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남이가!”, 그 不二의 법문
이제 그만 남 쫓아가지 말고 <금강경>도 덮고, 제 허접한 사설도 그만 읽으라는 권유에 좀 황당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부도 그만 그 파격적 노래를 그칠 일인데, 아직 노파심이 남았나 봅니다.
혼돈(混沌)을 배우라니?
6. [一], 相隨來也. 一一, 破二成三從此出, 乾坤混沌未分前. 以是 一生參學畢.
7. [時], 如魚飮水冷暖自知. 時時, 淸風明月鎭相隨. 桃紅李白薔薇紫. 問著東君自不知.
8. [佛] 無面目說是非漢. 小名悉達, 長號釋迦. 度人無數, 攝伏群邪. 若言他是佛, 自己 成魔. 只把一枝無孔笛, 爲君吹起大平歌.
9. [在]. 客來須看也. 不得放過, 隨後便打. 獨坐一爐香, 金文誦兩行. 可憐車馬客, 門外任他忙.
호흡과 속도를 살려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보았습니다.
6. “[一]이라, 서로 따라 오는구나. 일(一)이여, 일이여, 둘로 부서지고 셋이 되는 것도 다 이로부터 비롯된다. 천지가 갈리기 전의 우주적 혼돈, 이로 하여 일생의 공부를 마쳤다.”
7. “[時]라, 물고기가 물을 마셔,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알듯… 시(時)라, 시(時)라. 청풍과 명월이 서로를 따른다. 복숭아는 붉고 오얏은 희고, 장미는 자줏빛이다. 조물(造物)의 자연에 물어보니 자기는 (왜 그런지) 모른다 한다.”
8. “[佛]이여, 뜬금없이 시비를 논하는 이여.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싯달타요, 자라서는 석가라. 사람을 구제하기 무수하고, 여러 죄악을 굴복시킨 이. 그러나 그가 스스로 부처라 한다면, 바로 마군이로 변하고 말아. 다만 구멍 없는 피리 하나 들고 그대 위해 태평가를 부르리라.”
9. “[在]라, 객이 오거든 꼭 내다보아야 한다. 그대로 보내서도 안 되고, 뒤따라가다간 맞는다…. 홀로 앉아 화로에 향불 하나 피워놓고, 경전 두어 줄을 읊으니, 가련타, 수레 마차를 타고 다니는 이들이여, 문밖이 소란스러워도 그래도 그냥 둘 밖에….”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6. [一]이라, ‘하나’가 무엇입니까. 옛적 조주선사의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화두는 익히 들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나.”
대학 시절, 학교 작파하고 천지를 방랑하던 시절, 대구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술집에서 제가 숟가락 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자,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뭐 하냐?” “이거 ‘하나’를 알면, 세계의 비밀을 알 것이라고 하는데… 글쎄 아무리 보아도 모르겠거든….” 술에 취해 번화한 거리로 나선 제 눈에, 앞서 지나가던 젊은 여자의 뒷 머리채가 보였습니다. 한번, 잡아 당겨보았습니다. 여자는 화난 얼굴로 째려보았고, 저는 그냥 웃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당황해하며 물었습니다. “너 왜 그랬어?” “무슨 물건이 돌아보는지 궁금해서….” 미안합니다. 무슨 악의나 심술이 있었던 것은 천만 아니었다고, 오래전 일이지만, 그 여자분에게,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립니다.
저는 ‘하나’를 착각했더랬습니다. 그것은 숟가락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의 선비 서화담은 ‘하나’가 구체적 수(數)가 아니라 수의 체(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하나’란, 이제까지 혀가 닳게 설해 드린 바, 분열과 갈등이 없는 원초 태초의 ‘합일(不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번 정권에서 유행한 그 구호를 기억하시나요. ‘하나’란, 술잔을 높이 들며 “우리가 남이가!” 할 때, 바로 그 단결된 공동체 의식 안에 있습니다.
태어날 때 우리는 가족 안에서 ‘하나’입니다.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고, 부모형제의 안위와 행복을 자기 것처럼 생각합니다. 나중 분가해서 뿔뿔이 흩어지면 그 ‘하나’ 의식은 약해지고, 섭섭한 일들도 쌓이곤 합니다.
세상의 분열과 갈등은 이렇게 ‘하나’로부터, 둘, 그리고 셋으로 분화해 나간 결과입니다. 불교는 그 분열로 인한 소모와 갈등을 돌이켜 본래의 ‘하나’로 돌아오라고 손짓합니다. 야부가 말합니다. “둘로 부서지고 셋이 되는 것도 다 이것이 갈라진 결과이다. 천지가 갈리기 전의 우주적 혼돈을 찾아라. 이것이 네가 해야 할 일생의 공부이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7. [時라], 때는 무엇입니까. 세상은 스스로의 연기(緣起)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찰나에 수많은 요소들이 결합하여, 다시 멸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만들고 가는 그 거대한 섭리의 ‘이성’에다가, 우리는 토를 달고, 불평을 토로합니다. “왜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거지.” 악이라고 생각한 일들, 없어져야 좋겠다고 생각한 일들이 자연 전체의 이성에는 필요하고 합당하다는 역(逆)의 발상을 해 본 적이 없습니까.
장자는 똥은 거름으로 다시 회귀하고,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는 단순하고 심플한 진리를 우리는 잊고 살지 않습니까. 노자는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한테 이쁘고 좋은 것만 선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잘못된 생각이다.(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제2장) 세상은, 그렇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습니다. 세상의 꽃과 달, 그리고 짐승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압니다. 그리하여 있을 때 있고, 없을 때 없습니다. 그게 기적 중의 기적이고, 거기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시(時)라, 시(時)라. 청풍과 명월이 서로를 따른다. 복숭아는 붉고 오얏은 희고, 장미는 자줏빛! 조물(造物)의 자연에 물어보니 자기는 모른다 한다.”
평지에 풍파(風波)를 일으키신 부처님
8. 그럼, 대체 부처님은 여기 왜 오신 것입니까. 모든 것이 자기 때를 알아, 우주가 한 점 흠도 부족도 없이 완전한데, 대체 부처님은 왜 오셔서는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야부의 표현을 빌리면, “바람도 없는데, 파도를 일으키는(無風起浪)” 것이냐 말입니다. 왜 “뜬금(面目) 없이 와서 이러네 저러네 시비(是非)를 하시는 것이냐” 말입니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세상이 이미 이루어진 줄을 모르고, 그 축복을 향유할 줄 모르고, 탐욕과 갈등으로 분열된 사바의 중생들이 안타까와서 여기 왔습니다. “그렇게 오신(如來)” 비원으로 하여, 우리는 구원의 희망을 보고, 그 빛에 따라 사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 빛과 불은 그러나 그 분이 다시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은 그것을 다만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을(指示)” 뿐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연주하는 곡은 태평가인데, 연주하는 피리에는 구멍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9. 그럼, 대체 어떻게 살아라는 것입니까.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데, 우리는 사람과 어울려 있고,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지금 이 구절이 그 삶의 비결로 제시된 것입니다. “객이 오거든 꼭 내다보아야 한다. 그대로 보내서도 안 되고, 뒤따라가다간 맞는다.” 저런,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이것을 오늘의 화두로 내 드리고, 사설을 그만 접기로 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