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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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도 얻을 수 없다
백 마디 말을 아무리 해도 한 번 실천만 못해


내면의 힘을 기르려면…


삶은 고가 아니라고 하셨지만 삶의 무게가 너무 버겁습니다. 스님, 내면의 힘을 길러서 자유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나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분들이 힘들고 괴로운 일상을 벗어나서 자유스럽게 살아가게 할 수 있을는지요?


언제나 우리가 항상 한자리를 하고 있지만 우리가 생겨나서 살아가는 이날까지 이끌어 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던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지금까지 이끌어 가기에 노고가 얼마나 많으셨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마다 다, 가정마다 크고 작은 고통스러운 문제들이 뒤따르고 있는 이것들을 어떻게 타파하고 나갈 수 있겠느냐는 문제죠. 부처님이 정법을 가르쳐 주시고 핵심을 불어넣어 주신 것은 바로 강설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학식도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에 그 내면에서 나오는, 좋은 것만이 아니고 슬프면 슬픈 것대로 아프면 아픈 것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것대로 어떠한 것도 고정됨이 없이 나오는 그 진실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다스려 가면서 아무리 고가 있다 할지라도 내 탓으로 돌리고 내면에 맡겨 놓는 그 작업을 우리가 항상 해야만 용광로에 헌쇠, 잡쇠, 짧은 쇠, 부서진 쇠든 다 집어넣듯이 우리들도 괴로운 모든 것들을 다 자기 주처를 믿고 거기다 다시 집어넣는다면 자동적으로 재생돼서 다시 새 쇠로 재생해서 나갈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는 순간마다 자꾸 아픔이 느껴집니다. 아픔이 느껴지고 왜 이렇게 걸어야만 했고,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야만 했고, 왜 이렇게 아파야만 했고, 왜 이렇게 허덕이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그런 생각도 해 보면서 살았습니다. 사실은 길을 걷다가도 남이 볼까 무서워서 눈물을 씻고 했습니다. ‘네가 뭐길래, 중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이 길을 걸어야 하느냐.’ 하고요.
그런데 남들은 강설을 듣고도 허세스럽게 생각하고 이론적으로 얘길 하고, 그것을 허세 삼아서 나의 아픔은 감추어 놓고 바깥으로만 웃고 그러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면 웃음도 어디로 간 곳이 없고 집안의 걱정과 모든 것이 불타오르고 있죠. 그러나 그런 것을 이론적으로 듣고 강설을 들어서 되는 건 아닙니다. 내가 커버해 나가고 실천을 하고 그대로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그런 방법은 바로 내면에서 나를 끌고 다니는 나의 주처, 본래 자성불은 자기가 스스로 청정함을 알고, 본래 자성불은 본래 자기가 여여함을 알고, 본래 자성불은 자기가 갖추어 가지고 있음을 알고, 본래 자성불은 자기가 그대로 만법을 들이고 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래 자성불은 자기가 스스로 자유스러움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남의 소리 듣지 말고 자기 본래 자성불을 믿고 관하면서 공부하세요. 어느 날 어렵게 사는 사람이 도저히 살 수가 없다는 말을 하더군요. 근근이 살다가 이제는 남편도 없고 그런데 돈 조금 나오는 걸 가지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데 자식들은 점점 자라고 학교에 가야 하는데 어쩔 수가 없어서 증권에다 넣었다고 합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애들은 다섯씩이나 되고 엄마 혼자 어떻게 할 양으로, 저게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내 가슴속에서 뇌리를 울리고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남이 ‘이거를 팔아라. 이거를 사라.’ 이러는 소리를 듣지 말고 네 마음속에서, 주인공에 맡기고선 스스로 네가 사고 싶은 그것을 사고 남이 뭐라고 하더라도 듣지 말라. 사고 싶으면 사고 팔고 싶을 때 얼른 팔아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돼서 애들하고 원두막이라도 하나 살 수 있게끔 17평짜리 아파트를 사게 됐습니다. 그리고 조금 나머지 가지고 어물전을 내는데 시장에서 조그만 가게를 얻어 가지고라도 그것을 하라고 하면서 아예 손대지 말라고 그랬죠.
