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진짜 실행을 하고 자기가 진짜 해봐야!
남들은 불사를 해서 신도분들을 춥지 않게 하는데, 저는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추운데도 저 바깥에 서 있어야 하고 애들은 울고 그럴 때 보면 제가 부족해서 마음이 착잡합니다. 여러분이 추운 데 서 있는 걸 보니깐요. 허허허.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마음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서로 다 한자리에 앉아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도반이 돼서 이렇게 공부하시는 걸 볼 때 참 감개무량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가 일체 만물만생을 볼 때 동물이든 또 고등 동물인 사람이든 누구나가 차원은 다르고 모습은 다를지언정 모두가 특기 하나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비하게, 어떻게 그렇게 골고루 말은 뒷발을 주고 소는 앞 뿔을 주고 이렇듯이 말입니다. 생긴 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끔 자연의 법칙으로 그렇게 된 것을 생각하면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인간은 인간대로 일체 만법을 객관으로 들여서 주관에서 소화하고 또 배출시키고 하는 그 능력이 인간에게는 주어졌죠. 이 모두가 고등 동물인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99%는 부처라고 일컬어 말합니다. 그 기능을 모두 소화시킬 수 있고 모두 배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마음으로 그런 걸 그렇게 능히 소화시켜서 배출시킬 수 있으련만, 그거를 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죠. 물론 인간도 천차만별의 차원이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서 컴퓨터가 로봇을 작동시키는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컴퓨터가 없으면 그 로봇은 운영을 못합니다, 뿌리가 없으면 나무가 자라지 못하듯. 그거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인간의 두뇌가 컴퓨터라면, 몸은 바로 로봇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인간의 두뇌가 전체를 다 흡수해서 배출시키는 그 영향력을 다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안 그러면 안 그렇다고 그래야 나도 배우죠. 허허허.
그런데 우리가 지금 믿는 것을 어디다가 중심을 두고 믿습니까?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뺏어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누가 가엾은 나를 도와줄까요? 누가 내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 줄까요? 누가 내 가난을 알아서 해결해줄까요? 누가 내가 병이 들어서 죽어갈 때에 어루만져줄까요? 이 모두가 바로 머리 두뇌가 컴퓨터라면 내 몸을 작용시키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그런 기능을 다 송두리째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두뇌 컴퓨터를, 즉 오신통(五神通)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컴퓨터라고 이름 지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 다섯 가지의 문제를 통틀어서 원자라고 한다면 그 원자 속에서 다 소화시켜서 배출시키는 그 영향력을 가진 게 바로 자기 두뇌 컴퓨터입니다.
이래서 부처님께서도 누구를 믿느냐? 허허! ‘너 먼저 찾아라! 본래 있는 건데, 찾는 게 아니라 바로 발견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믿고 발견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가상한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거라는 거를 한 번 다시 생각을 해보셔야 할 겁니다. 우리가 보통 ‘아이고! 이렇게 바쁜데 그거 찾을 사이가 어딨어? 또 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 내가 주인공 이름 부르고 있을 사이가 어디 있느냐!’ 이러겠지만, 그거는 본래 그렇게 다섯 가지의 오신통이 한데 합쳐져서 컴퓨터라고 이름을 짓는다면, 일체를 내부에서 받아들여서, 외부의 모든 것을 일체 받아들여서 소화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그런 겁니다.
