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在),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저번 시간에 내 드린 화두를 점검하기로 합니다. 그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객이 오거든 꼭 내다보아야 한다. 그대로 보내서도 안 되고, 뒤따라가다간 맞는다.”
이게 무슨 수수께끼같은 말일까요. 전체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전해 드립니다.
야부는 “여시아문 일시불 재(在)…”의 바로 그 재(在)라는 글자에 대해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9. [在]. 客來須看也. 不得放過, 隨後便打. 獨坐一爐香, 金文誦兩行. 可憐車馬客, 門外任他忙.
뜬금없는 소리 하나 할까요. “客來須看也. 不得放過, 隨後便打”를 처음에는 “客來須看也不得, 放過, 隨後便打”로 읽을까도 했습니다. 그럴 때 뜻은 “객이 온다고 보려 하지만, 그게 어디 되겠느냐. 그냥 보냈다가, 뒤따라가서 패버려라”가 됩니다.
깊은 뜻은 어쨌거나 간에, 이 해석도 그럭저럭 의미가 통해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번역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왜냐고요. 다음은 그 곡절입니다.
재(在), 내가 머물러야 할 자리
‘재’라는 글자는 “있다”는 뜻입니다. 야부는 그 글자를 “부처님께서 어디 어디에 계실 때”의 단순한 장소적 의미로 읽지 않고, 인간이 진정 있어야 할 자리, 머물러야 할 그 궁극처로 짚어주고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이 화두는 이방의 기독교에도 있었지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인간의 일은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고투라 아니할 것입니까. 대체 이 자리는 어디입니까. 우리가 짐작하듯이, 그리고 불교가 일반적으로 말하듯이, 사람이 머물러야 할 자리는, 깨달음을 얻어 밖의 유혹과 안의 마군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함허가 덧붙인 대로, 그곳은 “고요,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는 자리(寂然不動)”이고, “홀로 암자에 앉아 있으니, 일 없이 적막하다(獨坐庵中寂無事)”로 상징되는 곳입니다.
이것이 깨달은 자의 내면 풍경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여기 안심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이 ‘고요’ 속에서만 살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절간에서도 밥은 짓고 빨래는 해야 하고, 찾아오는 손님 접대도 마다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손님’은 사람과 인연 맺고 세상사를 처리하는 그 모든 활동들을 총칭합니다. 출가자는 이 근본 화두에 응답해야 합니다.
집밖을 나서 길 위에 서기
산 속에서도 수행자들은 승가라는 ‘집단’ 속에 있고, 또 사부대중들과 인연되어 있으며, 또 불교가 사회적 책임을 이 시대에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당위에서 볼 때도, 산 속에서 새와 다람쥐와만 친구하는 절연된 삶은 진정 불교적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이 딜레마는 불교, 특히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부닥친 근본 화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야부의 해답을 다시 들어봅시다. 위 인용의 번역입니다.
9. “[在]라, 객이 오거든 꼭 내다보아야 한다. 그대로 보내서도 안 되고, 뒤따라가다간 맞는다(客來須看也. 不得放過, 隨後便打)… 홀로 앉아 화로에 향불 하나 피워놓고, 경전 두어 줄을 읊으니, 가련타, 수레 마차를 타고 다니는 이들이여. 문밖이 소란스러워도, 그래도 그냥 둘 밖에….”
야부의 이 노래에 대해 함허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해 주었습니다.
“若一向坐在家舍, 則途中事關. 一向行在途中, 則家裡事疏. 要須在家舍而不虧途中事, 在途中而不昧家裡事, 始得. 所以道妙喜豈容無著問, 和爭負絶流機.”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길 위의 일들이 소홀해지고, 그렇다고 길 위에만 얼쩡대고 있으면 집안 일이 성글어질 것이다. 요컨대 집안에 있으면서도 길 위의 일들을 빠뜨리지 않고, 길 위에 있으면서도 집안일에 성성(惺惺)해야지, 된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묘희(妙喜)가 어찌 무착(無著)의 물음을 용납하겠으며, 구화( 和)가 어찌 유기(流機)를 끊는 일을 저버리겠느냐.’
대강 뜻을 짐작하실 줄 압니다. 다만 마지막 구절, “묘희(妙喜)가 어찌 무착(無著)의 물음을 용납하겠으며, 구화( 和)가 어찌 유기(流機)를 끊는 일을 저버리겠느냐”는 구절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시는 분이 있으면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손님과 도적을 어떻게 구분하나
여기서 ‘집안일(家裡事)’이란 자신과 홀로 대면하는 일이고, ‘길 위의 일(途中事)’란 세상과 더불어 대화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둘 중 하나가 빠져도 안 됩니다.
세속인들은 길 위의 일에 바쁘고, 출가자들은 집안사(?)에 바쁩니다. 야부는 절대 고독 속에서 자기 대면에 치중하고 있는 출가자들에게, 세상사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발하고 있습니다!
“손님이 오면 무조건 맞이해라(客來須看也)!” 함허는 이 말이 “만약 손님을 만나면 잘 대접해 드려라(若遇客來須善待)”라는 뜻이라고 명확하게 해 줍니다.
이 구절이 실질 의미하는 바는 그럼 무엇일까요. 함허는 주역(周易)의 말을 빌려, 감이수통(感而遂通), 즉 “인연과 계기가 너를 부를 때, 그때 적극 응답하라”는 뜻이라고 일러줍니다.
홀로 고요히 있을 때와 달리, 손님을 나가 맞는 일은 위험하고 위태롭습니다. 기껏 지켜온 자신을 잃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깥일에 신경 쓰다 보면, 맑게 깨어있던 정신은 혼탁해지고, 내면의 고요는 흐트러지고, 자기 대면의 끈은 어느새 놓치기 십상입니다.
손님은 이때 도적이 됩니다. 이곳을 경계, 또 경계해야 합니다. 이 그물에 걸려 넘어진 선지식들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대접하려던 손님이 “아차, 도적이구나 싶으면, 바로 나가서 몽둥이로 때려잡아야 합니다.(是客稍有賊氣在, 知有賊氣, 須打殺)”
그러니, “손님을 뒤따라가지 마십시오!” 뒤꼭지를 보인 손님은 다름아닌 도적이니… 닥친 일에 온 마음으로 집중할 뿐, 그 일의 득실에 연연해 하지 마십시오. 수연무착(隨緣無著), 그야말로, ‘인연 따라 응하되, 들러붙는 바가 없어야’ 합니다.
명예와 재산의 물거품, 그림자를 위해 자신의 귀한 불성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여래여거(如來如去), 인연이 오면 맞고,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도록 두십시오.
내가 싫다고 떠나가는 애인의 바지가랑이를 이제 그만 놓아주고, 내 뜻대로 안되는 세상사에 불평불만도 문득 그치고 줄이십시오. 그 희망심(希望心)의 흔적들을 태우고, 지금 다가오는 얼굴들과 대면하십시오.
<금강경>의 노래처럼, “과거의 영광도 흩어졌고, 미래의 기대도 환상이며, 현재의 집착도 다만 물거품일 뿐(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