사람 사는 게 이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법이 저 강당에, 아니 법당에 부처님 법이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안방에 부처님 법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또 여러분 안방뿐만 아니라 저런 일터에도 그 한 분 한 분이 일을 하면서 거기 계신 그 반면에 바로 마음을 내면세계에 깊숙이 나를 이끌어 가는 내 주처가 바로, ‘여기 있구나. 감사하구나. 이렇게 일을 해서도 먹고 살게 했으니 감사하고, 부모의 은혜로서 이렇게 육신을 얻었으니 감사하고, 길러 줬으니 감사하고, 이렇게 이끌어 가니 감사하구나. 또한 우리 식구를 이끌어 주는 것도 당신밖에 없어.’ 하고 참 깊은 마음으로서 그렇게 한생각을 내 놓고 부지런히 일을 하는 그 걸음걸이는 아마도 여러분의 가정에 빛을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그마한 거든지 큰 거든지 어떻게 해야만 우리가 그런 모든 것을 커버하고 나갈 수 있을까. 여러분은 팔자 운명 때문에, 아니 죄업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산다고 아예 체념하고 사는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체념할 때가 아니라 실험을 해야 합니다. 체념을 하시지 말고 체험을 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알뜰히 능력을 기르는 도리밖에는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도리를 길러서 위로는 묵은 빚을 갚고 아래로는 햇빛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서 우리가 실천을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백 마디 해 봐도 한 번 실천하는 것만은 못할 겁니다, 아마.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하셔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고, 모두가 생각에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이성계가 아무 뜻도 없이 떡을 파는 노인네 앞에 가서 떡 그릇에 가서 그냥 엎드러진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게 순수하게, 안다 모른다를 떠나서 내가 모두를 얻으려면 이 우주 천하의 모든 것을, 만약에 하나도 가질 게 없다면 하나도 버릴 게 없이 이 주먹 안에 꼭 들어갈 것입니다. 여러분을 버리지 않는다면 얻을 바가 없습니다. 하나라도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의 찌꺼기가 남아서 다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땅 놓으십시오. 몽땅 맡기시고 사십시오. 그저 여러분이 ‘들이고 내고 살고 있는 자체, 자기까지 더불어 같이 이끌어 가는 주인공 자체가, 운전수가 차는 끌고 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다면 어느 땐가는 자기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빛이 나고 스스로, 참으로 지혜가 생기고 물리가 터져서 하늘을 보고 한 번 울고 땅을 치고 한 번 울어야 하는 그런 인간의 삶의 그 뜻을 알게 됩니다.
이 말의 뜻이 지금은 이해가 안 가고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이럭하는 건 곧바로 들어가는 길을 인도하고 싶어서입니다. 만약에 자기 근본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빙글빙글 돌려서 무슨 옛날 얘기 하듯이 한다거나, 무슨 옛날 역사를 얘기하듯 한다거나 하고 옛 조사들의 업적을 얘기한다거나 한다면 이건 그냥 그림의 떡입니다. 누가 이렇게 하고 누가 이렇게 살았고,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 하고 그냥 지나가는 얘기 하듯이 하면 하나도 공덕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 내면의 힘은 길러지지 않는 것이죠. 하나를 들어도 자기가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데 귀로 한번 듣고 그냥 지나가버린다면 그건 들을 때 그때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르든 알든 작든 크든 자꾸 관하면서 실천으로 옮길 때 나도 자유롭게 되는 것이고 주위 어려운 사람들도 밝게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도 발전 가능한지요?