컴퓨터는 입력된 것만 해결해서 로봇이 움죽거리겠지만, 우리는 자동적인 컴퓨터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어떠한 것이 들어와도 소화시킬 수 있고 어떠한 것이 들어와도 배출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두뇌는 첨단을 요한다. 여러분 자신으로서는 ‘나는 못나서, 나는 죄가 많아서 이래!’ 이러겠지만, 그거를 아예 무시하고 들어가라는 얘깁니다. 왜? 이 두뇌의 기능은 천 년을 걸어가든 하루를 걸어가든 일 초를 걸어가든 똑같다는 얘깁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그렇게 돌아가는 그 경우에 우리가 이거는 길어서 못한다, 이것은 짧아서 잘된다, 이것은 커서 들 수가 없다는 둥 이런 건 말이 안 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여러분의 생각이지, 할 수 있고 할 수 없고가 없단 얘깁니다. 체(體)가 없는 내 마음은 바로 그림자와 같고 빛과 같아서 어디에 붙어서 돌아가지 못하고 어디에 붙어서 돌아가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천지에 끝간 데 없이 불기둥이 있다면, 그 불기둥을 끼고 수레가 중간에서 돌아간다면, 그 기능이 다 거기에 소유돼서 배출이 되고 또 들고 나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으로 이건 멈추고 구르고 그러는 것이지, 그 수레는 여전히 누가 이러든 저러든 말없이 그냥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이 그냥 놓고 그냥 더불어 같이 돌아갔으면 좋으련만 놓지를 못하는 겁니다, 생각 자체가. 그러니까 수레는 그냥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데 이 사람의 마음은, 체가 없는 마음이요,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요, 마음대로 응용할 수 있는 마음이요, 마음대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는 마음이요, 마음이 천차만별로 할 수 있건만, 뭐가 그렇게 걸려서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자기 마음을 자꾸 막습니다. ‘이건 정말 내가 할 수 없는 거야!’ 이렇게. 그것이 바로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차근차근히 쌓여 있는 바로 의식이라는 거죠. 번뇌 망상이라고 그거를 일컬어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컴퓨터에 쌓이고 쌓여서 자꾸 나오니 말입니다. 차근차근히 차례차례로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을 없애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훌렁 마음이 뛰어야 될 텐데 뛰질 못해요.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있건만 마음을 마음대로 못하니 그거 무슨 연고냐 이겁니다.
옛날에 어느 사람이 한번 이런 예가 있었죠. 남한테 보증을 서고서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그런데 어음 받은 것을 쥐고서 벌벌벌 떨고 병이 들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당한 사람들도 아마 적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그네들 것이지 당신 게 아니다.’라는 얘기요. 마음으로 다 버릴 수도 있고 다 가질 수도 있는데, 어차피 버려진 거라면 그냥 버렸으면 마음이나 편안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래야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생기지 버리지 않고는 도저히 몸을 살릴 수도 없거니와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생기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어차피 없어진 것, 아니 본래부터 자기가 그렇게 없애놓고 뭘 그렇게 애원합니까? 자기가 한 일이라면 뒤끝이 맑아야죠. 어차피 자기가 해놓은 거니까, 자기가 버린 거니깐 자기가 버린 걸로 그냥 놔야죠. 어차피 버려진 거를 그걸 마음으로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건 벌써 컴퓨터에 붙잡고 있는 입력이 들어가선 몸뚱이의 모든 의식들을 침체시킵니다. 이게 알고 보면 인간 중세계에서 아주 무서운 도리라고 봅니다. 그러니깐 인간 기능을 모두 마비시키는 거죠.
그래서 생각을 잘해라. 생각을 잘해서 입력이 된다면 앞서 잘못한 입력이 없어진다. 생각 한 번을 잘하면 대뇌를 통해서, 즉 말하자면 소뇌와 대뇌와 서로 맞먹으면서 중뇌에서 그걸 책정해가지고 명령과 더불어 사대로다가 통신을 합니다. 이건 의학적으로만 알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나가려면 상식적으로 알아야 되는 거죠. 어떻게 남이 다 해줄 때를 바랍니까? 남의 손을 빌릴 때는 빌려야 하지만, 남의 손은 20%나 30%밖에는 빌릴 수가 없으니 내가 하는 게 70%, 80%가 돼야 합니다. 제가 항상 여러분 앞에서 좀 웃고 즐기는 이런 말은 안 하고, 만날 이런 말만 한다고 그러시겠지만, 우리가 시급한 게 그거니깐 할 수 없습니다. 시급하니까요. 우리가 이 몸뚱이를 가지고 얼마나 지탱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명령을 조달해서 받고 움죽거리는 로봇이라면, 바로 명령을 내리는 사람한테 기대야죠. 그죠? 명령을 내리는 근본에 의지해야지, 그래서 근본에서 정확하게, 거기에 의지하면 정확하게 ‘어! 의지하는구나.’ 하고선 거기 입력이 돼가지고 그대로 나오게 돼 있거든요. 그리고 거기에서 딴 데로, 수레가 돌아가면서 딴 데로 자꾸 바깥으로 의지한다면 아무것도 근본에 입력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입력이 되지를 않는 걸요. 거기다 입력을 안 했는데 어떻게 입력이 됩니까? 그러니까 허사무사가 되죠. 그러니까 공덕이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죠. ‘아무리 네가 그렇게 했어도 공덕은 하나도 없느니라.’ 한 이치가 그러합니다.
