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축약해 보면 사람의 상호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겠고, 따라서 사람 잘 만나는 것이 큰 인연이요 복인 것을 알겠다. 출세간의 길을 걷는 스님들의 인연법이나 복이라는 것도 세속과 크게 다를 바 없겠지만, 모든 소유로부터 벗어나 출가를 했으니, 눈밝은 선지식을 만나는 것이 큰 인연이요 복이다.
그런데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고 자신을 탁마해 줄 수 있는 도반까지 없다면 얼마나 박복한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좋은 스승이나 도반이 없다고 낙담할 것은 없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올바른 수행관이 중요하고, 주변의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도량만 있다면 도반을 대신해 탁마를 받게 될 것이고, 선지식을 만날 좋은 인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나는 해공 스님과 대중처소에서 함께 생활을 했었다. 젊지만 FM으로 중노릇을 하는 스님이다. 보통 외출을 할때 사중이나 다른 스님의 차를 이용해도 되지만, 해공 스님은 자신을 위해 나왔다 되돌아 가는 불필요한 수고를 거부하며,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걷는다.
그렇다고 답답한 친구는 아니다. 대중과 쉽게 어울리며, 또 우스개 소리가 나올 때도 선문답하듯 잘 받아 넘겨 대중 화합에 있어서 그저 ‘만점’인 그런 스님이다.
당시 대중중에 암에 걸린 스님이 있었다. 수술을 하려고 했지만, 이미 다른 장기에 상당히 전이되어 수술을 포기했는데 항암 치료라도 해보자는 의견에 따라, 한동안 통원치료를 다녔다.
그러나 본인은 암을 제거하고, 수술 경과가 좋아서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대중은 병자에게 최선을 다하자며 항암에 좋다는 음식이며 녹차를 준비하고, 기공(氣功)을 권했지만, 투병스님의 컨디션에 따라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우울해 했었다.
이렇게 모든 대중이 힘들었지만, 투병 스님 옆방에 있던 해공 스님의 수고는 가장 헌신적이고 대단했다.
투병 스님은 항암치료를 받고 후유증이나 진통으로 괴로우면, 그러한 모습을 대중들에게 굳이 보이고 싶지 않다며 애써 피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하지 않아 간병하는 해공 스님이 몹시 마음 아파했다. 해공 스님은, 항상 병자의 자존심이 상할까 조심스러워했다.
밤에라도 옆방에서 무슨 기척이라도 들리면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상태를 묻고 마사지를 해주곤 했다. 법당에서 기도할 때는 하염없이 절을 하며 투병하는 스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부처님께 발원했다. 해공 스님의 이러한 모습은 대중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어느날 새벽, 병자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같아 들어가 보니, 숨을 가쁘게 쉬면서 자신을 일으켜 달라고 했다. 앉혀 주었더니 “내가 살 수 있을까?” 라고 물어, 해공 스님은 “스님, 힘내세요” 위로를 하면서 새벽 내내 마사지를 해주다 어느덧 잠이 들었단다. 그러다 깨어보니 자신의 품속에서 투병 스님이 입적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자신은 생사라는 것이, 한 호흡지간이란 선지식의 말씀이 생생한 화두가 되었고, 더욱 발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토로했다.
한번은 보살 한분이 찾아와 남편이 빙의로 고생하고 있다며 구병시식을 해달라 하여 해공 스님이 큰 곤욕을 치렀다.
느지막한 시간, 명부전에 시식단을 차려놓고 처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같이 염불을 하는데 20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뒤를 둘러보더니 눈을 부라리며 해괴망칙한 얼굴모습을 보였다. 기분은 좋을리 없지만 구병시식을 중간에 마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계속 기도를 하는데 그 처사가 갑자기 시식단에 있는 촛대를 휘두르며 벌떡 일어섰다.
해공 스님도 일어나 처사의 행동을 제지하며, 마치 한판의 씨름판이 벌어지듯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나도 뛰어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목탁으로 처사의 엉덩이를 몇 차례 때리면서 구병시식을 간신히 마쳤던 적이 있었다.
남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끼치지 않으려고 하면서 모든일에 최선을 다하는 해공 스님.
해공 스님의 외모는 부드럽고 심성 또한 어질다. 그러나 구병시식을 할 때 대담하게 대처하는 자세며, 암투병 스님을 위한 성실한 간병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원력있는 수행자 모습을 보여 주는 듯 하다.
■남양주 무량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