제가 얼마 전 죽은 영혼들과 영적 교류를 할 수 있다는 한 미국인이 쓴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죽은 후에도 영적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으며, 설사 자살이나 사고 같은 끔찍한 환경 속에서 죽은 사람들도 영적 발전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죽음으로 인연을 이룬 유가족들에게는 이야말로 희소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것인지요? 저희들이 죽은 후에 이 육체가 없이도 영적 발전이 가능한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데 있어서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치면 그게 합치는 동시에 말을 하고 생각하고 살았었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그 자체가 있습니다. 그럼 그 영혼이라는 건 뭘 하는 거냐. 바로 자기 불성을 싸고 있는 겁니다. 생명력을 싸고 있는 거라고요. 생명력을 싸고 있는 동시에, 즉 말하자면 죽어도 불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의식과 이 모습이 없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살면서 좋은 일을 했든지 어떠한 일을 저질렀든지 거기에 따라서 또 차원이 높아지기도 하고 차원이 낮아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것은 거기다가, 삼합이 개입하는 데 넣을 수가 없죠.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수가 없지만 그것은 모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데에 따라서 가는 거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원소는, 은하계의 별성도 모습은 다 떨어지지만 그 원소는 남아서 다시 옷을 입어요. 별성의 옷을 입는다고요. 그렇듯이 사람도 그렇게 원소는 더함도 덜함도 없이 남아서, 즉 말하자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차원이 주어지면 차원이 주어지는 대로 또 진화가 되는 거죠. 그래서 살아나가고 진화돼서 또 생존하게 되는 거고, 또는 거기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모습이었는데 짐승의 모습으로도 될 수 있고, 짐승의 모습이었는데 사람의 모습도 될 수도 있고, 차원에 따라서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알아두어야 될 문제는 뭔가 하면, 어저께도 과거지만 우리가 어저께에 살 때는 바로 어저께가 오늘이었습니다. 어저께도 오늘이었다고요. 삼천 년 전도 오늘이었고요. 그리고 오늘에서 보면 내일이 미래이지만 내일에서 보면 내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오늘만 있는 겁니다. 오늘만 있으나 찰나찰나 바뀌어 가지고 가니까 공했다. 하나도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니다. 모두가 그냥 돌아간다. 하다못해 개미 하나도 그냥 있는 게 없이 돌아가고 있고 지구에 살고 있다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모든 생명들은, 나무 하나도 권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그냥 죽는 게 아니다. 죽으면 목신이라는 원소가 있다. 그래서 그 나무들하고도 같이 교류가 돼서 그건 또 다시 싹이 날 수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혼이 죽으면 더하고 덜함도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부닥침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마음공부 하는 사람이 자손이 된다든가 부모가 된다든가 이런 연결성이 있다면 틀림없이 죽은 사람도 공부할 수가 있고 개혁할 수가 있고 계발할 수가 있고 에너지를 상승시킬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책 써 놓은 것을 볼 때 죽어도 그냥 할 수 있다는 건 말이 안되죠. 우리 산 사람도 지금 어떠한 한생각을 해서 실천을 옮기는 데 문제가 있는 거지, 한생각을 하지도 않고 실천도 옮기지 않는데 무슨 보수가 나오겠습니까. 에너지가 안 나오죠. 그런 것과 같은 거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공부해 나가는 그 자체가 아주, ‘하나님’ 하는 것도 하나로 돌아가는 그 이치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님’이라고 그런 거예요. 또는 ‘주여’ 하는 것도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자기 주처가 있는 거지 자기가 없으면 주처가 없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라는 것도 자기인 거예요. 자기 근본 주인공. 그런데 모두 고상을 걸어놓고 타의에 기도를 한단 말입니다. 내 생명과 과거 나와 진화된 나와 현재 나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죽어도 알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그런 거를 잘 생각해서 하시도록 하세요.


조상님이 꿈에 보여요


요즘 들어서 힘들게 살다가 돌아가신 조상님이 자꾸 꿈에 보이고 그럽니다. 천도재를 지내야 하나요? 아니면 어떻게 마음을 내서 보살펴 드려야 하나요?