속가인들은 ‘왜 부처님의 공부를 해서 해탈을 못하느냐?’ 이런 말들은 잘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살림에만 얽매여서 그렇게 하시니까 못한다고 하죠. 왜냐하면 절 살림이든 바깥의 살림이든 뭐가 다릅니까? 누구나가 정직하고 진실하게 남의 것을 바라지 말고 내가 생산해서 쓸 수 있는 대로 해야죠. 행복을 누가 갖다 주나요?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거를 누가 갖다 주나요? 또 뺏어갈 수 있나요? 뺏어갈 수도 없고 갖다 줄 수도 없는 겁니다. 대신해줄 수도 없는 겁니다. 죽으나 사나 내가 해서 내가 낫고, 내가 하고 내가 살고, 내가 이렇게 작용하고 사는 거 아닙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 게 뭐냐 하면, 살아생전에 그렇게 하고 살던 그 사람들이 자기가, 왜 탤런트들이 자기 소임을 맡아가지고 탤런트 노릇 하다가 막이 내리면 탤런트들은 자기가 탤런트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 분수를 알기 때문에 그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않게 소임을 맡아서 잘합니다. 해가지고 끝이 납니다. 막이 내립니다. 그러면은 아주 다 벗어난 듯이 좋아서 집으로 또 돌아갑니다. 탤런트들은 죽었다고 하는데 그냥 거기서만, 무대에서만 죽었지 도로 자기네 집에 와서는 아주 그냥 한잔 하면서 좋다고 합니다. 그런 걸 보십시오.
우린 지금 탤런트들이 그 소임을 맡아가지고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소임의 행을 그대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잘하든 못하든 우리가 소임을 맡은 거를 잘, 어떤 차원의 소임을 맡아서 잘하나 그걸 봐서 그 다음에 또 소임을 줍니다. 안 그렇습니까? 죽는 역할을 잘하면은 죽는 역할의 소임을 주고, 거지 노릇을 잘하면은 거지의 소임을 주고, 왕의 소임을 잘하면 왕의 소임을 주고, 이렇게 지금 우리가 그림자처럼 모두 펼쳐져서 돌아가는 사실을 우리 눈으로 현재 보고 듣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못 느끼십니까?
우리 인생이 어떻게 해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그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느니라. 너희가 소임을 그렇게 맡아가지고 너희 차원에서, 네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소임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네 모습은 다시 주어지느니라.’ 오간지옥이니 또, 그림으로 보여주는 영화에 독사지옥이 있고 그렇잖습니까? 독사굴에다가 사람을 집어넣고 이렇게 하는 거 보셨죠, 모두?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그림으로만 볼 게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우리가 컴퓨터에서 로봇을 시키듯이 정확하게, 그렇게 그 혼백을 그냥 독사굴에다가 집어넣는단 말입니다. 그러면 독사가 돼서 나오지 딴 게 돼서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었는데 한순간에 그냥 독사로 변해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을 한단 말입니다.
천차만별로 그렇게 변하고 모습이 바뀌어지는데 우리가 어떤 것을 업신여기고 어떠한 것을 귀중하다고 하겠습니까? 우리 생명만 중하고 저 하(下)의 동물들의 생명은 우습게 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생명이요 우리들의 모습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천차만별로 행동을 하기 때문에 그러한 감옥이 따로 있어서 죄를 받는 게 아니고요, 그냥 독사지옥으로 넣으면 독사로 모습을 가지고 나오게 돼 있고, 소로 넣으면 소가 돼서 나오고, 곤충에 넣으면 곤충이 돼서 나오고 이럴 뿐이에요. 그게 지옥이에요!
모두가 역행을 하고 돌아가고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일체 법계의 바다와 같은 그 속에서, 티끌마저도 전부 윤회가 돼서 즉, 바퀴로 돌아가서 바퀴의 굴림을 굴린다, 모든 보살(菩薩)들이 말입니다. 부처님은 명령만 하는 거지, 명령을 하되 보살들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예를 들어서 원자가 부처님이라면 입자들이 전부 보살들입니다. 그런데 입자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바로 원자에서 나온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입자가 돼서 나가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그것이 입자가 원자가 돼서 크게 또 이루고 이루고 이루고…. 지금 현재 우주 상태가 그러합니다.
