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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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2부16강 제2장, 수보리 일어나 가르침을 청하다/한국학중앙연구원
<반야심경> 사리불, <금강경> 수보리

몇 회의 해설로, 야부의 격외의 선, 촌철살인이 우리가 읽는 <금강경>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의 전광석화 같은 선기를 제 무딘 붓이 한사코 붙들어 보려 했는데, 그 번개의 꼬리를 잡기, 글쎄, 턱없이 역부족이었습니다. 아직 노래가 더 있으나, 그만 접고 제 2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야기는, 탁발을 마치고 거처로 돌아온 붓다에게, 장로 “수보리(善現)가 일어나(起) 질문을 던지는(請) 것”으로 시작합니다.
서막이 끝나고 연극은 이제 본격 본론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수보리는 대중들을 대표하여 질문 중의 질문을 던집니다. “위대한 진리를 향해 발심(發心)한 사람들은 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길을 나서야 합니까.” 붓다는 그 질문을 가상히 여기시고, “내 이제 대답해 주겠으니, 새겨들으라”고 말합니다. 여기까지가 2장의 내용입니다.

제 2장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원문] 時長老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希有世尊,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世尊善男子善女人,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善女人,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唯然世尊, 願樂欲聞.
[언해] 시(時)에 장로 수보리가 대중(大衆)에 있어, 바로 좌(座)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 벗고, 오른 무릎 땅에 대어, 합장공경하사와, 부처께 사뢰되, “드무신 세존하! 여래가 제(諸) 보살을 이대(*잘) 호지(護持)하야 념(念)하시며, 제 보살을 이대 부촉(咐囑)하시나니. 세존하!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ㅅ마음 발하니, 반드시 어찌 주(住)하며, 어찌 그 마음을 항복(降伏)시키리이꼬?”
부처께서 일르시되, “좋다, 좋다, 수보리야! 네 말같이, 여래가 제 보살을 이대 호념(護念)하며, 제 보살을 이대 부촉하나니. 네 이제 자세히 들어라. 반드시 너 위하여 일르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ㅅ심을 발하니, 반드시 이같이 주(住)하며, 이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킬지니라.”
“유연(唯然), 세존하! 듣잡고저 원요(願樂)하삽노이다.”
[번역] 이때 수보리 어른이, 대중 속에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가사를 벗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며, 합장 공경하면서, 붓다께 사뢰었다. “희귀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如來)는 보살들을 잘 지켜주시며, 또한 잘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여기 착한 남자 착한 여인이, 더 없이 높고 위대한 깨달음을 얻고자 할 때, 어떻게 그 마음을 다잡고, 어떻게 그 마음을 제어해야 하겠습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수보리여, 훌륭하다. 네가 말한 대로, 여래는 보살들을 잘 지켜주시며, 또한 잘 이끌어 주시고 계신다. 너 이제 똑똑히 들어라. 내 너를 위하여 말하리라. 착한 남자 착한 여인이, 더 없이 높고 위대한 깨달음을 얻고자 할 때, 그 마음을 반드시 이렇게 다잡고, 이렇게 제어해야 하느니라.”
“그리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기꺼이 듣기를 원하옵니다.”

수보리와 사리불
장로 수보리(수부티)는 붓다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강의 처음에 기원정사(祗樹給孤獨園)의 건립을 둘러싼 아름다운 이야기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수보리는 바로 그 사람, 황금 동전을 깔아 기원정사를 지은 아나타핀디카, 즉 수닷타 장자의 조카입니다. 정사를 완공한 기념으로 붓다가 행한 강연에 감화를 받아 출가했습니다. 다른 유파의 인물들에게 핍박과 모욕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합니다.
붓다의 제자 가운데, 소승에서의 중심인물은 단연 사리불(사리푸트라)이었습니다. 그는 붓다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일찍이 교리를 정비하고 교단을 체계화해 놓았습니다. 대승에 오면 그러나, 이 사리불은 이해력이 좀 뒤떨어진, 대승의 큰 뜻을 잘 알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반야심경>은 붓다가 못난(?) 그를 “깨우치기 위해,” 가르침을 베푸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에 등장하는 수보리의 위상은 좀 다릅니다.
그는 붓다와 깨달음을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붓다와 대등하다면 어폐가 있겠지만, 어깨 근처에는 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대승 반야부 경전들이, 그를 누구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과 공(空)의 취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혜능 또한 수보리를, ‘우리(唐)말로, 해공(解空), 즉 공(空)의 이해에 뛰어난 사람으로 의역한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별 도움 안 되는(?) 제자들
<논어>에서 공자는 첫째가는 제자 안연(顔淵)을 두고,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평했습니다. 의아해 하는 제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는 도통 질문을 하거나 토를 다는 법이 없다. 그는 나를 깨우쳐 주는 바가 없다. 그러나, 물러나 행하는 것을 보고, 그가 내 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자에 대한 공자의 찬탄과 동지의식이 여기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안연은 나이 서른이 채 못 되어서 공자보다 일찍 죽었고, 공자는 슬픔에 못 이겨, “하늘이 나를 버렸다(天喪我)”고 울부짖었습니다. 제자들이 체신을 들먹이자, “그가 아니면, 대체 누구를 위해서 울겠느냐”고 뿌리쳤습니다. 유교가 근엄한 도학자의 얼굴로 굳어 있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친 김에 에피소드 하나를 더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슬퍼하던 공자를 보고, 안연의 아버지가 장례비용에 쓰자고, 공자의 낡은 수레를 팔 것을 제안합니다. 겹관을 살 비용이 모자란다는 것이었습지요.
이 제안에 공자의 반응이, 독자 여러분 생각에, 어땠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재물이 어디 중한가,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 그쯤이야!” 했을까요.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입니다. 공자는 토라져서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내 아들이 죽었을 때도 겉관은 못해 주었다.” 불편한 심기로 기어코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나는 한때 대부를 지낸 몸으로, 수레 없이 걸어다닐 수는 없다. 암, 없고말고…” 이 쩨쩨한 고집(?)에 후대의 학자들이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별별 해석과 체면 살리기가 다 횡행했으나, 저는 공자의 말을 액면 그대로 읽습니다. 그는 진정, 사람의 피와 살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 이거요, 다 <논어>에 실린, 믿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각설, 붓다와 수부티의 관계가 이에 견줄 만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말을 안 해도 뜻을 짐작하는 사람, 한 마디 말이면 백 마디를 가슴에 풀어놓는 사람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좋겠지요. 동양 전통에서는 유교든 노장이든, 불교든 그래서, 이신전심(以心傳心),‘말 이전에 오가는 교감’을 가장 중시합니다.
200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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