여러분이 지혜롭지 않아서 그러는 거예요. 부모님이 잘못 돌아가셨거나, 무슨 일이 있어서 총에 맞아 죽었다거나, 6·25때 무슨 일이 있어서 죽은 그런 사람들, 물에 빠져 죽었다든가 목을 매서 죽었다든가 이런 분들도, 아무리 어렵게 살고 아무리 악하게 살고 잘못하고 살고 그랬어도 아주 열심히 공부하면서 모든 걸 돌려놓으면 그냥 바꿔지는 겁니다. 그래야 편안하게 살 수 있구요.
예를 들어서 내가 먹으면 먹는 대로 먹을 거고 입으면 입는 대로 입고 걸으면 걸은 대로 걷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뭘 뜻하느냐 하면, 공부를 할 때는 모습이 있어야만 부딪침이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습이 없으면 공부를 못한다고 하는 게 나옵니다. 그래서 영탑을 만들어 놓으라고 하는 것도 모습이 없으니깐 그 탑에 모습을 두고선 모두 공부를 하게 만든 겁니다. 그 뜻이 그렇게 된 겁니다. 게다가 내가 내 탑을 지금 가지고 다니는데 내 탑 속에다 다 넣어도, 이 세상 만법 만 중생들 만 부처님들을 다 넣고 다녀도 손색이 없다 이런 뜻입니다.
이 뜻이 이해가 가십니까? 마음공부를 못해서 깨치질 못했다고 ‘우린 깨치지 못해서 그걸 못해.’ 이러지 마시고 그거를 하시는 동시에 그게 벗어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고, 우리 모습도 벗어날 수 있는 거지만 돌아가신 영령들도 벗어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집안이 편안하게 된다 이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못 보지만 살다 보면 남인데도 영령들이 ‘저분한테만 들어가면 내가 참 세세생생을 아주 벗어날 텐데.’ 하고선 그냥 달려듭니다. 달려들어서 꿈에도 보이고 그냥 그럽니다. 그러면 그거 얼른 응해 줘야죠. 응해 주고, 하다못해 법당에 와서 응해 주는 동시에 절이라도 서너 번 해 드리면, 서너 번 해 드리고 주인공에다 다 집어넣으면 아주 좋은 일이죠. 늘 얘기하지만 어저께도 내일도 없이 오늘입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저께도 없고 내일도 없고 오늘 말입니다. 오늘이 영원하다고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예전에도 말을 했지만 조상들의 영령들, 모두 내 앞에 거론되는 사람들을 전부 주인공 안에다 다 흡수하라고 그랬습니다. 이해가 갑니까? 하나하나가 너무도 살기가 바쁘고 어렵고 지금은 더더욱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빠르게 뛰면 빠르고 느리게 뛰면 느린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뛰고 안 뛰고가 없이 빠르게 생각하면 되고 빠르게 생각지 못한다면, 이해가 안돼서 느리다면, 그 이해가 안되면 말입니다, 뭐든지 결정이 안 나고 적응이 되지 않죠. 이해가 돼야 뭐든지 결정적으로 흡수할 수가 있으니깐요.
그리고 그렇게 넣으면 넣는 대로 없어진다 해야 되나요? 넣는 대로 둘이 아니다 이런 소립니다. 넣어도 넣어도 둘이 아니요 늘어나지 않는다. 꺼내도 꺼내도 줄지 않고 꺼내는 사이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령들을 다 집어넣으면, 그러면 나한테서 우글거리고 집안이 외려 더 문제가 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집어넣어서 공심으로 공생으로 공체가 된다면 정말 따뜻하고, 더하고 덜함도 없이 따뜻하고 자기를 자기가 죽이는 법이 없으니 가정에서도 평화스럽단 얘깁니다.
