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으로 돌리는가 왼쪽으로 돌리는가?
“망상 부리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해 ‘한 방’
정말 황당한 일을 당했을 때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을 하게 된다. ‘어처구니’는 윗맷돌 가장자리에 달려있는 나무 손잡이를 말한다. 아랫맷돌의 가운데 부분에서 윗맷돌과의 중심을 잡아주는 쇠심은 ‘중쇠’라고 부른다.
어처구니와 중쇠는 맷돌의 제 역할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중쇠는 늘 고정되어 분실한 염려가 없지만 어처구니는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부엌에서 급히 맷돌을 써야하는데 어처구니가 없다면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또 선문답에서 중쇠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체(體)의 의미로, 어처구니는 항상 돌기 때문에 용(用)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총림도 맷돌을 사용할 일도 잦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맷돌마저 법거량의 도구가 될 일도 당연히 생기기 마련이다.
귀종지상(歸宗智常) 선사 회상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납자가 울력 시간에 맷돌을 돌리고 있었다. 귀종지상 선사가 이걸 보고 한마디 던졌다. “맷돌은 네가 돌릴 수 있지만, 중쇠는 그렇지 않다. 한 마디 일러라.”
그러나 그 납자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맷돌의 어처구니는 그대로 손에 쥐고 있었지만 대답을 못했으니 그 상황이야말로 진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된 셈이다. 당연히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쇠는 ‘중심수자(中心樹子)’라고 돼 있다. ‘가운데 있는 나무’ 라는 뜻이다. 쇠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그 부분을 나무로도 만들었던 모양이다.
앞뒤 문맥으로 보건대 본래 나무로 만들던 어처구니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말을 듣고서 보복종전(保福從展, ?~928)이 대신 말했다.
“지금까지는 맷돌을 돌렸으나 이제는 못 돌리겠군.” 맷돌을 수행삼아 돌려야 했는데 단지 노동에 그쳤기 때문에 제대로 된 맷돌질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라 하겠다.
맷돌이라는 의미를 법명으로 사용한 것은 ‘철마(鐵磨)’니(尼)이다. 철마는 ‘쇠로 된 맷돌’이라는 뜻이다. 속성이 유(劉)씨인지라 총림에서는 ‘유철마’라고 불리는 도인이다. 자호이종(子湖利 ) 선사가 그 비구니의 소문을 듣고 와 대뜸 물었다.
“그대는 유철마가 아닌가?”
무쇠맷돌은 어떤 경우라도 깨지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갈아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의미이니, 이름자를 빌어 그 비구니의 수행경지를 추켜올려준 말이다.
“부끄럽습니다(不敢).” 물론 칭찬에 철마 비구니가 자기를 낮춰서 겸양한 표현이다.
하지만 그 다음은 당연히 반전시키는 말이 튀어나오게 된다.
“그대 이름이 쇠로 된 맷돌인데 오른쪽으로 돌리는가? 왼쪽으로 돌리는가?”
비구였다면 설사 그 이름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묻지를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맷돌은 물레방아와 더불어 알게 모르게 성적(性的)인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음담패설인 동시에 선문답인 것이다.
아니 격조를 갖추었기 때문에 음담패설이 선문답이 된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그만 여자라는 장애를 일으키게 되었다.
“화상께서는 망상을 부리지 마십시오(莫顚倒).” 얼굴이 붉어졌는지 그 순간에 미(迷)해 졌는지 그 대답은 이미 속제(俗諦)로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자호 선사는 그럴줄 알았다고 하면서 한 방 때렸다. 그리고 말했다. “멀리서 듣기에는 공부 좀 한다고 하더니 가까이 와서 보니 듣던 바와 같지 못하구나.”
그 사건이후 철마는 위산영우(771~853) 회상에서 더욱 용맹정진하여 안목이 완전히 열리게 되었다. 이에 위산 선사는 그 비구니를 ‘노고우(老 牛:늙은 검은소)’라고 불러주었다. 자신을 늘 ‘수고우(水 牛:검은 물소)’라고 불렀으니 나만큼의 경지가 열렸다는 뜻으로 붙여준 별명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