여러분 보시기에는 한 말 되하고 한 말 되한다고 이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이 세상만사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과거ㆍ현재ㆍ미래가 한데 합쳐져서 지금 같이 돌아가고 있는 이 상태가 그렇게 혼란하고 그렇게 광대무변하고 그렇게 천차만별로 돈다 이겁니다. 이렇게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중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공덕이 될 수 있느냐? 즉 한마음으로 한손으로 한몸으로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내가 이러죠. 수많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한바다에 넣으면 한바다니라. 한몸이 되려면 이렇게 되죠. 일체 만물만생의 마음을 한마음에 넣는다면 그게 부처예요. 한마음에 넣었다가 거기에서 또 입자로 배출을 하면 그냥 보살들이 전체 이 공간 안에 허공에 꽉 차 있죠.
그런데 사람이 원하는 대로 원을 하면 그냥 거기서, 지금 전력이 들어와서 불이 켜지듯이 그대로 가설이 되는 거예요. 가설이 돼서 그냥 쭉쭉 나가요. 그래서 보살은 일체 평등한 이름이지만 그 보살 중에서 배출되는 거는 또 이름을 바꾸어서 나갑니다. 아버지가 금방 남편이 되듯이, 남편 노릇을 하려면, 아버지가 남편 노릇을 하려면 남편으로 금방 화하고 금방 아들로 화하고 이렇듯이 그 보살이라는 평등한 이름 속에서 그 이름이 약사도 되고 관세음도 됩니다. 그래서 이름 없는 이름을 수없이 다 몽땅 가졌으니까 바로 금강좌라고 합니다.
이 모두가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그냥 얘기하면 받아들이면서 그냥 이렇게 가지만, 오늘도 혜수 스님이 떡을 몇 개 가지고 올라왔어요. 내가 ‘나대신 맛 좀 봐라. 맛있나 맛이 없나.’ 그랬어요. 그러니깐 혜수 스님이 뭐라고 그러냐 하면은요, ‘제가 맛을 봐서 맛이 좋다고 할 수도 없고 맛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스님이 맛을 보셔야죠.’ 이러는 겁니다. 그러듯 여러분이 자기가 진짜 실행을 하고 진짜 자기가 그렇게 해봐야, 진실하게 해봐야 떡이 맛이 있는지 없는지를 감지할 수가 있단 얘깁니다.
말만 듣고 이름만 듣고 이론만 알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이론만 알고 ‘내가 이만큼 알았으면 됐지.’ 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난 그냥 묵묵히 얼굴만 쳐다보고 있죠. 어떻게 뭐 말을 할 수가 없죠. 말없이 한 발짝 떼어놓는 것이 우주 전체를, 한 바퀴를 돌고도 남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렇게요. 우리가 가정에서 애가 아프든지 어른이 아프든지 아파서 한번 응할 때는 벌써 주인공에 관하면서 할 때, 그게 업으로 만약에 병이 됐다거나 인과성으로 됐다거나 이런다면 반드시 과거를 들러야 되거든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과거로 들러서 오는 겁니다. 과거에서 없어져야 현실에 없어지니깐요.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그냥 이름만 부른다면 그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을 하죠. 나는 주인공 찾았는데 안되더라 이겁니다. 처음에 와서 공부할 땐 참 잘됐는데 가다가 안되더라. 세상에, 중학교를 졸업했으면 고등학교를 올라갈 생각을 안 하고, 중학교에서 배우던 것 그것만 생각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발전이 됩니까? 차를 무난히 타고 가다가 아, 내릴 때가 되면 내려야죠. 내려서 또 탈 때까지 그게, 그러면 야! 차에서 내려진다, 안된다, 안되는 것도 거기서 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안되는 걸로 되어버리는 게 아니라 되게끔 하느라고 안되는 거다, 한번 이렇게 바꿔서 생각을 한다면 아무것도 걱정이 없어요. 볼일 볼 거 보고선 차 도로 타면 되니까. 이게 한생각의 마음인데요, 한 찰나의 마음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며칠을 고민 고민 하다가 도로 타는 사람이 있고, 몇 달을 그냥 돌다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한 찰나에 그냥 돌아서 금방 차를 타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면 ‘되는 것도 법 안되는 것도 법’ 이런 소리를 왜 했겠습니까? 싸움터에 가면 후퇴하는 것은 왜 있으며 전진하는 것은 왜 있겠습니까? 후퇴하는 것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후퇴하는 거지 죽이기 위해서 후퇴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살이가 이렇게 복잡다단한데, 우리 몸뚱이의 생김생김도 그렇게 복잡하고 다단하게 생겼습니다. 