여러분도 가정에서 무척 애를 쓰시죠. 그래서 이것이 이해가 되고 이것이 정말 적응이 돼야만 이런 소릴 하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소릴 못하죠. 그런데 이런 소릴 해도 적응이 돼야 합니다. 이 도리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둘로 보지 않는다면, 둘로 하지 않는다면 둘로 보지 않는 것이고, 둘로 보지 않는다면 공생으로 되는 것이고, 공생으로 되면 공심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혼자 봐도 혼자 보지 않고 서로 더불어 보는 거니까요. 그렇게 해서 공심으로만 볼 수 있다면 불안(佛眼)이 되죠. 육안으로 보는 거는 그냥 우리가 지금 현실에 보는 거고 심안으로 보는 거는 마음으로 보는 거고 그렇다 그러지만, 그 경지가 참 많아서 법안(法眼) 혜안(慧眼) 불안 이렇게 가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차원이 모두, 여러분은 모르시고 올라가야 되죠. 모르면서 올라가고 올라가면서 알게 되고, 또 살다 보면 알게 되고,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그렇게 알게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게 우리가 더 좋은 게 뭐냐 하면, 내 마음 주인공 하나가 겨자씨라면 일체제불을 다, 일체제불도 각 처 각 업의 부처님 상이죠. 부처님의 모습이고. 그런 걸 다 이 가죽 속에다 넣고 다닌단 말입니다. 그렇게 쫓아다니면서 모시고 쫓아다니면서 받들고 그러지 않아도 될 수 있겠죠. 일체 중생들도 다 넣고 말입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요. 우리가 몽땅 이 세상의 모든 일체를 다 넣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아주 어려운 일들이 아니죠. 한 주먹 쥐어다가 넣어도 쥔 사이도 없고 넣은 사이도 없다. 그러면서도 넣어졌다. 또 꺼내서 풀어 줘도 풀어 준 사이가 없이 풀어 줬다. 이것이 바로 보살행이며 보살의 법도입니다. 공법 도리인 것이죠.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모두 편안하게 사시려면 이 도리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지금 각 세계를 봐도 진짜로 자기 근본처에 직선적으로 들어가게 하는, 자활을 하게끔 하는 데가 별로 없습디다. 그리고 모두 자활이라고 해도 화두를 갖게 한다든가 이래도 그것은 자활이 아닙니다. 화두는 내 모습이 벌써 화두입니다. 내 모습을 보고 ‘내 모습 속에 모든 일체제불이 있는 것도, 중생도 있는 것도 다 한꺼번에 공체로구나. 공체이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말도 할 수 없겠구나.’ 이런 것쯤은 알아야 전체를 알게 되죠. 일하시는 것도 답답하게 때로는 이쪽으로 들어갈 걸 갖다가 저쪽으로 들어가니깐 참 답답하죠. 답답한데 그것을 ‘골수를 찾아서 잘 들어가게 당신만이 할 수 있어.’ 그러고 자기가 쑥 빠지고 자기 주인공을 내세우면 그냥 옳게 들어가게끔 다 됩니다. 모든 일이 다 그래요.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항상, 여러분이 바다와 같이 아신다면 나도 바다와 같고 여러분이 우물 안처럼 생각하시면 나도 우물 안이고 연못 안이고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이 바다처럼 탁 터져서 훨훨 턴다면 나도 훨훨 털 것이고요. 그런데 여러분이 방에서 한 치도 못 나간다면 이 세상 정신계의 모든 문제들을 어떻게 타개를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열심히 정진하세요.

가정에서 많은 범죄가 일어나는데


불교에서는 인연법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가족이라든가 부부 인연이라는 게 불교에서 보면 상당히 중요한 인연인데 요즘 가정에서도 많은 범죄가 일어나고 있고, 또 불행한 사건도 많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부부가 서로 그 인연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을 불교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또 해결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분이 불교라는 그 뜻을 몰라서 그렇지 불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저 풀 한 포기도 바로 불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정에서 사는 가족들이라 할지라도 때에 따라서 만날 “저 사람이 나에게 잘못해서 내가 이렇게 희생했어.” “저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망했어. 저 사람이 조렇게 하는데 내가 화가 안 나?” 하고서 남의 탓을 하고 남의 원망을 하고 이렇게 되니까 가정 파괴가 되고 그렇습니다. 화목하지 못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모두 나 하나가 내 탓으로 돌리고 모두에게 부드럽게 얘기해 주고 부드럽게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느 땐가 작업이 순조롭게 될 때 그 가정은, 가족들의 마음이 이 전력이 똑같은 거와 같이 광력도 똑같고 자력도 똑같고 통신력도 똑같이 전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니만큼 내가 그 마음을 먹는데 상대방도 바로 그 마음이 동시에 자꾸자꾸 거기 가서 같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전력이 똑같이, 한 집에 전구는 제각각인데 전력은 똑같습니다. 가스통이 하나인데 어느 곳에서 쓰는 가스이든 다 그 한 통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 통에서만 내가 잘할 수만 있다면 또 그것은 한 가정을 정말이지 부드럽게 이끌어 갈 수 있고 사랑의 대상이 되고 거기에선 화목이 깃듭니다. 그러니까 하나도 걱정이 없게 되는 것이죠.
