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들이 정말 내 것일까
시간 지나면 하나 둘씩 떠나갈텐데 말입니다
노총각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한때 그는 그럭저럭 잘 나가던 벤처사업가였지만 사업이 망하자 엄청난 카드빚만 안은 아주 불쌍하고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살아갈 의미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가 이제 믿을 데라고는 결혼 밖에 없었습니다.
‘결혼을 하면 뭔가 마음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빈털터리 남자에게 시집올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는 꾀를 내었습니다.
으리으리한 인테리어가 제대로 갖추어진 거대한 저택과 명품 시계며 소지품, 하다못해 양복과 신발까지 최고급 브랜드로 빌렸습니다.
결혼정보회사를 통해서 만난 여자와의 첫 대면 시간동안 말입니다. 그 시간안에 여자의 마음을 빼앗으면 되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과연 남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여자는 근사한 집안과 남자의 품위있는 옷차림에 정신을 빼앗기는 것 같았습니다. 남자는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여자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빌려온 모든 물건들이 계약서에 써놓은 대여시간을 채워가자 하나씩 그의 몸에서 떠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구두가, 다음에는 값비싼 라이터가, 시계가, 반지가…. 결국 그가 입고 있던 고급양복마저 그의 몸에서 떠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남자는 떠나가는 물건들을 붙잡느라 안간힘을 썼습니다만 그 물건들은 모두 남의 것을 빌려온 것이어서 시간이 되면 주인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포기하고 맙니다.
결국 남자에게는 팬티 한 장만 겨우 남게 되었고 그 초라한 모습으로 남자는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청혼하였습니다. 여자가 승낙할 리 있겠습니까? 여자의 실망스런 표정에 남자는 절규합니다.
“당신이나 나나 모두 빌린 것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것들은 떠나가고 말 것입니다. 그 일이 내게 먼저 일어났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떠나갔지만 나는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하나씩 떠나갈 때마다 진실한 나는 모습을 드러냈고 당신을 향한 사랑만이 온전하게 자리하게 되었음을…”
결국 노총각은 사랑스런 여인의 결혼승낙을 받아내었고 두 사람은 아름다운 사랑의 이중창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무대의 막은 내렸습니다.
갑자기 웬 사랑타령이냐구요?
가을이잖아요. 이런 계절에는 연극이나 뮤지컬 한 편 정도는 보아야 할 것 같아 모처럼 극장을 찾았답니다. ‘결혼’이란 제목의 이 아담하고 조촐한 뮤지컬을 감상하는데 그 대사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관객들의 박수와 함께 객석의 불이 환히 켜졌을 때 나는 노총각의 사연이 <잡보장경>에서 도깨비들을 만난 한 사내의 처지와 똑같음을 생각해내었습니다.
늦은 밤 외딴 오두막에서 귀신 둘이 시체 하나를 사이에 놓고 서로 자기가 주인이라며 싸움을 벌였습니다. 숨어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는 귀신들에 의해 끌려나오게 되고 그 사내는 시체가 누구의 것인지를 말해야했습니다.
사내는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면 다른 편 귀신의 미움을 살 것이고 그리되면 제 목숨을 가져가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에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저 분이 가지고 온 것”이라며 오두막에 들어온 귀신을 가리켰습니다.
그 순간 나중에 들어온 귀신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사내의 손과 발과 다리와 몸통을 비틀어 뽑아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먼저 귀신이 차례대로 시체의 사지와 몸통을 뽑아서 사내에게 붙여주었습니다.
사내는 아프기도 하거니와 귀신들의 조화에 얼이 나가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지요. 실컷 난리를 피우던 두 귀신은 문득 싸움을 그치더니 주변에 흩어진 사내의 손발들을 먹어치운 뒤 홀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귀신들이 사라지고 나자 그제야 제정신이 든 사내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대체 이 몸은 나의 몸인가? 시체의 몸인가? 근데 나는 지금 ‘내 몸’이라고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이것들이 정말 내 것 맞는가요? 시간이 되면 다 떠나갈텐데 그런데도 내 것이 맞을까요? 진짜 내 것이라는 것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황금빛 은행잎들이 만추의 비를 맞아 거리를 노랗게 물들이던 지난 토요일 밤. 서울 명동의 후미진 골목 끝 극장에서 한 노총각이 빌려온 것들을 모두 떠나보낸 뒤에 마침내 사랑을 찾아 결혼에 골인하였듯이 나도 ‘진짜 나’를 찾아 삶에 골인해야겠다며 총총히 귀가를 서둘렀던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