명주 고름 같은 실에 가설돼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이 두뇌에 다 담겨 있는지 많은 것이 담겨 있는 그 근본 자체에서 모두 하달을 하고 움죽거리게 하니깐요. 그것뿐이 아닙니다. 정신세계 즉, 무(無)의 세계에서 한마음으로 입력이 돼서 나가는 배출은, 뭐 말로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거를 내가 보고 듣고, 행하고 알고, 그래서 이런 거 (가슴의 핀 마이크를 가리키시며) 하나를 보더라도, 우리가 해보지 않는다면 이게 잘못 떨어지는 건지 이게 잘 떨어지는 건지 잘 들리는 건지 모릅니다, 아주 안 해보면. 이것을 그래도 잘못되든 잘되든 그냥 꽂아보니까, 이게 안된 것도 알고 된 것도 알죠. 그러니 우리 모두가 실천을 해보지 않는 사람에게 한해서는 나의 마음의 발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생활의 발전도 없을 거고, 우리의 한생각이 나라를 발전시킬 수도 있는, 그런 능력을 우리는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가 하면은 또 이런 게 있죠. ‘야! 이게 어디로부터 이게 나온 것인가? 이 사람네 없애봤자야 그쪽에서 나오는 건데 아이구! 내버려두자!’ 그냥 자기네들이 짓고 자기네들이 모두 하는 거니까, 그건 참견할 게 없죠. 왜냐하면 뺏어올 수도 없고 넣어줄 수도 없는 거니깐요. 자기 스스로들 알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모두 그렇게 잘못되는 거를 잘되게끔 하신다 이러면, 그저 당시에만 좀 빤했다가 도루묵이 돼버려요. 왜냐하면 그 사람네들 근본 자체가 그렇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생활을 남이 대신 해줄 수 없죠. 남이 좀 돈을 보태서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갖다가 해주고 난 뒤에 가만히 보면, 그 사람은 도로 그 생활을 그대로 하기 때문에 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모두 각자한테 그냥 맡겨버렸습니다. ‘너희들이 잘하면 선의 인과를 가질 것이고, 악으로 저지른다면 악인이 될 것이고, 또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악과 선을 다 버리는 것도 너희 마음에 다 닿아 있느니라. 악과 선을 다 버리지 않는다면, 선으로만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악이 범해지고, 악으로 가는 사람은 선이 범해지고 이러기 때문에 둘이 아니다. 이 둘 아닌 도리를 다 버렸을 때에 비로소 보살의 역할을 하며 부처라는 이름을 바로 떨치느니라.’ 그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지 누가 갖다준 게 아닙니다. 누가 빼앗아가는 것도 아니고요.
여러분 똥 누는데 똥 누는 거 대신 똥 눠주는 사람 봤습니까? 온 근본 속에서 모두가 이뤄지는 것이 바로, 근본 능력은 몽땅 거기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컴퓨터라고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컴퓨터도 물질적인 컴퓨터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겁니다. 입력을 한 것만 나오지, 인간의 두뇌의 컴퓨터처럼 자동적으로 이렇게 들고 나고 아주 천차만별로 다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못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머리가 이렇게 있는데 이 자동적인 컴퓨터가 얼마나 광대하고 무변한 겁니까? 이 세상을 다 집어삼켜도 손색이 없으리만큼 이렇게 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중세계ㆍ하세계가 지금 동일하게 돌아가고, 지금 대천세계가 이렇게 같이 동일하게 돌아가다가, 우리 중세계라고 하는 것을 벗어버리고 그냥 대천세계로 그냥 돌아간다면, 우리 인간은 이 공기주머니에서 아마 벗어나서 평화스러울 겁니다. 모두가 달라질 겁니다. 앞으로 달라져야죠. 새삼스럽게 달라지는 게 아니라 자동적으로 달라지는 거죠. 우리 한생각, 한생각으로써 조그마한 일을 실천으로 옮겨보세요. 조그마한 내 가정으로부터 내 몸으로부터 실천을 해보다 보면 우주를 삼키고도 남음이 있어요. 그러니 그러한 마음들이 전부 펼쳐질 때 이 허공에 빛보다 더 빨리 펼쳐지면서 돌아갈 때에, 모든 사람에게 은연중으로 배합이 돼서 불국토가 되는 거죠.
질문 있습니까? 질문하세요.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4년 12월 18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