어느 신도가 남편이 별이 셋이나 되고 아주 우쭐대고 살 사람인데도 겸손합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남편이 들어와도 본 체를 않고 그래서 서로 떨어지는 일이 많았죠. 그러니까 자기를 은근히 배신해서 그런 줄 알고 만날 싸웠습니다. 그래서 그냥 가정이 파괴의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여길 왔습니다. 그래서 관하는 도리를 가르쳐 줬죠. 그랬더니 얼마 안 가서 남편이 말입니다, 전자에 안 하던 짓을 하더란 얘깁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남편이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부드럽게 “여보, 피곤해서 어떡해요?” 하면서 오히려 위안을 해 주면서 따뜻한 보금자리로 바뀌니까 시간만 나면 자꾸자꾸 들어오려고 하는 그 마음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떤 때는 자식들 때문에 급한 일이 있어서 ‘여보, 어디 있어? 당신 어디 있어?’ 하고 생각하면 그냥 그 생각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화가 온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니까 마음이 연결이 되는 거죠.
이렇게 우리가 통신을 할 수가 있고, 우리가 이렇게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부처님 법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화목하려면 서로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절대 남 탓하지 마시고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세요. 그리고 부드럽게 말해 주고요. 그럼 지금보다는 훨씬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법문 또한 타성이 아닌지요.


거의 매일 ‘길을 묻는 이에게’를 읽고 또 읽고 마음을 다잡으면서 열심히 수행의 길을 가고자 하는 불자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일체를 주처에서 한다는 걸 믿고 걸어가기는 하지만 이렇게 매일 매일 반복해서 스님의 법문을 읽는 것 또한 타성에 젖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어떤 글을 읽더라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읽어야 됩니다. 실천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론으로만 알고 끝나면 나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하는 거죠.
그런데 이론으로 알든 모르든 그걸 떠나서 아는 대로 심부름만 하고 있다는 것을 딱 믿어 버리고 잘된다 못된다를 떠나서 하게 되면 그게 최상이에요. 그런데 글로만 읽으면 자기를 못 믿는 반면에 이론이 생기는 거예요. 진짜로 믿는다면 말이 없어져요. 말이 끊어지죠. 보이는 데 딱 이으려고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정신계에서 자동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말수가 없어져요. 그러니까 거기 자기 스승을 찾아라 이거예요.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해 놨으니까 자기 주인공을 찾아라 이거지요. 그렇게 자꾸 하다 보면, 매사 그렇게 하다 보면 자동적으로 나오게 돼 있어요.
이렇게 여러분이 공부해 나가는 건 저승에서 이승으로 나오는 공부들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만 한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어요. 걱정이 없게 되는 것은 진짜로 자기 뿌리를 믿고 무조건 거기다가 놓고 사니깐 이유가 없어지는 거죠. 근데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잘못하고 잘하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에요. 봐서 알고 그러지요. 그런데 봐서 부족한 점이 있으면 상대를 탓하는 생각을 하지 말고 자기 주처에다 관해라 이거예요. 그리고 상대방에게 말을 하되 인의롭게 말을 해 주세요. 정히 꼭 말해 줄 것이 있다면 인의롭게 말을 하고 항상 관하면서 말을 해라 이거지요. 그러면 서로가 함이 없이 공부하는 길을 걷게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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