따라 이를테면 붓다들의 주기를 계산하고, 왔다 간 분들의 계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금강경> ‘제10장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을 들추어 보십시오. 거기 연등불(디판카라)이 등장하고 있지요. 연등불은 고타마 그분의 바로 앞 전임자 붓다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그분의 처소에서 오랫동안 법을 익히고 수많은 세월을 거친 후, 새로운 붓다로 등장합니다.
여래
그래서 붓다는 “이 땅에 왔다가 가고, 또 다시 오고 가실 분”입니다. 그래서 여래(如來)라고도 부릅니다. ‘오시고 또 가시는’의 뜻을 다 적자면 ‘여래여거(如來如去)’인데, 너무 길어 여래로 줄여 부릅니다.
선사라면 여래가 “그냥 이렇게 왔다가 갔다”고 말하기를 좋아할 것입니다. 바람처럼 흔적 없이, 목적 없이 때가 되면 꽃처럼 피었다가, 때가 되면 인연따라 떠나는 걸림없는 삶을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 오고감에 무슨 토를 달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아주 싫어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스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앞에서 살핀 야부 또한 바로 그 경계를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중생들인 우리는 그렇게 무심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오셨다. 사바에 고통받는 우리네 속세의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천상의 영원한 축복을 마다하고, 굳이 이 더러운 땅 예토(穢土)로 강림하셨도다.”
이 간절한 비원은 그분이 가시는 걸음도 차마 ‘그냥 그렇게’ 보내드리지 못합니다. 그분은 우리네 중생들을 일깨우기 위해, “올바른 길을 밟고 진리를 향해 가셨다”고 말합니다. 올바른 길이란 구체적으로, 사정제의 마지막 진리, 구원에 이르는 훈련인 팔정도(八正道), 줄여 삼학(三學)을 일컫는 것이겠습니다.
호념(護念)
여래는 붓다처럼 한 분뿐이 아니라 여러 분입니다. 기원전 6세기 샤카족의 왕자로 태어나 출가, 고행하여 보리수 아래 깨달음을 얻고, 40여년 법의 바퀴를 굴리다가 입적하신 그분, 고타마 붓다는 사실은, 위에서 말했듯이 줄줄이 이어진 그 수많은 여래들의 행렬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붓다 이전에만도 28명이 있었느니, 등등 설은 분분합니다. 당연히 붓다 이후에도 수많은 여래가 와서 붓다가 되었고, 지금도 그분들이 지구촌 여러 곳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여래들이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며 역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네 콩깍지 덮인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금강경>은 말합니다. 그 수많은 여래들이 진리를 향해 발심하고, 사람노릇을 하고자 분투하는 정신의 영웅들을 보호하고 이끌어주고 있다고요…
여래는 바로 그 사람들, 진리를 향해 발심하고, 사람노릇을 하고자 분투하는 정신적 영웅들,즉 보살(菩薩)들을 보호하고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원문은 ‘호념(護念)’이라고 불렀습니다.
호념(護念)이란 “늘 곁에서 지키며,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길, 진리를 향해 내딛는 걸음은 정말 외롭습니다. 수닷타 장자(須達)도 그러했지요. 저번 기원정사의 설화에서 그의 주저와 두려움에 적어준 적이 있습니다.
불성(佛性)
“그는 새벽이 오기 전에 어둠 속에서 몇 번을 망설였습니다. 한 걸음을 내디디면 다시는 이전의 익숙했던 삶으로 돌아올 것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때 야차 시바카가 조용히 속삭입니다. ‘코끼리와 말, 나귀 수레 백대도, 보석 귀고리로 장식한 수백명의 여인들도, 네가 내딛는 한 걸음의 16분의 1의 가치도 없다. 나아가라, 장자여. 나아가라, 물러서지 마라!’” 드디어 수닷타 장자는 인디아나 존스의 해리슨 포드처럼, 절벽 앞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그때 보이지 않던 길이 생겨 자신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여래는 어디 있습니까. 정말 여래(如來)를 본 사람이 있기나 합니까. 도대체 어디에 계셔, 이 작은 나를 지켜주고 이끌어 주고 있다 하시는 것입니까.
기독교의 비유를 빌리자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느끼고, 또한 그 원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래들의 보호는 기실 자기 내부에 있는 불성의 다이아몬드가 가진 힘입니다. 자기 속의 불성과, 이웃 속의 불성, 그리고 우주에 편만한 선한 힘들은 서로 연관 연기(緣起)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래께서 오고 가기 전에, 그분은 이미, 그리고 늘 여기 계시다고 하겠습니다. 딴데 믿고 의지할 생각 마십시오. 여래는 오직 내 마음 속에 있고, 길도 또한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금강경> 제 29장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은 이렇게 놀래킵니다. “여래께서는 이렇게 오시지도, 그렇게 가시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