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로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 기린 곳
룸비니에 마야당, 김제에 성모암 있어
룸비니의 마야당은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을 모신 곳이다. 부석사에는 당나라에서 신라까지 의상대사를 쫓아온 낭자를 위한 한 평정도 크기의 선묘당(善妙堂)이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조사전의 길목을 천년동안 지키고 서 있다. 대사를 위해 그 무거운 바위를 공중에 띄우는 이적을 보여 천년가람의 터를 닦아주었다.
김제 만경벌에는 진묵대사의 어머니를 모신 성모암(聖母庵)이 있다. ‘무자손 천년향화지지(無子孫 千年香火之地)라고 했다. 자손이 없어도 천년동안 제사를 받을 수 있는 명당이라고 하여 찾는 사람이 많다. 특히 출가한 스님네들은 자손없이 천년동안 제사를 받기 위해서 일부러라도 들러야 할 곳으로 알려진 그 전설은 공개된 비밀이기도 하다. 이는 법손의 융성과 불법의 흥성을 바라는 또 다른 마음의 표현이라 하겠다.
지나는 길에 한번 들렀다. 절은 마을 구석에 다소 초라해 보였지만 모친의 무덤만큼은 단아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고시례전’에는 영정도 함께 모셔놓았다.
6조혜능 선사의 스승인 5조홍인 대사가 머물던 호북성 황매현 동산의 오조사에는 성모전(聖母殿)이 있다. 이름 그대로 홍인 스님 어머니를 기리는 전각이다. 그런데 홍인 스님의 어머니는 처녀였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이건 핑계가 아니라 정말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4조 도신 스님이 파두산에서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 산중에 이름없는 노승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노장은 늘 소나무만 심는 것으로 수행을 대신하고 있는 까닭에 재송도인(栽松道人)이라고 불렸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신 스님에게 법을 청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퇴짜를 놓는 것이었다. 속내는, 설해줘 봤자 늙어서 별로 써먹지도 못할 것이라는게 그 이유였다.
설사 도를 깨친다고 한들 널리 펼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몸을 바꾸어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노승은 그 길로 황매산을 떠났다. 마침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처녀를 보고서 정중히 물었다. “쉬어갈 수 있겠소?”
“제 부모님이 저 마을에 살고 있으니 부탁해 보십시오.”
“그대의 허락이 필요하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노승은 사라졌다. 노승이 원하는 바는 그 집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그 처녀의 태에서 열 달을 쉬고서 다시 태어날 생각으로 동의를 구했던 것이다. 그녀는 주씨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그 날 이후 태기가 있었다. 그 부모는 남부끄럽다며 엄청 꾸중을 했다. 딸로서는 영문을 모르는 일이니 참으로 억울했다. 그러나 달빛이 그녀가 가는 곳을 따라 뜨락과 방안으로 비치어 밤새도록 대낮처럼 밝았으며 그윽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 함께 기뻐하였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께 하직인사를 올리고는 옛날 도신 선사를 찾아갔다.
“재송(栽松)이가 왔습니다.”
“무엇으로 그대인줄 증명하려는가?”
아이는 방 앞에 자기가 심어놓은 소나무를 가리키면서 ‘린포체’임을 알렸다.
그리하여 4조 법을 이어 5조가 되었다.
홍인의 제자들은 스승을 낳아준 그 처녀어머니를 위해 위로겸 보은 의미로 오조사에 성모전을 지었고 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향화를 올리고 있다. 무위자(無爲子)스님의 오조선사 영정찬은 이를 잘 압축해놓고 있다.
누군들 아버지가 없으리오만 조사에겐 오직 어머니뿐(人孰無父祖獨有母)
그 어머니가 누구신가 하면 주씨 집안의 막내딸이었네(其母爲誰周氏季女)
도도히 흐르는 냇물이 큰 강으로 흘러가듯이(濁港滔滔入大江)
문 앞은 변함없이 장안으로 가는 길이로다(門前依舊長安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