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몸은 왜 우리와 다를까
2장은 수보리가 예를 갖추어 붓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혜능은 제자가 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는, 지금 수보리처럼 다섯 가지 의식(儀式)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리하자면, “1) 자리에서 일어나, 2) 옷차림을 수습하고, 3) 오른쪽 어깨 죽지를 벗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면서 4) 손을 모으고, 우러러보되, 스승에게 눈을 떼지 말며, 5) ‘한 마음’으로 공경하며 질문을 드린다.” (弟子請益, 先行五種儀. 一者從座而起. 二者端整衣服 三者偏祖右肩, 右膝著地. 四者合掌瞻仰尊顔, 目不暫捨. 五者一心恭敬, 以伸問辭.)
오늘 강의는 단어 두 개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장로’라는 말의 곡절이고, 다른 하나는 ‘희유’라는 말의 함축입니다.
‘장로’라는 말의 곡절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장로(長老)라는 말입니다. “아니, 이 기독교 용어를 불교도 쓰고 있었단 말이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그런 적이 있습니다. 양희은의 “일곱 송이 수선화”가 우리 곡인 줄 알고 있다가, 어느 날 브라더스 포(The Brothers Four)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야, 얼마나 유명하길래 미국 애들이 번안해서 부르냐” 하고 감탄했다가, 한바탕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 <금강경>에서 분명하듯이, 장로는 본시 불교용어입니다. 이 말은 <어르신>을 뜻하는 팔리어의 ‘테라’, 혹은 산스크리트어의 ‘스타비라’를 중국어로 옮길 때 채택한 것입니다. 육조 혜능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 장로라 했는가. 덕이 높고 나이도 드셨기에 장로라고 부른다(何名長老, 德尊年高, 故名長老.)”
불교사를 좀 짚어볼까요. 붓다 입멸후 약 100년이 지나서 교단이 최초로 분열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한편에는 계율에 유연하고 재가와의 유대를 더 강화시키려는 젊은 부류들의 혈기가 있었고, 반대편에는 붓다 이래 내려온 승가의 전통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는 어르신네들의 고집이 부닥쳤습니다. 이 중에서 젊은 집단을 이름 그대로 대중부(大衆部 Mahasanghika), 나이든 집단을 장로부(長老部 Theravada, Sthaviravada)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장로부 대신에, 같은 어르신을 뜻하는 말인 상좌부(上座部)를 쓰기도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대승은 대중부로부터 발전했습니다. 다른 쪽 장로부 혹은 상좌부는 실론 등 남방에서 전승되었기에 실론상좌부라고도 부릅니다.
어쨌거나 지금 <어르신네>를 뜻하는 장로와 상좌, 이 두 이름은 원래의 의미를 잃고 말았지요. 장로는 아무래도 기독교에 넘겨준 듯하고, 그리고 상좌는 불교의 전유물이기는 하지만, 뜻이 너무 달라졌습니다. 상좌는 원래 ‘윗자리(上席)’를 차지하고 계신 어르신인데, 지금은 특정 원로스님의 제자, 혹은 초심자의 뜻으로 쓰고 있지 않습니까. 역사와 상황에 따라 말의 의미는 진화하고 변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거꾸로(?) 선 경우는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달라진 의미와 용법이 못마땅하다하여 되돌려 놓을 생각일랑 아예 마십시오. 언어는 생명체 같은 것이라 쓰는 대중이 곧 판정자입니다. 지금 불교가 기독교에게 ‘장로’라는 용어를 도로 내놓으라고 청구소송을 할 수는 없겠고, 또 상좌라는 말도 이제 그만 원래의 원로격을 되찾아주자고 캠페인을 벌일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기준은 ‘현행’입니다. 언어에 관한 한, 우리는 ‘오늘 그리고 여기’라는 판관에 무조건 복종하고, 경청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네티즌들이 쓰는 어지러운 말을 어떡할 것이냐에서, 그리고 최근 분란이 되었던 불교용어 표준화 또한 이 원칙에 입각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 원칙은 그러나, 용어들의 기원을 캐고, 역사를 짚으며, 중첩된 의미의 지층을 탐색하는 노력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권장합니다. 의미의 역사적 지층과 현재적 지배 사이, 그 차이와 엇갈림의 ‘노님’에서 새로운 지식과 학습이 태어날 것입니다.
무엇이 ‘희유’한가
수보리는 “희귀합니다”로 말문을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본문에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세존의 “대체 무엇이 그리도 희귀하냐”에 대해, 혜능은 다음 세 가지를 짚어주고 있습니다. “希有略說三義. 第一希有, 能捨金輪王位. 第二希有身長丈六, 紫磨金容, 三十二相, 八十種好, 三界無比. 第三希有, 性能舍吐八萬四千法, 三身圓備, 以具上三義, 故云希有也.”
하나씩 자세히 들어보겠습니다.
1) 붓다가 왕궁의 지위와 안락함을 내버린 것. “금 바퀴를 굴리는 왕의 지위를 능히 버리시고 출가하다.” 모든 코드가 지위와 재물에 맞추어져 있는 우리네 혈안에 견주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햄릿의 어법으로는 ‘존재의 여부’에, 불교식으로는 ‘생사의 비밀’에 유성출가(踰城出家), 길을 나선 것은 진정 희귀하고도 희귀한 일입니다.
2) 붓다의 특이한 신체와 모습. 이 점이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금강경>은 ‘붓다의 여러 가지 몸’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우리가 절간에서 보는 부처님들은 우리와는 닮지 않았지요. 대웅전이나 적광전이나 원통전이나 무량수전이나, 거기 계신 부처님들이 사람 몸보다 훨씬 크고, 또 색깔은 금색이며, 머리는 흑인들처럼 짧고 꼬불꼬불 말려있고, 이마에 혹(?)도 하나 나 있고, 또 보통 사람들보다 몸피가 좋고, 또 자세히 보십시오. 옷 주름 뒤 성기는 전혀 도드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등 뒤로는 둥그런 후광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 특징들은 붓다의 자연적 신체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빛나는 몸’ 혹은 ‘영광에 싸인 몸’을 그려낸 것입니다. 혜능은 이 영광의 몸이 “삼계(三界)에는 비할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심신수련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사람의 몸의 특징이 바뀐다는 것은 인도의 오랜 전통적 인식이었고, 불교도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특징들’은 크게 32개, 그리고 다른 세세한 것들이 80개 있다고 합니다. ‘32상(相) 80종호(種好)’로 불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3) 무엇이 세번째로 희귀할까요. 첫 번째 희귀한 것은 ‘결단’이고, 두 번째 것은 ‘모습(위의)’이니, 마지막 것은 당연히 ‘덕성’이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혜능의 표현이 좀 까다롭습니다. 번역해 보면, “세 번째 희유는, 성(性)이 능히 팔만사천 법을 함토(含吐)하고, 삼신(三身)이 원비(圓備)하였기, 그래서 희유하다고 했다.”
이 말은 “붓다의 덕성과 지혜가 팔만 사천의 법문을 자유자재로 설파할 만큼 되었고, 또 그로 하여 인간으로서 완전한 영적 성숙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붓다의 몸은 그리하여 육신(色身)이면서 영적 성숙과 축복으로 빛나며(報身), 나아가 중생의 고통을 듣고, 세상의 진리를 전파해주게까지(化身) 되었습니다.
이야말로 희귀한 중의 희귀한 일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다시없는 사건, 기독교의 어법으로 하자면 ‘굿 뉴스(福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